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어디선가 약속도 하지 않은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하염없이, 막연하게, 언제 올지 모를 그대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개를 내밀고 저 멀리 걸어오는 사람이 혹시 그대가 아닐까 기대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얼어가는 손을 호호 분다. 십 분만, 오 분만…… 하는 시간들이 어느덧 한 시간, 두 시간이 된다. 주변에는 어둠이 켜켜이 쌓인다. 그러나 그대는 오지 않고, 낯선 사람들만 지나간다.
하지만 그대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장소에서,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약속을 하지 못했을까? 왜 기다린다고 말을 하지 못할까? 나 여기 있으니까 빨리 오라고 당당하게 말을 못할까?
그냥 뭐.
그렇다, 그냥 뭐. 겹겹이 쌓인 그 깊은 외로움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용기가 없다. 감정이 너무 응어리져 한 마디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냥 뭐.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글을 쓸 생각은 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언제 올지 모를 그대를 하염없이, 막연하게,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
무지개 창작 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은행나무들이 가로수로 서 있다. 오전 10시쯤 합정역에서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난밤에 겨울비가 내린 탓에 노란 은행잎들이 거리로 떨어져 수북하게 쌓였다. 은행잎들은 마치 따뜻한 손바닥처럼 보였다. 그리움에 지친 손바닥들이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은행잎을 만지면 그 따뜻한 그리움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지개 창작 식당에 도착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얼어가는 손을 호호 불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고, 미안했다.
한 사람은 식재료를 배달하는 재벌 청년이었고, 다른 사람은 편집자 L이었다. 재벌 청년은 파란 점퍼에 손을 넣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편집자 L은 계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여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마치 십 년 만에 우연히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기다린다고 하지 그랬어. 언제 온 거야?”
나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마치 서로 짠 것처럼.
“그냥 뭐.”
“그냥 뭐?”
그러자 두 사람은 동시에 또 서로 쳐다보고는 또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얼른 가게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내가 무지개 창작 식당의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동안 L은 가게를 둘러봤고, 재벌 청년은 흔들거리는 식탁을 살펴봤다.
“어때? 내가 차린 식당이.”
나는 L에게 물었다. L은 들고 온 무거운 가방을 옆에 놓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 네.”
그리고 L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L은 내가 차린 무지개 창작 식당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L은 언제나 솔직했으며, 나의 식당은 특별한 관심을 가질 만큼 특별하지 않았으니까.
L의 커다란 가방 사이로 하얀 종이묶음들이 보였다. 그건 아마 교정지일 것이다. 책을 내기 위해 편집자들은 지겨울 정도로 교정지를 들여다본다. 뭔가 틀린 게 없는지 혹시 놓치는 것은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또 찾는다. 광부들은 암석 사이에서 황금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지만, 편집자들은 원고의 문제점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켠다. 그래서 교정지에는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온갖 색깔로 글씨와 부호가 써져 있으며, 귀퉁이는 때가 묻고 구겨져 있다. 작가를 가장 떨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편집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내 원고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모기처럼 짜증나지만, 사실, 고마운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L은 나이가 마흔한 살이다. 그런데 삼 년 전부터 계속 서른아홉 살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직 생일이 안 지났다고 하기도 하고, 만으로 따져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가 학번이 빨라서 친구들은 모두 서른아홉 살이라 자기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했다. 난 내년부터 아예 L의 나이를 물어보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는 L에게 핑계를 댈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L은 국내에서 손을 꼽는 대형 출판사의 편집부장이다. 경력이 십오 년이 넘었으니 그녀의 손을 통해 세상에 나온 책은 수백 권은 될 것이다. 내가 L을 알게 된 것도 어느덧 사 년이 넘었다. 원고 때문이 아니라도 우리는 가끔 만났고, 출판계 돌아가는 얘기나 세상이 돌아가는 얘기를, 결론이 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탁구를 치듯 주고받았다. 그런 이유로 L이 한때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작가의 꿈을 접어버렸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작가가 되라는 말과 시집 언제 가냐는 말이라는 것 등을 알게 됐다.
“커피 줄까?”
나는 새로 산 검은 커피메이커에 물을 부으면서 물었다.
“맥주는 없어요?”
L이 말했다.
“술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 지금은 아침 열 시라니깐.”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줬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벌 청년이 다가와 다른 것을 요구했다.
“망치 없어요?”
“맥주에 망치라……. 오늘은 아침부터 주문 사항이 참 별나네.”
나는 카운터 밑 서랍에서 망치를 꺼내 재벌 청년에게 건네줬다. 무엇에 쓰려는 건지 물어보지 않은 것은, 재벌 청년과 내가 어느새 이해심 같은 것이 쌓였기 때문이다.
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L이 맥주 캔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나는 L의 얼굴이 마른 식빵처럼 푸석푸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 햇살에 L의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보였다. 낡은 빗자루처럼 갈라지고 상해있었다. 외국 영화를 보면 뉴욕의 편집자들은 멋지고 감각적이던데, 왜 우리나라 편집자들은 하나같이 방금 탄광에서 나온 광부처럼 지친 얼굴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디자인 사무실 갔는데 문이 잠겼더라고요. 디자이너가 밤샘 작업했다고 아직 출근을 못했대요. 오늘 화면 교정보고 필름 출력 걸어야 하는데……. 밤샘 작업은 자기만 했나? 나도 어제 한잠 못 자고 나왔는데……. 디자인 사무실이 이 근처라서 여기에 잠시 들려봤어요.”
L은 맥주 캔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말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맥주 캔에게 하는 말 같았다.
탕탕탕.
재벌 청년이 망치를 두드렸다. 흔들리는 식탁의 다리를 손보는 모양이었다.
“종업원이에요?”
L이 물었다.
“아니야. 식재료를 배달하는 청년이야.”
“그런데 왜 식재료 배달은 안 하고, 여기서 식탁을 고쳐요?”
“나도 몰라. 어느 날은 간판을 고쳐주고 가고, 어느 날은 막힌 하수구를 뚫어주고 가고, 어느 날은 쓰레기를 버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고 가네. 아마 고객 관리가 아닐까? 나도 저 청년의 고객이니까.”
“으흠.”
L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재벌 청년을 유심히 바라봤다. 아침 햇살이 L의 눈빛에서 반짝였다.
“혹시 작가 없어요?”
L이 물었다.
“무슨 작가?”
“원고 잘 쓰는 작가요. 작가들이 다 멸종을 했나? 원고를 맡기려고 해도 작가가 없어요.”
L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미안했고, 찔렸다. 나는 L의 출판사에 원고를 써주겠다고 계약한 지 벌써 일 년이 지나버렸다.
“작가들 많잖아.”
나는 미안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버무렸다.
“없다니까요. 원고가 있어야 책을 만들지요. 번역서만 할 수도 없고, 아후, 정말! 작가들이 이제 멸종 위기에 몰린 천연기념물인가 봐요. 다 어디로 간 거예요?”
“어디로 간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난 내가 순식간에 멸종 위기의 천연기념물이 되어 밀렵꾼들에게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다행히도 L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나왔어요? 알았어요. 5분 안에 도착할 게요.”
L은 남은 맥주 캔을 남김없이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볼게요. 담에 또 올게요.”
“그래. 너무 힘들 게 일하지 마. 오늘 못하면 내일 또 하면 되지 뭐.”
나는 L을 위로했다. 무사히 지나가나 싶었는데, L은 잊어버리지 않고 말했다.
“제게 줄 거 있는 거 아시죠?”
“아, 알지. 그럼. 열심히 하고 있어.”
그렇다, 사실 나는 위로를 할 사람이 아니라,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저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 그래. 알지.”
문을 나서며 L은 재벌 청년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럼, 수고하시고요.”
평소 L답지 않게 가볍고 밝은 목소리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재벌 청년은 벌떡 일어나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마치 성인클럽의 웨이터 같았다.
나는 신호등 앞에 선 L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교정지가 든 가방으로 한쪽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그 가방은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큰 것 같았다.
“확실하지요? 이 정도는 돼야 손님들이 불편해 하지 않는다고요.”
재벌 청년이 식탁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재벌 청년의 말대로 식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단해.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칭찬을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재벌 청년은 대답 대신 무지개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침부터 아기 엄마가 왜 온 거예요?”
재벌 청년이 물었다.
“아기 엄마? 누구?”
나는 나도 모르게 재벌 청년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재벌 청년은 이상하게 그래도 될 만큼 편안하고 친근하게 굴었다.
“아까 그 아줌마, 아기 엄마 아니에요?”
“하하하, 왜 그렇게 생각했어? L이 들었으면 가만 안 있었을 거야. 성격이 대단하거든.”
“성격은 좀 있어 보이더라고요. 나도 사람 볼 줄 알 거든요.”
“사람 볼 줄 안다면서 처녀를 아줌마로, 그것도 아기 엄마로 봤어?”
“그 가방, 그거 기저귀 가방 아니에요? 그렇게 크고 무거운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아기 엄마들밖에 없어요.”
아,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정지 가방을 기저귀 가방으로 보다니! 난 잠시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재벌 청년, 사람 정말 잘 보네. 그 가방, 기저귀 가방이랑 비슷한 거야.”
주방에 걸린 옷을 갈아입으며 내가 말했다.
“아기 엄마 맞아요?”
“아니야. 하지만 아기를 낳기는 낳지. 아마 수백 명도 더 낳았을 걸.”
재벌 청년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편집자야. 책을 만드는 사람. 때로는 모기처럼 짜증나는 사람이지만, 작가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지. 편집자는 아기를 낳는 기분으로 책을 만든다더라고. 그래서 자기가 만든 책을 ‘내 새끼’라고 불러.”
“책을 새끼라고 부른다고요? 그러면 그 가방은 뭐에요?”
“기저귀 가방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데 필요한 가방이야. 교정지 가방. 편집자들은 다들 저런 가방을 들고 다니지.”
재벌 청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L이 사라진 거리 쪽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편집자라는 분, 몇 살이에요?”
“아, 그게…….”
난 서른아홉이라고 할까, 마흔하나라고 할까, 잠시 망설였다.
“서른아홉!”
그녀는 서른아홉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나도 서른아홉으로 믿기로 했다. 내게는 영원히 서른아홉으로 남기로 했다.
“생각보다는 나이가 많네요. 난 서른다섯쯤 됐을 거 같았는데…….”
재벌 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재벌 청년이 갑자기 나이를 물어본 걸까?
“그런데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뭔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왜 날마다 찾아오는 거야? 왜 날마다 찾아와서 가게를 수리해주는 거야? 원래 고객을 그렇게 관리하나? 그렇지만 난 그다지 좋은 고객이 아니야. 손님이 없어서 지난주에 받은 식재료가 냉장고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알아요. 아까 냉장고를 다 열어보고 재고 파악을 해뒀어요.”
“벌써?”
난 재벌 청년이 괜히 돈을 잘 버는 게 아니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가게 오픈한 지 벌써 한 달쯤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손님이 한 명도 없었지요? 이러다가 망하겠어요.”
난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마. 난 돈을 벌려고 식당을 차린 게 아니니까. 아직 내가 한 질문에 대답 안 했어. 왜 자꾸 찾아와서 가게 일을 도와주는 거야? 설마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음…….”하고 재벌 청년은 턱에 돋은 까칠한 수염을 매만졌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요, 아저씨는 아니 사장님은 아니 작가 사장님은…….”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작가 형님은요, 하나도 불쌍해 보이지 않아요. 참 이상하지만, 가게에 손님이 한 명 없지만, 오늘 당장 망할 것처럼 썰렁한 가게지만, 이상하게도, 불쌍해 보이지도 않고, 걱정도 안 돼요. 작가 사장님 아니 작가 형님은 다른 가게 사장님과는 뭔가 달라요. 액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죽을 위기를 계속 겪지만, 절대 죽지 않잖아요.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거잖아요. 작가 형님은 그런 주인공 같아요. 망할 것 같지만,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 같다고요.”
허, 하고 나는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그러면 왜 찾아와서 일을 해주는 건데? 설마 액션 영화 주인공 보려고 오는 건 아닐 테고.”
“작가가 되려고요. 글쓰기를 배워서 작가가 되려고요.”
“어?”하고 난 어리벙벙해졌다. 그리고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참, 그랬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난 무지개 창작 식당을 차렸을 때 재벌 청년이 처음 찾아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재벌 청년은 작가가 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물었고, 작가가 되는 법을 공짜로 가르쳐 달라고 말했었다. 왜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재벌 청년은 날마다 가게로 찾아와 간판을 고치고, 하수구를 뚫고, 떨어진 안내문을 다시 붙이면서 작가가 되는 법을 언제 가르쳐줄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은 잊은 채 ‘저 친구 참 할 일도 없군. 고객 관리 하나는 잘하지만 말이야.’하면서 본 듯 만 듯 무시했던 것이다. 난 정말 썩은 선생이로구나, 하는 반성이 저절로 들었다. 작가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식당을 차렸건만, 날마다 찾아오는 작가 지망생을 못 알아봤던 것이다.
덜컹덜컹 냄비가 끓어 넘쳤다. 나는 얼른 일어나 냄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등을 돌린 채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말이지. 내가 혹시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미리 말하는데……. 작가가 되면 돈을 벌 수 있냐고 나한테 물었잖아.”
“네.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돈을 벌 수는 있는데 그게…….”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중을 위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돼서 책을 낸다고 해서 돈을 벌 수는 있지만, 큰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야.”
“아주 큰돈은 바라지 않아요.”
등 뒤에서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큰돈을 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물론 우리나라에 큰돈을 버는 작가가 있긴 하지만, 오십 명 아니 서른 명도 안 될 거야. 분명한 사실은, 그 작가들조차 처음부터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작가를 시작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큰돈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작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되는데요? 연봉으로 따지면요.”
난 답답했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복잡한 작가의 수익에 대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삼 년 동안 고생해서 책을 한 권 쓴 친구가 있어.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책을 냈는데 200만 원을 받았지. 연봉으로 따지면 65만 원쯤 되겠네. 물론 많이 팔리면 더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판매 상황으로 봐서는 힘들 것 같아.”
나는 재벌 청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염려됐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문득 작가의 세계가 재벌 청년에게 너무나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재벌 청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국자를 들고 여전히 끓고 있는 냄비에서 거품을 걷어냈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냄비 속의 육수는 계속 거품을 쏟아냈다. 그리고 가게에서는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혹시 청년이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살짝 돌려봤다. 그런데…….
“작가할래요!”
재벌 청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뭐?”
“작가할 거예요.”
“왜? 일 년에 65만 원밖에 못 벌어도?”
“괜찮아요. 투잡으로 할 거니까.”
“굉장히 고생스러울 수 있어.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고. 아까 그 편집자 있지? 살벌하잖아. 지나가면 냉기가 휙휙 돌아. 그런 편집자들이 손톱을 갈고 덤벼들어. 남김없이 물어뜯을 거야.”
“제가 보기에는 이래도 맷집이 좋거든요. 그리고 자존심 따위는 이미 버린 지 오래됐어요. 장사하는데 걸림돌이 되거든요.”
재벌 청년은 팔짱을 낀 채 턱에 힘을 주고 꼼짝하지 않았다. 마치 대단한 결심을 하고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오늘부터 시작할까요?”
청년은 주머니에서 준비하고 있던 작은 수첩을 꺼냈다. 딱, 소리를 내며 볼펜을 눌렀다.
“그래, 그래, 뭐 그렇다면야…….”하고 나는 말했지만, 기운이 나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돈 얘기는 하지 마.”
“돈 얘기예요. 저는 돈이 중요해요.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게 제 인생철학이에요. 작가는 투자하는 게 없잖아요. 권리금을 줄 필요도 없고, 집기를 살 필요도 없고, 물건을 들여놓을 필요도 없잖아요. 오로지 이거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재벌 청년은 볼펜을 흔들어 보였다. 작가를 볼펜 한 자루로 창업할 수 있는 사업으로 보는 것 같아 나는 약간 속이 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청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작가 지망생들이 그렇게 많은 걸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작가는 거의 돈을 못 버는데,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것보다 못 버는데, 왜 사람들은 작가를 하려고 해요?”
“그건 말이지…….”하고 나는 입을 연 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청년의 질문은 정말 중요했다. 돈이란 건 어떻게 보면 가장 필요하고, 가장 솔직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 돈을 무시하고 일을 한다는 건 지금 이 시대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인 것이다.
“작가를 왜 하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보다 글을 왜 쓰려고 하는가 하는 질문이 더 정확한 것 같아. 왜냐하면 글을 쓴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 또 작가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글을 쓰는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글을 쓰는 일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러면 사람들은 글을 왜 쓰려고 하는가? 글을 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거야.”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청년은 내 얘기를 받아 적으려고 긴장한 얼굴로 수첩을 펼치고 볼펜에 힘을 줬다.
“글을 쓰면 치유를 할 수 있어.”
“뭐라고요?”
“치유를 할 수 있지. 병을 치료해서 낫게 할 수 있다고.”
“뭐요? 누가? 글 쓰면 의사돼요?”
청년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자세히 얘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말할게. 앞으로 말할 기회가 많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갖고 살아가지. 상처 없는 영혼은 없어. 상처가 없다고 해도 슬픔은 있지. 우울함, 괴로움, 분노, 답답함 등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 더 심해지면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으로 변하지. 그런데 글쓰기를 하면 그런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이 생겨.”
청년은 수첩에 ‘글쓰기는 치유해준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을’이라고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었다. 그러다가 따라 적기를 포기했는지 동그라미를 계속 그렸다. 나는 조금 더 쉽게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봐. 저게 뭐지?”
“거울요?”
“그렇지. 거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거울을 보지. 거울은 우리 얼굴의 상태를 알려주지. 글쓰기도 거울 같아. 글쓰기는 우리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보게 해주지. 글쓰기는 논리적인 생각을 요구해. 그래서 글쓰기를 하면 내 마음의 상태를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줘. 글쓰기가 잘 안 된다는 건 마음의 상태를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거야. 글쓰기는 우리 내면의 문제, 마음의 문제를 밖으로 꺼내볼 수 있게 해줘. 스스로 문제점을 알게 해주고,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도와주지.”
“아!”
재벌 청년은 머리를 긁었다. 금방 머리가 부스스해졌다.
“조금 알 것 같은데, 어렵긴 어렵네요. 그래도 몇 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식재료 배달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래, 작가가 되는 법이 식재료 배달하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훨씬 쉬울지도 모르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청년은 수첩에 뭔가를 계속 적었다.
“그런데 아까 그 편집자 분 있잖아요. L이란 분.”
“응, 왜?”
내가 국물을 떠서 맛을 볼 때 재벌 청년이 물었다.
“무지개 창작 식당이 문을 안 열었을 때 제가 그 분을 계속 봤거든요. 그 분은 나보다 훨씬 일찍 오셨나 보더라고요. 내가 아홉 시쯤 왔으니까 일곱 시나 여덟 시쯤? 담배꽁초가 수북했으니까요.”
“두 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L이 혼자?”
내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데 L씨가 왜 그렇게 작가 형님을 기다린 거예요? 아까 잠깐 들으니까 특별히 하는 얘기도 없던데……. 무슨 멸종 위기에 몰린 천연기념물을 찾는다는 둥 이상한 얘기나 하고…….”
“사실은 내가 일 년 전에 줘야 할 원고를 아직 못 주고 있어.”
나는 미안한 마음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 년이나요? 왜요? 아직도 못 썼어요?”
“아니. 사실은 다 썼어.”
“다 썼는데 왜 안 줬어요?”
“그냥 뭐.”
그렇다, 그냥 뭐. 겹겹이 쌓인 그 깊은 속마음을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냥 뭐요? 작가 형님, 정말 이상하시네. 왜 그랬어요? 그거 정말 상도에 어긋납니다. 고객 다 떨어져요.”
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나는 왜 못주고 있는 걸까? 그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꼬박 하얗게 지새웠는데, 나는 왜 기다리는 그녀에게 주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 걸까? 난 정말 썩은 작가인가 보다.
나는 양파를 깠다. 하얀 양파들은 온통 껍질뿐이다. 양파들은 껍질을 벗으면서 울었다. 자신이 울 수 없으니 나더러 대신 울어달라고 했다. 나는 마음 놓고 울었다. 어차피 양파 대신 우는 것이니까 들켜도 상관이 없었다.
“많이 매우세요? 양파를 깔 때에는 이렇게 양파 한쪽을 씹으면서 까면 덜 매워요.”
재벌 청년이 또 하나의 생활 지식을 전수했다. 진짜 배워야 할 사람은 청년이 아니라 나인 모양이다.
“누굴 기다려본 적이 있어? 약속도 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막연하게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어?”
내가 물었다.
“그런 거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상대방은 알지 못하더라고요. 내가 자기를 그렇게 기다렸는지. 그래서 다시는 그런 식으로 안 기다리기로 했어요.”
“편집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리지. 언제나, 하염없이, 약속도 하지 않은 채, 막연하게.”
“누구를요?”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작가를. 편집자들은 자신의 꿈을 작가가 완성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그래서 날마다 작가를 기다리지만, 작가는 나타나지 않지. 그래서 작가는 멸종 위기에 몰린 천연기념물처럼 거의 사라졌다고 푸념하는 거야.”
“하지만 L씨에게 걱정 말라고 하세요.”
“왜?”
“제가 작가가 되어 찾아갈 거니까?. 제가 L씨의 꿈을 완성시켜줄 거예요. 그럼 돈도 당연히 벌겠지요?”
재벌 청년은 다마스를 타고 식재료 배달을 하러 떠났다. 나는 문 앞으로 나가 그의 등을 바라보고, 다시 거리의 은행잎을 바라봤다. 어느새 은행잎들을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리움에 지쳐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은행잎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때로는 치울 필요가 없는 것들을 치우고는 한다. 그것이 평소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몇 닢 남아있는 은행잎을 주우며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글을 쓸 생각은 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가 원고를 들고 찾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편집자들은 언제 올지 모를 그대를 하염없이, 막연하게,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냥 뭐. 은행잎이네.”
그렇다, 그냥 뭐. 아무래도 용기를 내야겠다. 그냥 뭐, 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감정이 너무 응어리져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서 L에게 원고를 보내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그냥 뭐. 원고야.”
서지원
스토리텔링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하며, 재미없는 글을 쓰는 건 죄악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250여 종의 스토리텔링 책을 집필을 했으나, 재능이 있어서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고 익히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지원 작가의 특징은, 지식과 교양을 유쾌한 입담과 기발한 상상력, 엉뚱한 소재로 스토리텔링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바다 소년으로,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문학과 비평》에 소설로 등단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이상한 사람과 놀라운 사건을 취재했고, 출판사에서 요란한 어린이 책을 만들다가, 지금은 어린 시절 꿈인 작가가 되어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예스24와 네이버에 스토리텔링 방법론에 대해, 빅이슈에 인간의 행복과 삶의 양식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글을 연재한다.
스토리텔링으로 쓴 책은 수학, 과학, 철학, 인문, 역사, 환경, 예술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으며, 무려 300종에 가까운 책을 썼다. 중국, 대만 등 외국 여러 나라에 수십 종의 스토리텔링 책이 수출이 됐으며, 외국에서도 인기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쓴 책으로는 『어느 날 우리 반에 공룡이 전학왔다』, 『몹시도 수상쩍은 과학 교실』, 『국제무대에서 꿈을 펼치고 싶어요』, 『빨간 내복의 초능력자 1, 2』, 『훈민정음 구출 작전』, 『원더랜드 전쟁과 법의 심판』, 『세상 모든 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원리를 잡아라! 수학왕이 보인다』, 『다짐 대장』, 『토종 민물고기 이야기』, 『귀신들의 지리공부』, 『무대 위의 별 뮤지컬 배우』 『어린이를 위한 리더십』 등 많은 책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도서관협회가 뽑은 2012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는 등 스토리텔링으로 지식 탐구 능력과 창의적인 문제 해결능력을 담아주는 집필을 계속 하고 있다.
pota2to
2013.01.04
평범한 사람
2012.01.26
prognose
20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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