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에 관한 이야기들
‘강남 스타일’이 국내외에 열풍을 일으키면서 싸이가 재조명되고 있다. 해외 언론에서조차 그의 약력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싸이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전해보고자 한다.
싸이는 1977년생으로 본명은 박재상이다. 강남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 예명인 싸이는 ‘싸이코’에서 따왔다.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반도체 장비 회사인 디아이 박원호 회장이다. 디아이는 싸이의 조부인 고 박기억 회장이 창업주로 1955년에 설립, 57년의 업력을 자랑한다. 2002년부터 박원호 회장이 대주주로 경영하고 있다. 강남에 본점을 두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도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에 각종 반도체 장비를 제조, 공급하는 반도체 종합 장비 업체다. 중소기업대상과 모범납세상 등을 몇 차례 수상했다.
[사진제공] 좋은 콘서트
어머니는 강남 일대에서 여러 개의 고급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누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 겸 교수다. 싸이는 강남의 8학군 출신으로 반포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선택한 대학은 미국의 보스턴 대학교 국제경영학과다.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아버지의 뜻으로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사업에는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그가 유학을 통해 진정 원했던 건 음악이었다. 다니던 대학을 곧장 휴학한 그는 버클리 음대로 자리를 틀어 이 대학을 졸업한다. 화가 난 아버지는 학비 일체를 중단했고, 궁여지책으로 그는 불법 시디를 제조해 한인업체에 판매해 생활고를 면한다.
스스로 고백하듯, 유학시절 다양한 이성 교제와 클럽 출입 등 음주가무를 즐겼다. 훗날 문제가 된 대마초 흡연 역시 이 시절에 접한 것이다. 강남 부잣집 아들의 화려한(?) 유학 생활과 ‘놀았던’ 이야기 등에 심사가 뒤틀린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 ‘강남 오렌지’, ‘강남 양아치’ 등의 오명을 붙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가 제도권 음악을 시작한 건 1999년 9월 발표된 조PD의 2집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소속사는 예당 엔터테인먼트. 그 후 2001년 자신의 1집 < PSY FROM THE PSYCHO WORLD >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수록곡인 ‘새’가 대히트를 치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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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1월엔 2집 발매가 예정돼 있었지만,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면서 2집은 2002년 1월에 발매되었다. 대마초 사건이 터지자 일각에선 ‘원래 그렇고 그런 놈’이라는 비아냥이 흘러 나왔고, 방송 출연 역시 금지됐다. 자업자득으로 2집 음반은 냉소와 무관심 속에 그대로 묻혔다. 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한 건 구속된 당시 조부인 박기억 회장이 세상을 떠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그가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난 건 2002년 월드컵 때였다. 태극기를 휘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나타난 그를 한 방송사 카메라가 잡았다. 방송 출연이 여전히 금지된 상태라 방송 사고로 볼 수 있었지만 대중은 그에게 관대했다. 국민대화합의 월드컵 응원 열기가 그를 감싸 안은 것이다. 즐거움을 마음껏 발산하는 축제의 장에 누구보다 잘 노는 남자 싸이가 함께한 장면도 제법 그럴 듯 했다. 방송 금지도 그 후부터 풀렸다. 훗날 싸이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청 앞 광장으로 나가게 된 이유에 대해 모두들 생업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때였기 때문에 자신도 생업인 ‘자숙’을 뒤로 하고 광장에 나가게 되었다는 익살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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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3집 < 3싸이 >를 발매한 후 수록곡인 ‘챔피언’이 또다시 히트를 치면서 싸이는 재기에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더 이상의 시련은 없을 것 같은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사건은 또 터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장 민감한 아킬레스건 군 문제가 들이닥친 것이다. 2003년부터 35개월 동안 병역 특례 업체에서 복무를 마쳤지만 병무청은 부실 근무 의혹을 제기하며 편입 취소 통보를 했다. 소송과 판결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2007년 12월 아내와 쌍둥이 딸을 남겨 두고 나이 서른에 20개월 현역으로 재입대를 했다. 그가 남긴 말은 ‘구질구질하게 굴어서 죄송하다’였다.
장장 55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자 더 이상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를 두 번 가는 악몽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국민들이었기에 월드컵 시절보다 더 큰 아량으로 그를 대했다. 싸이가 말한다. 일반인들은 지나온 삶을 ‘기억’이라고 하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은 ‘기록’이 된다고. 과거의 오점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군 제대 이후 그의 삶과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평온했다. 제 2의 음악 인생을 시작할 기회이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2012년 7월 15일 대한민국과 세계를 열광시킨 ‘강남 스타일’을 발표한다.
‘강남 스타일’ 열풍과 이유
한국 음악 시장 석권을 넘어 미국과 프랑스 등 해외까지 열기가 이어졌다. 미국 아침 방송 < Eye Opener TV >와 온라인 뉴스매체 < 허핑턴 포스트 >, CNN 등 유력 매체에서 싸이와 ‘강남스타일’을 보도하는가 하면, 프랑스의 M6 인기 프로그램인 < 7:45 >에서도 싸이를 비중있게 다뤘다. 티페인, 로비 윌리엄스, 조쉬 그로반 등의 뮤지션들도 깊은 관심을 표했다. 8월 21일 미국 아이튠즈 뮤직비디오 차트 순위에선 팝스타 저스틴 비버를 제치고 ‘강남 스타일’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아가 싸이는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2012 MTV < 비디오 뮤직 어워드 >에 참석했으며, 미국 인기 프로그램인 NBC < TODAY SHOW > 출연도 예약했다.(편집자 주: 20일에는 미국 유명 TV 토크쇼 ‘엘렌드제너러스쇼’에 출연하여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美 빌보드 핫100에서는 11위에 오르며 새 역사를 썼다. 아이튠즈 차트에서는 전세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해외 반응과 열풍은 싸이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쾌거다.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싸이 열풍이 언제, 어디까지 갈 것인지는 국내 대중문화와 한류 면에서도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강남 스타일’이 열풍을 일으킨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멜로디의 매력이다. 빠른 템포 음악의 생명은 흥겨움과 즐거움이다. 가사를 의식하지 않고도 듣는 순간 흥겹고 신이 날 때 대중은 매력을 느낀다. 사실상 이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멜로디의 힘은 위력적이다. 뜻 모르는 디스코팝에 땀이 홍건할 정도로 춤을 추고, 일부 외국인은 ‘오빤 강남 스타일’을 ‘오픈 콘돔 스타일’로 잘못 듣는다 해도 멜로디가 흥겨우니 반응을 하게 된다.
강남 스타일 M/V
여기에 싸이의 탁월한 대중문화 마케팅 능력이 가미되는데, ‘강남 스타일’을 듣게만 하지 않고, 보게도 하는 ‘뮤직비디오’를 출시했다는 점이다. 비쥬얼 역시 기존 아이돌 스타의 뮤직비디오와는 확연하게 차별화했다. 대다수의 뮤직비디오가 등장 인물의 심각한 사랑 타령과 상심이 컨셉이었던 반면, ‘강남 스타일’은 폭소를 자아낼 만큼 재미있고 웃기게 만들었다. ‘말춤’이라는 기발한 춤사위를 개발해 도로와, 지하철역, 한강 둔치 등에서 거침없이 춤을 추는 것도 흥미를 유도했다. 말춤은 따라하기가 쉬워 다수의 대중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유재석과 노홍철을 등장시켜 코믹 댄스를 추게 한 것도 인기의 한 요소다.
한편, 인터넷 사이트에 ‘강남 스타일 중독 과정’이라는 카툰도 인기를 얻고 있는데, 내용인 즉 이렇다. 분 단위로 중독 과정을 묘사하는 카툰의 첫 장면은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를 접한 주인공이 “이게 뭐지?” 하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2분 간은 계속 바라보다 3분 째에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한다. 4분이 지나자 어느새 말춤을 따라하고 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재미있고 공감간다는 반응이다.
‘강남’이라는 단어가 흥행의 크고작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뮤직비디오 이전에 이 노래를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코드가 강남이다. 한국인들에게 강남은 묘한 이중성과 양면성 혹은 호불호 중 하나인 절대적 정서가 공존한다. 질시, 능멸, 동경, 욕망, 선망 등이 각 개인에 따라 다양한 색깔로 자리한다. 통계화할 수는 없지만 강남을 증오하는 사람들보다는 동경하거나 호불호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후자의 경우라면 비판적 의식은 가지고 있되, ‘강남성’을 꿈꾸거나 욕망하는 힘이 더 우위를 점할 것이다. 요컨대, 노래 제목에서 강남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싸이가 이걸 의식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지향하는 건 자신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을 파악해 신명나게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다가서는 강남은 비단 강남 지역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엠에프 이후 한국인들은 경제에 대해 더욱 높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경제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강남은 부유하게 살고 싶은 대중의 열망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이름이자 상징이다. ‘말춤’만이 중독성이 강한 게 아니다. 지속적인 후렴구로 반복되는 ‘오빤 강남 스타일’에서 강남이란 단어 역시 중독성을 유발한다. 부에 대한 열망이 투영된 단어이기에 반복해서 들을 경우 거부감보다는 긍정의 요소로 최면될 수 있다.
강남이라는 단어와 뮤직비디오가 즉각적으로 와 닿는 것이라면 가사는 차후의 분석 대상이다. ‘강남 스타일’ 가사에 지레짐작할 강남의 모습은 없다. 그 흔한 고급자동차도 보이지 않는다. ‘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는 사나이’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이거나,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 ‘점잖아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사나이’처럼 평범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두 남녀가 만나 결국 ‘갈 때 까지 가볼까’ 하며 작업을 거는 결말은 어느 지역에서나 즐길 수 있는 ‘클럽 스타일’이다.
강남성을 배제한 가사 역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부럽게 하는 진짜 강남의 모습이 담겨 있거나 오렌지들의 화려한 유희가 있었다면 적잖은 이들이 재수없게 여겼을 것이다. 싸이의 영특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중은 강남의 특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맥거핀 효과’ 즉 속임수 효과라는 게 있는데, ‘강남 스타일’의 가사 장치가 이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싸이의 음악이 B급인가
일각에선 싸이의 음악에 대해 ‘B급’이라고 말한다. 싸이 스스로 B급 문화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해왔다. 차이점은 크다. 전자는 싸이 음악을 세칭 ‘3류 싸구려 저질’로 폄하하는 것이고, 싸이가 지향하는 B급은 겸양이자 위선 떨지 않고 대중의 욕망과 호흡하겠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있어 굳이 A급, B급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회의가 들지만, 대중문화의 속성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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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이윤극대화를 지향한다. 자본논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중으로 하여금 소비하게끔 만드는 게 가장 큰 목표이며, 이를 위해 주도면밀한 마케팅 기법을 발휘한다. 그동안 싸이는 음반 발매의 목적은 그것을 팔기 위해 소비자 기호를 고려하는 장사라고 역설해왔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라는 말도 해왔다. 자신이 콘서트에 열과 성을 다하는 건 표를 구매한 관객에게 본전 생각 안 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했다. 대중문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다.
조용필과 임재범이 탁월한 가창력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리면 A급이고, 싸이가 말춤을 추며 ‘갈 때 까지 가보자’고 선동하면 B급일까. 다수의 대중이 그의 음악에서 즐거움을 얻는 데도 말이다. 미국의 가수 티페인이 ‘강남 스타일’에 대해 “이 놀라운 비디오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건 무엇이며, < 허핑턴 포스트 >가 “강남스타일에 매료당할 수밖에 없다”고 격찬한 건 또 무엇인가.
대중문화는 개인의 취향과 정서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급수’를 따져 재단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춤을 위해 노래를 버리는 숱한 아이돌 스타들은 싸이와 적수가 안 된다. 싸이가 데뷔할 때 가장 크게 비판한 게 아이돌 스타들의 ‘립싱크’였다. 콘서트 등 어느 무대에서건 라이브로 춤과 열창을 멋지게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싸이는 실력파 가수다. 창의력도 탁월하다. 이승기의 히트곡 ‘내 여자라니까’ 등을 작사, 작곡할 정도의 전천후 뮤지션 능력도 겸비했다.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할 줄 아는 철학과 일관성도 갖췄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
꽃미남 신예들을 선호하는 정형화된 세계에서 싸이가 맨처음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좁아 보였다. 데뷔 과정에 대해 그가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한 말을 직접 들어보자.
같은 아파트에 선배 친구가 이사를 왔어요. 그분이 인터넷에 곡을 올렸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그분이 조피디 형이예요. 형이 하이텔, 천리안에 곡을 올렸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이 형이 가수가 되더라구요. ‘어? 저런 방법이 있었네?’ 그래서 저도 올렸어요. 그랬더니 조피디 형을 캐스팅한 회사에서 “야, 니 후배도 계약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왜냐면 그 당시 여론도 그랬고, 기획사에서 들으실 때도 그렇고 목소리만 들으니까, 제가 굉장히 중저음이 매력적이거든요.(웃음) 그분들은 저를 182 정도의 키에 샤프할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또 전화 목소리는 더 좋아요.(웃음) 전화 통화를 하는데 “네, 여보세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오우~네, 그래요. 싸이요?” 그러면서 당장 들어오라고 비행기표를 보내줬어요. 그래서 들어왔는데, 그분들이 제 얼굴을 보더니 정말 공항에서 공황상태가 일어난 거예요.(웃음) 사무실에 갔는데 저를 가운데 앉혀놓고, 사장님 이하 전직원이 회의를 시작해요. 사장님이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어떡할 거야?” 직원들도 한마디씩 해요. “저, 가면을 씌우면...” “쌍커풀을 시키면...” 그러니까 사장님이 그러세요 “야, 그걸로 되겠냐?” 결국 회의를 하다가 결론이 안나고 다 나가시더라구요. 그랬는데 그 당시 같은 소속사에 이정현 씨가 있었어요. 이정현 씨가 당시 99년에 ‘와’라는 노래로 음악프로 1위를 해서 회식자리를 같이 갔어요. 제가 그 자리에서 평소 동네에서 놀던 대로 논 거예요. 이를 테면 얼음통에 집게 있으면 집게를 펴서 립싱크를 한다든지, 그런 잡기들 있잖아요. 평소에 하던 것들을 한 거예요. 하다가 제가 테이블에 올라가서 유선 마이크를 가랑이 사이로 빼서 딱 요 상태였어요. 그런데 사장님이 요 상태에서 음악을 멈추시더라구요. “저거다!” 그러시는 거예요. “저거라면 승부가 날 수도 있겠다, 변수가 있겠다” 그러면서 “니 춤 보니까 오히려 너 생긴 게 괜찮네. 그 춤에 맞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데뷔를 하게 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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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의 나이. 올빽 머리에 건들건들하는 속칭 ‘어깨’의 풍모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너만을 바라보던 날 차버렸어, 나 완전히 새됐어.’ 후렴구에 맞춰 독특하게 흔들어대는 춤사위에 웃고 또 웃었다. 그러다 같이 즐겼다. ‘싸이 홀릭’은 어쩌면 이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외모 콤플렉스를 비웃기라도 한 양 싸이는 자신의 몸에 맞는 음악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그 욕망을 체화해 손을 내밀었기에 대중 역시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즐길 수 있었다. 춤 또한 철저하게 대중이 따라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었다. 그의 음악 철학은 ‘나는 광대, 관객은 광객’이다. 사전적 한자인 廣大(광대)가 아닌, 미칠 광자를 쓰는 狂大(광대)다. 광객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이 미칠 정도로 좋아 아버지를 속였고,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했다. ‘강남 스타일’은 뒤늦게 꽃핀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다. 이제는 새로운 K-POP 스타로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강남 광대(狂大)의 챔피언 등극. 그가 대중문화계에 수놓을 ‘기록’들을 예의주시해보자.
‘강남 스타일’ 패러디 동영상
이태준
도서출판 <인물과사상사> 마케팅 부장이다. 이 출판사에서만 13년 간 몸담고 있다. 저서로는 『이회창 대통령은 없다』(월간말, 200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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