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막걸리 있어요?”
S가 다짜고짜 물었다. 어제 헤어졌다가 만난 사람처럼 S는 서슴없었다. 나를 형이라고 불러주는 지구에 남은 단 한 명의 80년대 여자. 먹다 남은 막걸리를 꺼내려는 사이, S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마치 가슴 깊이 가라앉은 한숨을 꺼내려는 듯이.
잠시 S는 말이 없었다. 의례적인 말 따위는 하지 않는 게 S였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11년 만에 만났지만, 내 기억 속의 S 그대로였다. 그런데 S의 볼이 약간 상기돼 있었다. 춥지 않은데, 떠는 것 같았다.
“어디 다녀온 거야?”
“그건 뭐 하러 알려고?”
역시 S 아니면 하지 못할 말이다.
“그 정도는 의례적으로 물어볼 수 있잖아.”
“의례?”하고는 S는 식당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날 쳐다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출판사…….”하고 중얼거렸다. “……여기 근처에 있거든. OO문학사.”
“아, 그래. 계약하러 간 거야?”
S는 고개를 저었다. S의 눈빛이 아련했다. 사막을 건너온 것 같은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S는 그동안 오로지 글만 썼다고 했다. 밤이 되면 시끄러운 클럽을 돌아다녔다. 기침이 날 만큼 가득 찬 담배연기,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음악 소리, 번쩍거리는 싸이키 조명 속에서 S는 글을 썼다. 무려 7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았다.
“그런 곳이 글이 더 잘 써져.”
난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울컥, 하고 감정이 올라왔다. 7년 동안 자기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얼마나 외롭게 자신과 싸웠을까.
그렇게 완성한 원고를 S는 출판사 몇 곳에 우편으로 보냈다. OO문학사도 그 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어느 한 곳 S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S는 등단을 한 작가였음에도, 출판사들은 S의 글에 무관심했다. S도 출판사에 연락하지 않았다. S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 S는 묵묵히 7년 동안 글을 썼다. 오지 않을 소식을 기다리며, 밤마다 시끄러운 클럽 구석에 앉아 담배를 빨아댔다. S는 그렇게 완성한 글들을 이따금 출판사들에 우편으로 보냈지만, 어제까지 어느 한 곳 답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 아침, S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은 건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그동안 쓴 글을 모두 들고 OO문학사를 찾았다. 전화 한 통 없이, 아침 9시에, 적진을 돌격하듯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원고를 내밀었다. 편집자들은 어쩔 줄 몰라 했고, 감당이 안 됐던 편집자들은 편집장실로 안내했다. 편집장도 놀라고 당황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원고를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편집장의 말은 의례적인 것이다. 거기서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S는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인 순진한 작가였다.
“언제쯤 책이 나올 수 있을까요?”
편집장은 또 한 번 의례적인 말을 했다.
“지금 밀려 있는 원고가 많아서요. 빨라야 2년입니다.”
S가 거기까지 말하고 막걸리를 들이켰다. S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S는 2년이란 말에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거리를 내다보는 S의 눈길이 멍했다. 그건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한 얼굴이다. 분하고, 슬프고, 억울한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다. 7년 동안 사랑을 했건만, 상대방은 단숨에 내쳐버렸다.
나는 안다. S는 믿으려들지 않겠지만, S의 투고는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걸. 상대방은 S가 자신을 사랑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걸.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그런 식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라졌다는 걸. S의 사랑은 포기할 수 없고, 잊을 수 없고, 사랑할수록 상처만 깊어지는 그런 사랑이라는 걸.
나는 아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건 다 80년대식 순정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대체 넌 뭘 사랑한 거야? 이 바보 녀석!’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슬픔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S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7년의 글 감옥에서 나온 S에게 세상이 변했다는 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하고 나는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편집자들을 떠올렸다. 보통 편집자가 아니라 친절한 편집자 말이다. 그들은 적어도 의례적인 말 같은 건 건네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전킱를 했고,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왔기에 그들은 무지개 비빔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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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부러 S가 들으라고 잔인한 질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판권을 열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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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내기 원하신다면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용기를 갖고 문을 두드리신다면, 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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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잖아요. 그런데 투고되는 원고가 많아요?”
편집자 둘은 서로 쳐다보고는 살짝 웃었다. 무슨 분위기인지 눈치 챘다는 의미였다.
“많아요. 생각보다 아주 많아요. 별의별 원고가 다 들어와요.”
“책으로 나오는 경우는요?”
“아시잖아요.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저는 8년을 넘게 편집자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투고된 원고가 책으로 나온 걸 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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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대답해준 그녀의 이름은 위혜정이다. 그녀는 대형 출판사에서 7년 동안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돌연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새롭게 창업한 ‘루크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상상의 집이란 브랜드로 책을 내고 있다.
“왜 투고된 원고는 책을 내지 못하는 거지요? 원고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그런가요?”
내가 묻자 S가 움찔, 한다. S가 듣기에는 냉정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혜정 옆에 나란히 앉은 고여주가 서슴없이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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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아요. 훌륭한 원고들이야 많지요. 하지만 훌륭하다고 모두 책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출판사가 만들려는 책과 무관한 원고는 책이 될 수 없어요.”
“출판사와 무관한 원고라니요?”
“출판사마다 나름대로 색깔이 있잖아요. 출판사마다 출간을 계획하고 세워놓은 방향이 있는데, 투고된 원고들은 그것과 맞지가 않아요. 만약 저희가 사회적 기업들의 나눔 정신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데, 생뚱맞게 해외여행을 알뜰하게 하는 법이 투고된다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출간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 원고는 제목만 보고 무시되는 거지요.”
고여주의 설명에 S의 고개가 슬그머니 떨어진다. S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이 오갈 것이다.
“이제 출판은 달라졌어요. 원고만 보고 책을 내는 시대는 지났어요. 기획자들은 어떤 책을 낼까 구상을 할 때부터 마케팅을 고려하거든요. 구체적인 1차 타깃과 2차 타깃을 잡고, 시장을 조사하고, 경쟁서를 분석해요. 납품이나 채택 도서가 될 수 있는지 가능성도 미리 알아보고요. 투고 원고는 이런 배경과 전략이 없이 그저 작가가 쓰고 싶은 것을 쓴 것이잖아요.”
고여주와 위혜정은 서로 충분히 공감하는 말인 듯 눈을 마주쳤다. S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작은 손으로 막걸리 잔을 만지작거렸다.
“투고를 하는 작가들이 꼭 알아둘 게 있어요. 투고된 원고들은 대부분 편집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 편집자들이 먼저 봐요. 그리고 그 가운데 괜찮은 걸 골라 팀장에게 올리지요. 막내 편집자들은 생뚱맞은 원고를 채택해서 책으로 낼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원고는 막내 편집자의 손에서 잘리게 되고 말지요. 그게 투고된 원고의 운명이에요.”
위혜정이 말했다. 고여주가 여기에 방점을 찍듯 또 한 번 냉정한 말을 덧붙였다.
“저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신의 글을 너무 사랑하는 작가들은 함께 일하기가 참 힘들어요. 자기 경험을 너무나 믿고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지 보편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작가 분들은 자기가 쓴 글을 조금도 고치려고 하지 않아요. 일일이 허락을 받으라고 하지요.”
“그러면 작가 지망생들이 책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원고 투고가 채택이 안 된다고 하면,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S가 질문을 했다. 참고 참았던 질문이었던 것 같았다.
“작가들도 항상 출판사를 찾지요? 편집자들도 항상 작가를 찾아요. 출판사는 좋은 작가를 만나는 게 엄청난 복이에요. 출판사가 찾는 작가는 멋진 글을 쓰는 대형 작가가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자신의 글을 너무 사랑하는 작가가 아니에요. 출판사가 찾는 작가는 ‘소통’할 수 있는 작가에요.”
“소통이라니요?”
“편집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가 말이에요. 이제는 소통을 해야 독자가 찾는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출판사는 독자와 소통하고, 작가는 출판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돼요.”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로군. 일방적인 원고 투고가 아니라.”
다 알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고여주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이건 제가 얼마 전에 만든 책이에요. 서 작가님과 함께요.”
“그랬지.”
“다섯 명의 작가가 서로 소통하면서 공저로 만들어냈어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작가들이 서로 다른 색깔로 글을 썼지만, 하나로 잘 어우러졌어요. 마치 비빔밥처럼요. 제가 만든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이 책이 너무 좋아요. 세상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다양하게 들어가 있으니까요. 여기, 무지개 창작 식당의 무지개 같아요. 무지개는 결국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어울려 사는 우리 세상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큰 양푼에 비빔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네 그릇의 밥과 네 그릇의 반찬과 네 그릇의 양념을 담아 열심히 비볐다.
“형, 맛있다. 이거 정말 형이 만든 거예요?”
S가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한 숟가락 뜨면서 말했다.
“소통의 맛이니까. 비빔밥처럼 자연스럽게 세상과 소통하는 맛이니까. S, 이제 클럽 같은 데 가서 글 쓰지 마. 클럽은 춤추는 곳이지 글 쓰는 곳이 아니잖아. 물 흐리는 거야. 출판사에 약속도 없이 원고 싸들고 찾아가지 말고.”
“앗, 작가셨어요?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막 말했네요.”
고여주와 위혜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제가 7년 동안 짝사랑에 미쳤나 봐요.”
S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면 혹시 저희 출판사에서 책 한 번 써보지 않으시겠어요? 저희가 이번에 환경 책을 준비하는데, 다양한 관점을 담으려고 하거든요. 환경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의 시각도 필요해요.”
“제가 쓸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소통을 할 용기만 낸다면!”
나는 S를 응원했다.
모두 가버린 후 혼자 한가하게 식탁을 닦았다. 라디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짝사랑이 싫다고 하지만 좋은 이유가 있어요. 구속받지 않아서 자유로워 좋고, 챙겨주지 않아도 되서 귀찮지 않아 좋고, 그 사람을 멀리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고, 헤어질 걱정이 없으니 기한이 없어 좋지요. 하지만 짝사랑을 너무 오래하면 등신인 거예요. 작작해야 합니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나오는 모임에 아무 일 없을 줄 알면서 멋진 속옷을 챙겨 입는 멍청한 짓을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별표 땡땡땡. 짝사랑은 진짜 사랑하지 말 것.”
80년대 사랑을 하는 여자, S. 한때 운동권 전사였던 S. 이제는 S가 투쟁보다는 소통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서지원
스토리텔링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하며, 재미없는 글을 쓰는 건 죄악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250여 종의 스토리텔링 책을 집필을 했으나, 재능이 있어서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고 익히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지원 작가의 특징은, 지식과 교양을 유쾌한 입담과 기발한 상상력, 엉뚱한 소재로 스토리텔링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바다 소년으로,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문학과 비평》에 소설로 등단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이상한 사람과 놀라운 사건을 취재했고, 출판사에서 요란한 어린이 책을 만들다가, 지금은 어린 시절 꿈인 작가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예스24와 네이버에 스토리텔링 방법론에 대해, 빅이슈에 인간의 행복과 삶의 양식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글을 연재한다.
스토리텔링으로 쓴 책은 수학, 과학, 철학, 인문, 역사, 환경, 예술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으며, 무려 300종에 가까운 책을 썼다. 중국, 대만 등 외국 여러 나라에 수십 종의 스토리텔링 책이 수출이 됐으며, 외국에서도 인기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쓴 책으로는 『어느 날 우리 반에 공룡이 전학왔다』, 『몹시도 수상쩍은 과학 교실』, 『국제무대에서 꿈을 펼치고 싶어요』, 『빨간 내복의 초능력자 1, 2』, 『훈민정음 구출 작전』, 『원더랜드 전쟁과 법의 심판』, 『세상 모든 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원리를 잡아라! 수학왕이 보인다』, 『다짐 대장』, 『토종 민물고기 이야기』, 『귀신들의 지리공부』, 『무대 위의 별 뮤지컬 배우』 『어린이를 위한 리더십』 등 많은 책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도서관협회가 뽑은 2012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는 등 스토리텔링으로 지식 탐구 능력과 창의적인 문제 해결능력을 담아주는 집필을 계속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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