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이 오디션
위키드 오리지널 크리에이브팀의 4차례 콜백을 받고 다섯 차례 오디션을 거쳐 실력으로 엘파바 역할을 따낸 배우 박혜나, 1200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유독 빛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이번 오디션은 즐겼어요. 해외 스탭들이 제 안의 것을 편하게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거든요. 욕심을 가지면 다른 힘이 생겨서 안 좋더라고요.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순 없을 것 같아요. 즐기는 사람이 더 노력도 하게 되고요.”
늘 오디션을 소모전이라 생각해왔던 그녀, 어느 순간 마음을 바꾼 것이 주효했다.
“취미생활을 오디션으로 생각하기로 했죠. 왜냐하면 그동안 오디션 보는 게 참 힘들었어요. 결과가 늘 좋은 게 아니었고 그러면 왜 안 뽑혔을까 생각하다 지치게 되거든요. 그게 어느 정도 선이 지나니까 오디션 자체가 재미있게 느꼈어요. 새로운 공연의 노래를 먼저 마스터하게 되고, 스스로 테스트하고, 점검하게 되고, 그로인해서 연습하게 되고, 즐기게 된 거죠. 그렇게 즐기다가 이렇게 된 거고요.”
이렇게, 그녀는 위키드의 초록마녀, 엘파바가 되었다. 그래서 ‘다 때가 있다’라고 말하나보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리즈시절이 찾아왔다.
만들어보고 싶게 이끄는 배우
박혜나를 알아본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은 오디션장에 선 그녀에게 환호를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more, more!”이라고 북돋아줬다. 박혜나는 그들이 알아본 자신의 잠재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평소에 저는 잔잔한 물처럼 살아요. 하지만 그들은 잔잔한 물 아래 끓고 있는 용암 같은 걸 봤겠죠. 왜냐하면 오랜 시간 연기해왔고, 더 좋은 작품을 원하던 시점에 이 작품이 저에게 왔어요. 그래서 저에게 하려는 의지나 그동안 길러진 힘을 보시지 않았을까, 그리고 제가 엘파바와 닮아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매력 있는 초록색 페이스잖아요.(웃음)”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갑작스러운 주목에 혹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은 부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하고 있어요.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이런 인터뷰를 하면 좀 느끼죠.”
하지만 그런 부담감마저도 인터뷰 내내 특유의 털털한 웃음과 유머로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던 배우 박혜나, 평소 무대에 서는 부담감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은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로 연습.
“연습밖에 제가 믿을 구석이 없어요. 연습을 하는 만큼 제 부담감도 덜고 확신이 생겨요.”
그래서 정규 연습 시간이 끝나도 곧잘 연습실에 남아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다고.
“모든 대사가 음악과 함께 이루어져서 타이밍도 중요하고 박자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이어져서 잘 표현하기 위해서,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어진 시간이 하루 24시간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서 작품에 임하면 ‘오늘 버티면 내일은 더 강해지겠지’ 하는 마음이 드는데 연습을 쉬면 불안하고 뭔가 놓친 것 같고 그래요.”
<위키드>라는 대형무대에서도 오직 부담감을 떨칠 그녀의 무기는 연습을 통한 자신감 확보다. 연출진은 그렇게 하루하루 연습을 통해 발전하는 그녀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걸까?
<위키드>의 위엄
지난해 첫 선을 보이며 3개월 만에 관객 20만 명 돌파라는 역대 뮤지컬 최고 흥행성적을 보유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 오즈의 도로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나쁜 마녀가 알고 보면 오해받는 착한 마녀였다는 이야기를 매우 스펙터클하게 펼쳐놓는 바람에 뮤지컬 무대는 상당히 풍성하다. 50번이 넘는 무대 체인징과 12.4m의 거대 타임 드래곤을 앞세운 입체적 무대부터 총 350여벌을 갈아입고 등장하는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까지. 특히 무대는 지난해 호주 오리지널팀의 공연보다 조금 더 객석 친화형으로 진화했다.
“무대 속에 내가 있는 느낌? 묘하게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볼거리가 많아지는 거죠. 작년에 볼 사람은 다 보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을 연습하면 할수록 그런 걱정은 전혀 안 되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감정 전달을 한다는 매력이 또 생기거든요. 저는 연습하면서 위키드가 이런 작품이구나 새롭게 깨닫기도 했어요. 그래서 한국어 공연이 한국 관객에게는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싶어요. 감정의 교류가 되면 와 닿는 부분이 더 커지잖아요.”
기자 역시 지난해 못 알아듣는 대사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배우들 동선 따라가느라 눈이 무척 바빴던 기억이 떠올랐다. 첫 한국어 공연, <위키드> 공연 10주년에 맞춰 한국 관객에게 주는 선물이라 해도 좋겠다
배우 박혜나가 꼽는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은?
“엘파바가 '디파잉 그래비티(Defying Gravity)'를 부르는 장면이죠. 엘파바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깨고 소신껏,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결심하고 발을 내딛는 장면의 노래인데요. 많은 드라마와 음악적 요소, 무대까지 가장 잘 어우러지는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관객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일 것 같아요.”
1막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Defying Gravity’와 그녀의 비상, 어떻게 날아오르는지도 눈여겨보시라.
“배우로서는 또 가장 걱정되는 씬이기도 해요. 지켜야할 요소도 많고 하늘로 올라가서 노래를 하는 장면이라 저도 기대돼요. 처음엔 이 장면을 보면서 배우의 가창력에 대해 감탄했던 장면인데 그 안에 드라마가 더 뭉클하더라고요. 그런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전신 초록색 분장에 대한 압박?
초록마녀라 온통 초록분장을 해야 하는 엘파바, 워셔블 특수물질로 되어있다곤 하지만 여배우의 얼굴, 이대로 괜찮을까?
“사실 피부가 약해요. 땀도 많은 편이라 초록색 분장을 하면 피부에 침투할까 살짝 걱정은 돼요. 하지만 그런 거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하지만 매일 몇 시간을 초록색 분장을 하고 실제로 엘파바로 잠시 살았던 해외 배우들은 얼마간 초록색 피부 톤을 유지한다는 슬픈 얘기에도 굴하지 않는 박혜나, 글린다의 블링블링한 의상도 물론 부럽지 않다.
“하지만 글린다 역 제의가 들어온다면 해보고 싶어요. 정 반대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다만 지금은 초록마녀 엘파바와 박혜나의 간극을 좁히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엘파바를 엘파바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엘파바를 표현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박혜나로 돌아와서 엘파바가 처한 상황이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진실되게, 충실하게 접근하고 있어요. 진짜를 찾아보고 진짜를 느껴보려고요. ‘엘파바는 이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나라면?’ 이라는 생각으로 연기하고 있어요. 상황에 집중해서 저로서 느끼고 표현하려고 하죠.”
내 꿈은 타이밍
어려서부터 춤이나 연기, 노래를 좋아했던 배우 박혜나, 하지만 평범한 인생을 사는 게 당연한 주변의 분위기 탓에 평범하게 공부해 대학시험까지 치렀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교에 붙지 못했던 그녀가 재수를 선택한 순간,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재수할 때 우연히 음악과 노래를 배우는 워크샵이 있어서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그 전에는 그런 걸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얘가 왜 이러나’하는 분위기였는데 재수할 때는 선뜻 거금을 내주셨어요. 그 워크샵에서 구소영 음악감독님을 만나게 됐죠. 그 때 뮤지컬을 알게 되고 그래서 과도 연극영화과를 갔어요.”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 때 그녀가 원하는 학교에 붙었다면 갈 필요 없었던 워크샵, 거기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입문하게 된 뮤지컬, 그리고 지금 이 자리. 모든 게 한 순간에 결정되었다.
“이 길을 가게 된 게 그런 운명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이번에 <위키드>도 못할 뻔 했어요. 제가 뮤지컬 <심야식당>을 하면서 다른 작품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런데 <심야식당>에서 원캐스트를 하게 되면서 하려던 작품을 못하게 됐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 작품을 하게 됐다면 <위키드> 오디션을 아예 못 봤을 거예요. 사실 그 때는 그 작품을 못하게 된 게 아쉬웠는데 그게 이런 기회가 될 줄 몰랐죠.”
지금도 가끔 너무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들에 소름이 돋는다는 그녀, 이왕 돋은 김에 소름 돋는 질문 한 번 더 해봤다. 정말 마녀라면 꼭 부리고 싶은 마법이 있는지.
“음, 이 질문에 재미있게 답하고 싶었는데, 저는 진짜로 마법을 부린다면 이 세상에서 정말 전쟁을 없애고 싶어요. 가장 멍청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잖아요. 진짜로 전쟁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렇다. 마법 스케일 큰 사상 최고의 마녀다.
좋은 배우보다 좋은 사람
그녀가 첫 무대에 선지 어느덧 7년. 그 땐 10년 후를 꿈꾸기보다 10년만 해보자 싶었다.
“불확실한 직업인데다가 잘 되는 사람이 있으면 못 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거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씁쓸함도 있기 마련이고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무대에 서는 일도 줄게 되고, 그래서 외로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이 직업이 없었으면 과연 내가 잘 살고 있었을까 싶었어요. 배우가 되기 전까지는 삶이 무의미했어요. 그래서 감사하게 살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감사하게 10년을 해보자 싶었어요.”
하지만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그녀는 소위 남들이 인정하는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꿈을 적는 중이다.
“일단 좋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박혜나라는 인간이 좋은 에너지를 뿜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고 싶어요. 예전에는 무대가 가장 중요했는데 지금은 좀 바뀌었어요. 무대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대에 섰을 때 그게 다 나타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 믿음이 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예진
일로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닌 지 벌써 15년.
취미는 일탈, 특기는 일탈을 일로 승화하기.
어떻게하면 인디밴드들과 친해질까 궁리하던 중 만난 < 이예진의 Stage Story >
그래서 오늘도 수다 떨러 간다. 꽃무늬 원피스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