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아직 삶의 끝자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지나온 내 삶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를 꼽으라면 대학 시절이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나는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이십대 초반이었으나 가장 기억하기 싫은 삶을 보냈다(놀라운 것은 실제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비해 그 시절에 관련된 기억이 적다는 거다. 싫은 기억은 의식에서 사라져 무의식으로 들어간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옳은 걸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을 그리워한다지만 내겐 전혀 그렇지 않은 셈이다. 그립기는커녕 할 수만 있다면 그 ‘젊은 날의 초상’을 내 삶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사실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가장 싫어하게 된 것은 괜한 역설이 아니다. 삶의 절정기를 다른 어느 때보다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보냈기 때문이니까.
대학에 입학한 그해 1980년
대학에 들어간 1980년 3월은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알려진 시기였다.(편집자 주 : 1979년 10ㆍ26사건 이후 1980년 5ㆍ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전까지의 정치적 과도기) 그 전해 10월에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바꿔 말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절대 권력자였던)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고, 12월에는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 혹독한 겨울이 끝나고 대학이 신학기를 맞았으니 나라 전체가 시끄럽지 않으면 이상할 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이른바 ‘3김’으로 불리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급격히 활성화된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고 발버둥을 쳤고, 이미 음지의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 세력은 혼란스런 사태를 관망하면서 양지의 권력까지 차지할 기회를 엿보았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수개월 동안 차세대 권력이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3김이나 신군부나 서울의 봄을 만들어낸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은 농사가 아닌데 어찌 낟알을 서둘러 주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점은 시민과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1979년 부마항쟁을 비롯해 독재에 항거한 사회 운동이 유신정권에 균열을 만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절대권력의 최후를 가져온 건 어디까지나 적의 내분이었지 시민 봉기나 혁명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었다. 결국 서울의 봄은 어찌 보면 외부에서 주어진 조건이었으므로 누구도 이후 사태를 주도할 처지가 못 되었고, 설령 누가 나서서 주도권을 차지하려 한다 해도 정당성을 얻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시작된 나의 대학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입학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나는 졸업장만 준다면 당장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1주일이 더 지나자 ‘새로운 대학생활’의 길이 열렸다. 유신 시대에 지하로 숨어들어 활동했던 학내의 온갖 사회과학 동아리들이 서울의 봄을 맞아 오픈되었고, 풋풋한 신입생들에게 그 전까지 꿈꾸었던 어떤 대학생활보다도 ‘풍요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추억하기는 싫지만 버리고 싶지는 않은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다양하고 깊은 교류를 하고, 이성과 데이트를 즐기는 전형적인 대학생활은 신입생 때부터 결코 가질 수 없는 꿈이 되어버렸다. 공부는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고 선배들이 강요하고 또 내가 받아들인 공부였고, 친구들과의 교류는 지나치게 깊지만 다양하지 못했으며, 여학생과의 만남은 불가능할뿐더러 스스로 바라지도 않는 것처럼 가장해야 했다. 슬픈 일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원하지는 않았어도 거부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이중적이었던 나의 대학생활
그래서 나의 대학생활은 이중적이었다. 당시 하드록과 블루스에 심취했던 나는 낮에는 그 ‘새로운 대학생활’에 완벽히 적응했고 밤에는 그 서양의 ‘부르주아’ 음악에 빠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1호선의 종로 부근을 지날 때면 항상 갈등했다. 특히 낮부터 마신 막걸리에 취했을 때는 마치 연인에게 몰두하듯 갈등이 더 심했다. 종로3가 역에서 내려 세운상가로 올라가면 육교 위에 해적판 레코드를 싸게 파는 노점들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쯤은 그 수백 장의 레코드를 하나하나 뒤져가며 원하는 음반을 골랐다. 두 시간쯤 고르다 보면 손가락 끝이 먼지로 새까매졌다.
지금은 MP3로 음악을 들었다면, 80년대엔 턴테이블의 엘피판으로 음악을 들었다.
지킬 박사로 사는 낮의 생활에 불만은 없었으나 솔직히 밤의 하이드가 되는 게 더욱 기뻤다. 복사판 음반을 몇 개 사들고 오면 우선 알코올로 깨끗이 닦고 낡은 턴테이블에 올렸다. 대부분은 튀는 부분이 한두 군데 있었는데, 이 문제는 레코드 카트리지에 동전을 올려 교정했다. 구멍이 비뚤게 뚫린 것은 드라이버를 불에 달궈 바로잡았다. 그러고 나선 재킷 한 구석에 구입한 날짜를 작은 글씨로 써넣었다. 누가 보았다면 마치 기도를 드리는 듯한 성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습관은 고학년이 되어 후배들을 지도하는 위치가 되었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대학 생활 내내 해적 음반은 내게 사랑스런 연인이었고 종로3가 역은 기쁠 때나 울적할 때나 찾아가는 연인의 집이었다.
그 이중생활을 졸업한 뒤 나는 일단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시력이 몹시 나쁘고 짝시가 심한 탓에 군 면제 대상이라고 여겼으니, 솔직히 당시에는 방위 복무도 운이 없다고 여겼다. 물론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내 시위나 노동 현장과의 연계 활동으로 구속되었지만, 내가 갈 길도 어차피 같았으므로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 친구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은 가져야 했다. 방위병 생활은 무척 편했으니까.
마치 고등학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고, 후방 부대에서 으레 많게 마련인 각종 행사에 동원되었다. 인사과에 배치된 내가 맡은 주 업무는 타자였는데, 당시는 타자기로 유인물을 써서 복사집으로 유통시켰으므로 타자는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진급을 앞둔 인사과장은 자매결연 학교에서 받은 위문품 가운데 값싼 과자 따위만 남기고 통조림과 가죽 제품을 골라 사단 인사참모에게 바쳤다. 계급이 중사였던 선임하사는 하사 시절 현역 병사들에게 당한 설움을 중사가 되어 보복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군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괜찮았을 군상들이 군대에서 보여주는 그 좀스러운 작태는 고등학교 시절의 못난 선생들을 그대로 연상시켰다.
전동식 타자기
내 삶에 각본이 있었더라면 아마 방위병 생활을 마친 뒤 좀 더 거친 무대로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뭔가에 의해 뒤틀렸고, 나는 또다시 원치 않는 분야로 옮겨갔다. 하지만 거기서의 경험은 비록 처음에는 마뜩치 않았어도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출판사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출판 편집 일은 출근 첫날부터 내게 맞았고 무척 재미있었다. 게다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은 급료까지 주었다. 실은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경험이었다.
사회과학 서적이 활발하게 출간되던 1980년대
1980년대 초반부터 전국의 대학교 앞에는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학생들은 거의 매일 서점에 들러 신간들을 둘러보고 사회과학 서적을 구입했다. 학생들은 비판과 이념의 시각에서, 혹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혹은 최소한 시류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사회과학 서적에 탐닉했다. 책을 만드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 역시 더러는 전체 사회운동에 복무한다는 시각에서, 더러는 사회를 진보시킨다는 관점에서, 더러는 이 참에 돈 좀 벌어보려는 욕심에서 활발히 진보적인 사회과학 서적들을 출판했다.
다행스런 것은 출판사나 독자들이나 책을 교양의 상징으로 여기는 속된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 책을 만들었고 필요에 따라 읽었다. 나는 편집 일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요구한다는 필요성에 잔뜩 고무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소녀시대나 빅뱅의 음반을 만드는 기분이라고 할까? 얼마 안 가 나는 이제부터 이 길을 평생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친 김에 번역도 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개인적으로 읽고 싶었던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번역할 수 있고 출판으로 외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 무렵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노래패는 노동자의 심정에서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아쉬움이 쌓이는 소리”를 노래했지만, 나는 직업상으로는 출판 ‘노동자’였어도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아쉽기는커녕 어서 내일 출근해 해야 할 일을 걱정하고 기획했다. 운동이나 이념이 아니라 순전히 직업으로서도 만족도가 대단히 높은 셈이었다.
세계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면 그 개인은 세계적 명사이거나 과대망상 환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사도 아니고 환자도 아니지만 세계사적 사건으로 인해 삶이 크게 굴절되었다. 1989년과 1990년 옛 소련과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자 갑자기 사회과학 출판 운동이 약화되었고 출판사들이 문을 닫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1989년 11월 10일 아침, 베를린 장벽 위에서 장벽의 붕괴를 기뻐하는 독일인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까웠던 나는 소련과 북한을 포함한 일체의 현실 사회주의 노선과 거리가 멀었지만, 사회과학 출판의 길이 닫히자 삶의 노선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삶은 나은 편이었다. 노동이나 운동의 현장에 남은 사람들, 학문의 진로를 바꾼 사람들, 개인적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취업하거나 고시를 준비하게 된 사람들, 이도저도 그만두고 자기 수련에 몰두하게 된 사람들에 비해 이후에도 책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비참했던 1980년대 전반에 비해 후반은 내게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후반도 역시 돌아가고 싶거나 그리운 시절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비록 내가 (그때도, 또 지금도) 반대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원하지도 않았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의 이십대, 1980년대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너무 어두웠다.
남경태
19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사회과학출판 운동에 뒤어든 그는 그는 ‘남상일’이라는 필명으로 『제국주의론』,
『공산당 선언』,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등 사회과학의 원전들을 번역하는 데 주력했다.
저자에게는 그야말로 ‘종합 지식인’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학술계에서 지식의 크로스오버와 퓨전을 전문으로 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든데, 저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문학의 재료들을 구슬을 꿰듯 잘 엮어, 독자에게 쉽고 친숙하게 다가간다.
특히 인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와 철학을 한 저자가 일관성을 가지고 서술해 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그는 생각의 역사인 철학사와 현실의 역사인 세계사를 흐름이 보이도록 풀어 썼다.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인문 지식 생태계의 전반을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와, 일반 교양독자들과 인문학을 매개로 소통하는 그의 능력은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은쿠키
2013.03.31
랜디
2013.03.31
서연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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