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여행’이 필요한 순간은?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다른 이의 일기를 훔쳐보았던,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을 환기시킨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따라가며 작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의 시간과 경험이 지나갔을 길들. 때로는 곧잘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한 순간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어떤 경로로 그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곳을 지나왔는지’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의 다른 버전이다.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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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일기, 훔쳐본 적 있으세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시인이 『끌림』 이후 7년 만에 출간한 여행 산문집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 흔치 않은 경험일 것 같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래봤을 것 같기도 한, 흔해 빠졌다고 해야 할 지 특별하다고 해야 할 지 모를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날의 기록은 익숙했고 또 어떤 날의 기록은 낯설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들도 있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이따금씩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묻고 싶은 순간도 찾아왔다. 그럴 때면 흡사 암호책을 해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다른 이의 일기를 훔쳐보았던,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을 환기시킨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따라가며 작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의 시간과 경험이 지나갔을 길들. 때로는 곧잘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한 순간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어떤 경로로 그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곳을 지나왔는지’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의 다른 버전이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는 것. 둘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같은 마음을 만나 기뻐하고 다른 마음을 만나 호기심을 느끼면서 그를 이해하고 나를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 당신은 그랬군요’ 읊조리며 책장을 덮으면서, 그가 지나간 길 위에 이제는 함께 서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는 긴 글을 쓰는 것보다 짧은 글을 쓰는 성향의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시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시인 이병률에게는 여행에 대해 말하는 그만의 방식이 있다.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두 권의 책 모두 여타의 여행 에세이와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여행지의 정보를 소개하거나 개인적인 여정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 말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떠오른 감정인지, 그 감정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제 여행기는 철저하게 노트에서 발전된 거에요. 거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대부분 한 순간의 심리적인 것들이죠. 꼭 전후좌우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 케이스가 있는 거니까 그 몇 줄의 글들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어떤 화학작용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모두 일일이 말하기에는 『끌림』이나 이전의 시들에 비해서 제 얘기를 많이 한 책이기도 하구요.”
『끌림』 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사이
일일이 말하지 않는 작가의 방식을 독자들은 사랑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말하지 않는 이야기의 여백은 독자들의 경험과 감정들로 채워졌다. 작가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채워 넣는 여백. 그 울타리는 낮았고 공간은 넓었다. 지난 7년은 이병률 작가와 독자가 함께 여행과 사랑과 일상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시간이었다. 그 동안 『끌림』은 출간 5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독자들과 다시 만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통해 독자들은 작가와의 두 번째 연애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끌림』은 책에 형식이 없고, 무형식을 나지막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 목소리가 결코 나지막하지만은 않았죠. 그냥 소박하게 낸 책이 아니라 스타일을 많이 부려서 낸 책이라면, 이제는 어떤 정해진 것 없이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또 하나 달라진 점은『끌림』 이전에는 하염없이 돌아다녀야 되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곳에 가서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잠자리는 이불만 있어도 되는 그런 조건이었죠. 그런데 『끌림』 이후에는 어딘가에 앉아서 사람들 표정을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고 있는 시간이 굉장히 늘은 것 같아요.”
『끌림』 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사이, 그 시간들을 되짚으며 작가는 말했다. 지금껏 미쳐본 적이 없노라고.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려주는 것만이 지나간 시간을 얘기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 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미친다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는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못해본 게 한 가지 있다면, 미친 적은 없어요. 광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어느 한 군데에 너무 열과 성을 다해서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 어느 것도 듣지 않는 상태 같은 거죠. 그 상태를 꼭 쥐고 놓지 않는 상태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 상태가 된다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붙들어야 되겠죠. (그건) 사람 아니면 시인 것 같아요.”
사람에 미치거나 시에 미치거나, 둘 다에 미쳤을 때도 그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방랑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이지 않은가. 한 곳에만 붙박혀 살아갈 수 없도록 태어난 사람, 이병률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이란, 시란, 여행이란, 모두 하나의 단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은 못하는 편이에요.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약속에 의해서, 내가 해야 될 것들에 의해서 끌려가다시피 돌아오죠. 그래서 많이 징징대면서 와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죠. 언제나 떠나요. 떠날 수 있고. 지금은 조직에 몸담고 있어서 길게 떠나 있지는 못하지만, 10년 쯤 뒤에는 굉장히 큰 떠남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거기에서도 어떤 식의 안정이 찾아지면 또 다시 떠나는 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자를 갖고 태어났겠지만... 계속 떠나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 여행은, 기록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기록. 그 시작은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툭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다. 평소에는 굉장히 수줍어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그에게도 그런 것들을 못 견뎌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툭, 터지는 순간이다. 시인의 입을 통해 그 순간이 내는 소리를 들었을 때, 꽃망울이 터질 때 그와 같은 소리가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세계가 조우하여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일 테니까.
“그런 시간들이 툭 터지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말을 걸게 되는 거죠. 너무 큰 대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고, 약간 빈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맞춰나가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 담긴 몇몇 기록들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속도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 차이에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 잠시 읽기를 멈추고 ‘지금 이대로 좋은가’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케냐의 초원에는 ‘카메라’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예멘의 숙소에서는 작가의 방까지 케이블을 메고 올라와 준 직원 덕분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의 택시기사는 미터기에 찍힌 요금이 너무 많다면서 편도 요금만을 받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느린 것 같은 속도, 조금은 모자란 것 같은 속도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삶에서 적당한 속도란 어느 정도인 것일까.
“남한테 속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받지 않는 속도가 가장 좋은 속도일 텐데, 어떤 빠른 사람들이 계속 몰고 가는 총량이 있어요. 그 양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빨라지고 속도 때문에 눈치를 봐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또 하나의 답을 더 내놓자면 자기 속도대로 사는 것이 제일 잘 사는 것인데, 그렇게 살기에는 잃어버려야 할 게 너무나 많고 손해 봐야 할 게 또 너무나 많잖아요. 아파야 되는 일들도 많고. 자기 속도를 존중하면서 사는 사회를 살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최고로 좋은 여건에서 사는 게 아닐까요.”
찍고 쓴 이, 이병률 시인에게는 시와 산문처럼 사진 역시 기록의 한 방법이다. 『끌림』에 이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도 책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그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노트에 메모를 하고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파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기록하고 싶은 강한 의지’에 의해 셔터를 눌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때면 ‘예술가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나’ 자극이 몰려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배낭 속의 카메라를 꺼내 들고 화풀이하듯, 그럼에도 즐기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여행은 기록이라고,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는 정말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걸까.
다녀라. 그래도 더 다녀라
수없이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 작가에게는 ‘나이듦’의 의미도 남다를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행을 하며 보고 느끼는 것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는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어르신들’이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말했다. 그 시간 안에서 그들이 내는 속도와 시간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 자신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르신들과 곁에 머무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 옆에 있는 건 두려워요. 그들의 속도와 꿈의 농도 그런 것들이 전염이 되면서 제가 잃어버린 것, 놓친 것들에 대해서 그들이 밑줄을 쳐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뜨끔뜨끔 놀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고 자극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젊은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자극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제가 부담해야 될 충분한 피로감 같은 것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어른들 옆에 앉아있는 시간은 굉장히 편안한 아름다움인데, 아무 얘기 하지 않아도 되고 제가 느슨하게 있어도 되구요. 살면서 그분들이 저한테 주는 어떤 방향 같은 게 있어요. ‘아, 이런 속도구나. 고즈넉한 무엇이구나’ 라는 것. 그리고 무엇을 대할 때 굉장히 평화롭게 심플하게 받아들이죠. 아픈 일이면 아픈 일, 큰 일이면 큰 일, 기쁜 일이면 기쁜 일들을 걸러내야 했던 망들이 필요 없는 연세를 살고 있는 분들이니까요. 그 분들이 주는 에너지는, 비어있는 것이 널려 있으면서 그런 것들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줘요. 그래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 등을 두드려주고 어르신 손을 잡고 앉아 있다가 오고, 그런 게 좋아요.”
다음을 기약한 여행지로 작가는 최근 가수 이적과 함께 여행한 퀘백시를 꼽았다. 몬트리올과 함께 퀘백주에 속해 있는 같은 이름의 작은 도시, 퀘백이다. 정말 나하고 맞는 곳이구나, 느낌이 오는 도시는 어떤 곳일까. 동행한 이적 역시 ‘형은 여기 계속 살아야 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어떤 분위기와 매력을 가진 곳일지 궁금증이 더해갔다.
“따뜻해요. 제가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따뜻한 것이 뭔지 너무나 잘 알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이적씨도 그런 부분 때문에 퀘백이라는 도시가 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퀘백은 어느 도시보다 속도 같은 것도 느렸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어딘가 길게 여행을 와서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역사적으로도 퀘백은 프랑스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한 주를 만들고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 모아 형성된 지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주민 2세대, 3세대 중에는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 줄도 모르고 파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 보였다고. 아주 긴 여행을 와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 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행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큰 떠남을 꿈꾸는 작가가 그곳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파리에 가면 심리적으로 굉장히 편하니까 그곳에서도 지내고 싶구요. 그루지아(조지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제일 처음 와인을 만든 곳이에요. 와인을 완성한 곳은 유럽의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들일 테지만, 와인이 제일 처음 빚어졌다고 하니 ‘그럼 거기 가서 포도농사를 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곳에서 외로울 텐데 ‘외로우면 와인을 마시고 자면 어떨까’ 라는 단순한 생각 같은 것도 있어요.”
많은 날 동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 떠나고 걸었던 시간들. 그 끝에서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다녀라. 그래도 더 다녀라.”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는 큰 떠남을 시작할 것이다, 틀림없이. 물론 그 사이의 작은 떠남들도 있을 것이다. 이병률 작가와 독자들의 세 번째, 네 번째 연애는 계속될 것이고 작가가 걸었던 그 길을 독자들도 함께 걸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으며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혹은 그러할 것처럼. 책 속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위에서 문득,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처럼 그것을 이유로 훌쩍 떠나게 될 수도 있고 떠나지 않고도 목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떠났던 날들의 기록이, 이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테니까.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시인이 『끌림』 이후 7년 만에 출간한 여행 산문집이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 흔치 않은 경험일 것 같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래봤을 것 같기도 한, 흔해 빠졌다고 해야 할 지 특별하다고 해야 할 지 모를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날의 기록은 익숙했고 또 어떤 날의 기록은 낯설었다.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들도 있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이따금씩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묻고 싶은 순간도 찾아왔다. 그럴 때면 흡사 암호책을 해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다른 이의 일기를 훔쳐보았던, 그 때의 기억과 감정을 환기시킨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따라가며 작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의 시간과 경험이 지나갔을 길들. 때로는 곧잘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한 순간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어떤 경로로 그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곳을 지나왔는지’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의 다른 버전이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는 것. 둘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같은 마음을 만나 기뻐하고 다른 마음을 만나 호기심을 느끼면서 그를 이해하고 나를 살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아, 당신은 그랬군요’ 읊조리며 책장을 덮으면서, 그가 지나간 길 위에 이제는 함께 서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는 긴 글을 쓰는 것보다 짧은 글을 쓰는 성향의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시를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시인 이병률에게는 여행에 대해 말하는 그만의 방식이 있다.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두 권의 책 모두 여타의 여행 에세이와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여행지의 정보를 소개하거나 개인적인 여정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무엇이다.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 말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떠오른 감정인지, 그 감정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제 여행기는 철저하게 노트에서 발전된 거에요. 거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대부분 한 순간의 심리적인 것들이죠. 꼭 전후좌우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마다 다 다른 케이스가 있는 거니까 그 몇 줄의 글들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어떤 화학작용이 생길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모두 일일이 말하기에는 『끌림』이나 이전의 시들에 비해서 제 얘기를 많이 한 책이기도 하구요.”
『끌림』 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사이
일일이 말하지 않는 작가의 방식을 독자들은 사랑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말하지 않는 이야기의 여백은 독자들의 경험과 감정들로 채워졌다. 작가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채워 넣는 여백. 그 울타리는 낮았고 공간은 넓었다. 지난 7년은 이병률 작가와 독자가 함께 여행과 사랑과 일상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시간이었다. 그 동안 『끌림』은 출간 5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독자들과 다시 만났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통해 독자들은 작가와의 두 번째 연애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끌림』은 책에 형식이 없고, 무형식을 나지막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 목소리가 결코 나지막하지만은 않았죠. 그냥 소박하게 낸 책이 아니라 스타일을 많이 부려서 낸 책이라면, 이제는 어떤 정해진 것 없이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또 하나 달라진 점은『끌림』 이전에는 하염없이 돌아다녀야 되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곳에 가서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잠자리는 이불만 있어도 되는 그런 조건이었죠. 그런데 『끌림』 이후에는 어딘가에 앉아서 사람들 표정을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 뒷모습을 보고 있는 시간이 굉장히 늘은 것 같아요.”
『끌림』 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사이, 그 시간들을 되짚으며 작가는 말했다. 지금껏 미쳐본 적이 없노라고.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려주는 것만이 지나간 시간을 얘기하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 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미친다는 것, 그것이 작가에게는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못해본 게 한 가지 있다면, 미친 적은 없어요. 광적으로 살아가는 상태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어느 한 군데에 너무 열과 성을 다해서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 어느 것도 듣지 않는 상태 같은 거죠. 그 상태를 꼭 쥐고 놓지 않는 상태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 상태가 된다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붙들어야 되겠죠. (그건) 사람 아니면 시인 것 같아요.”
사람에 미치거나 시에 미치거나, 둘 다에 미쳤을 때도 그는 여행을 떠나지 않을까. 스스로도 어렸을 때부터 방랑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이지 않은가. 한 곳에만 붙박혀 살아갈 수 없도록 태어난 사람, 이병률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사람이란, 시란, 여행이란, 모두 하나의 단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은 못하는 편이에요.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약속에 의해서, 내가 해야 될 것들에 의해서 끌려가다시피 돌아오죠. 그래서 많이 징징대면서 와요. 여행을 떠나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죠. 언제나 떠나요. 떠날 수 있고. 지금은 조직에 몸담고 있어서 길게 떠나 있지는 못하지만, 10년 쯤 뒤에는 굉장히 큰 떠남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거기에서도 어떤 식의 안정이 찾아지면 또 다시 떠나는 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자를 갖고 태어났겠지만... 계속 떠나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 여행은, 기록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 | ||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기록. 그 시작은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고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툭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다. 평소에는 굉장히 수줍어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인 그에게도 그런 것들을 못 견뎌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툭, 터지는 순간이다. 시인의 입을 통해 그 순간이 내는 소리를 들었을 때, 꽃망울이 터질 때 그와 같은 소리가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세계가 조우하여 전혀 다른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일 테니까.
“그런 시간들이 툭 터지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말을 걸게 되는 거죠. 너무 큰 대도시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고, 약간 빈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맞춰나가는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 담긴 몇몇 기록들은 지금 이곳과는 다른 속도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 차이에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 잠시 읽기를 멈추고 ‘지금 이대로 좋은가’ 생각해 보게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케냐의 초원에는 ‘카메라’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예멘의 숙소에서는 작가의 방까지 케이블을 메고 올라와 준 직원 덕분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의 택시기사는 미터기에 찍힌 요금이 너무 많다면서 편도 요금만을 받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느린 것 같은 속도, 조금은 모자란 것 같은 속도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삶에서 적당한 속도란 어느 정도인 것일까.
“남한테 속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받지 않는 속도가 가장 좋은 속도일 텐데, 어떤 빠른 사람들이 계속 몰고 가는 총량이 있어요. 그 양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빨라지고 속도 때문에 눈치를 봐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또 하나의 답을 더 내놓자면 자기 속도대로 사는 것이 제일 잘 사는 것인데, 그렇게 살기에는 잃어버려야 할 게 너무나 많고 손해 봐야 할 게 또 너무나 많잖아요. 아파야 되는 일들도 많고. 자기 속도를 존중하면서 사는 사회를 살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최고로 좋은 여건에서 사는 게 아닐까요.”
찍고 쓴 이, 이병률 시인에게는 시와 산문처럼 사진 역시 기록의 한 방법이다. 『끌림』에 이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도 책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그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노트에 메모를 하고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파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기록하고 싶은 강한 의지’에 의해 셔터를 눌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때면 ‘예술가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나’ 자극이 몰려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배낭 속의 카메라를 꺼내 들고 화풀이하듯, 그럼에도 즐기면서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여행은 기록이라고,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그는 정말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걸까.
다녀라. 그래도 더 다녀라
사실 나이 든다는 게 괜찮을 때도 있더라구요. 묵직해져서 덜 흔들리고 덜 뒤돌아보고. | ||
수없이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 작가에게는 ‘나이듦’의 의미도 남다를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행을 하며 보고 느끼는 것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는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어르신들’이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말했다. 그 시간 안에서 그들이 내는 속도와 시간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가 자신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르신들과 곁에 머무는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 옆에 있는 건 두려워요. 그들의 속도와 꿈의 농도 그런 것들이 전염이 되면서 제가 잃어버린 것, 놓친 것들에 대해서 그들이 밑줄을 쳐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뜨끔뜨끔 놀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편안한 아름다움이 있고 자극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젊은 친구들 사이에 있으면 자극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제가 부담해야 될 충분한 피로감 같은 것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어른들 옆에 앉아있는 시간은 굉장히 편안한 아름다움인데, 아무 얘기 하지 않아도 되고 제가 느슨하게 있어도 되구요. 살면서 그분들이 저한테 주는 어떤 방향 같은 게 있어요. ‘아, 이런 속도구나. 고즈넉한 무엇이구나’ 라는 것. 그리고 무엇을 대할 때 굉장히 평화롭게 심플하게 받아들이죠. 아픈 일이면 아픈 일, 큰 일이면 큰 일, 기쁜 일이면 기쁜 일들을 걸러내야 했던 망들이 필요 없는 연세를 살고 있는 분들이니까요. 그 분들이 주는 에너지는, 비어있는 것이 널려 있으면서 그런 것들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줘요. 그래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 등을 두드려주고 어르신 손을 잡고 앉아 있다가 오고, 그런 게 좋아요.”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행은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백 미터 달리기처럼 백 미터를 다 왔다고 멈춰 서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으니 다행이다. | ||
다음을 기약한 여행지로 작가는 최근 가수 이적과 함께 여행한 퀘백시를 꼽았다. 몬트리올과 함께 퀘백주에 속해 있는 같은 이름의 작은 도시, 퀘백이다. 정말 나하고 맞는 곳이구나, 느낌이 오는 도시는 어떤 곳일까. 동행한 이적 역시 ‘형은 여기 계속 살아야 될 것 같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어떤 분위기와 매력을 가진 곳일지 궁금증이 더해갔다.
“따뜻해요. 제가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따뜻한 것이 뭔지 너무나 잘 알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이적씨도 그런 부분 때문에 퀘백이라는 도시가 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퀘백은 어느 도시보다 속도 같은 것도 느렸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어딘가 길게 여행을 와서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역사적으로도 퀘백은 프랑스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한 주를 만들고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 모아 형성된 지역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주민 2세대, 3세대 중에는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 줄도 모르고 파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 보였다고. 아주 긴 여행을 와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 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행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큰 떠남을 꿈꾸는 작가가 그곳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고도 남을 것 같았다.
“파리에 가면 심리적으로 굉장히 편하니까 그곳에서도 지내고 싶구요. 그루지아(조지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제일 처음 와인을 만든 곳이에요. 와인을 완성한 곳은 유럽의 독일이나 프랑스 사람들일 테지만, 와인이 제일 처음 빚어졌다고 하니 ‘그럼 거기 가서 포도농사를 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곳에서 외로울 텐데 ‘외로우면 와인을 마시고 자면 어떨까’ 라는 단순한 생각 같은 것도 있어요.”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비행기를 탔고 나에게 말을 거느라 눈이 시뻘게지도록 걷는 날들이 많았다. | ||
많은 날 동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 떠나고 걸었던 시간들. 그 끝에서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다녀라. 그래도 더 다녀라.”
이로써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는 큰 떠남을 시작할 것이다, 틀림없이. 물론 그 사이의 작은 떠남들도 있을 것이다. 이병률 작가와 독자들의 세 번째, 네 번째 연애는 계속될 것이고 작가가 걸었던 그 길을 독자들도 함께 걸을 것이다.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읽으며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혹은 그러할 것처럼. 책 속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위에서 문득,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처럼 그것을 이유로 훌쩍 떠나게 될 수도 있고 떠나지 않고도 목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떠났던 날들의 기록이, 이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테니까.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저 | 달
7년 만에 나온 『끌림』의 두 번째 이야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작가는 그동안 여전히 여러 번 짐을 쌌고, 여러 번 떠났으며, 어김없이 돌아왔다. 변하지 않은 건 ‘사람’. 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늘 ‘사람’ 속에 있었으며, ‘사람’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과 ‘사람’을 기다리는 쓸쓸하거나 저릿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이 결국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은 그래서 맞다. 작가의 이 여행노트는 오래전부터 계획된 대단하고 거창한 여행기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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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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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sunfance
2012.12.31
팡팡
2012.11.04
bonniegom
2012.10.09
아껴 읽고 싶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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