남자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편안한 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20대 중반에 방향성 상실과 함께 온 내 나름 독하게 겪은 우울의 끝에 발견한 길. 그래서 그 길의 의미와 내 삶의 의미를 쉬이 놓쳐 버리기 싫었으므로 편한 길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편한 길이 무조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여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글ㆍ사진 임자헌
20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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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을 시작했을 때 나는 20대 막차를 탄 나이였다. 그 나이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면서 집에 손 벌리기가 참 뭣했다. 그래서 학원 강사며 과외 같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 넉넉할 수가 없는 주머니 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이 하나 들어왔다. 나는 선이 들어오면 무조건 나간다. 어색하고 낯설고 재밌다. 남자가 직업이 빵빵하다 했다.

부자이거나 말거나, 직업이 좋거나 말거나 나는 내 마음에 안 들면 뒤도 안 돌아본다. 그런 전력으로 선과 소개팅을 해치웠기 때문에 이번에도 부담 없이 나갔다. 나는 그때까지 ‘중간’이란 게 있을 줄 몰랐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중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남자가 마음에 들지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싫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럭저럭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나에게 묘한 증세가 나타났다. ‘맥 빠짐’ 증세. 그는 그때 나의 1년치 연봉 이상을 한 달에 버는 사람이었다. 이미 널찍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고,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세 번씩 다녀가며 집안일을 해 주고 있었다. 부유한 사람이야 그전에도 몇 번 소개받아 봤지만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아닙니다요’였기 때문에 고민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사람, 몇 번 만나고 나를 끌어당기면 끌려갈 것 같은 사람. 좋은 배경이 없다 쳐도 매력이 없지 않은 사람.

한 사흘 맥이 빠져 지냈다. 햇볕이 찬란하던 사흘째 날 오후에 화장실에 앉아 무엇이 문제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왜 맥이 빠지는 건가.’ 내 비록 연애세포들이 특A급은 아니더라도 눈치가 없지 않으므로 그 사람이 나의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잡을 수 있는지(그 사람이 최소한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는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잡는 순간, 지금 내 하는 모든 일은 ‘취미 생활’이 될 터였다. 내가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이유는 나에게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활을 매달 꾸리기 위해서 치열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월세, 책값, 진학, 각종 공과금과 식료품?생필품비, 교통비, 식대…. 장기 계획이고 단기 계획이고 간에 넉넉한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애써 꾸려 가는 형편 중에 해내고 있는 공부가 어찌 내게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소중함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러나 그 사람을 선택하면 모든 것이 일순간에 해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공부를 지금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의 공부가, 그리고 장래를 위해 내가 참으로 애틋하게 세우며 즐거워했던 그 많은 계획들이 ‘취미’가 되어 버린대도 나는 방향을 잃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나는 아직 ‘돈’이란 것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아직 ‘나’가 단단하게 성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20대 중반에 나름 혹독하게 겪었던 우울증을 벗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나에게 아직 세상을 넓고 깊게 보며 나를 세워갈 힘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남자를 보냈다. 나는 다시 빠듯한 생활로 돌아왔다.


정말 멋진 말이지 않는가. 편안한 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20대 중반에 방향성 상실과 함께 온 내 나름 독하게 겪은 우울의 끝에 발견한 길. 그래서 그 길의 의미와 내 삶의 의미를 쉬이 놓쳐 버리기 싫었으므로 편한 길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었다. 편한 길이 무조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의 여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잃지 않고 편안함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애써 일하는 것만이 미덕도 아니고, 편안하게 누리고 사는 것만이 미덕도 아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한쪽에만 서 있으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삶은 언제나 묘한 역설의 복판에 서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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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랑 언니의 명랑 고전 탐닉 임자헌 저 | 행성:B잎새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이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한문을 공부하고 사극에서나 볼 법한 옛글을 번역하는 저자는 소위 ‘문자 좀 쓰는 여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시크한 요즘 여자이다.이 책은 현대 여성들이라면 다 겪을 법한 소소한 일상의 사건사고에 저자 특유의 기발한 발상과 위트, 독특한 관찰력을 담고 거기에 고전을 살짝 토핑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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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헌 #맹랑 언니의 명랑 고전 탐닉 #서경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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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4.02.20

때때로 사는것이 너무 힘들어서 편한 길을 갈망한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곳에는 "부"만이 있을뿐 제 자신은 없을것 같아 겁이 나더라고요. 지금 빠듯한 생활을 할지언정 뭔가를 이루려는 열정, 뭔가 이루어질것 같은 희망이 삶의 기쁨이겠죠? 너무나 풍부해진 요즘보다 많은것이 부족했던 옛날이 더 그립고, 행복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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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2014.02.19

편한 길을 걸을 수 있는 길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이의 새로운 시도가 돋보입니다. 지금 선택한 공부에 매진하며 사는 삶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하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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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그나

2014.02.18

저도비슷한경험을한적이있었어요.저도감당할자신이없더라구요,그리고저의꿈과일이더중요했기때문에그만뒀었죠!!!!읽어봐야할책이또한권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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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헌

의욕 넘치게 심리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막상 가 보니 원하던 학문이 아니어서 대학시절 내내 방황했다. 어쩌다 보니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연수원에 입학하여 깊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상임연구원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름 ‘문자 좀 쓰는 여자’가 되었다. 《일성록》 1권을 공동번역하고 3권을 단독 번역했으며, 《정조실록》을 재번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