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루브르에 다시 왔다!
들어가자마자 「승리의 여신」 조각상 앞에 섰다. 아빠가 별 말도 안 하면서 그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다짜고짜 계단 위에 서라고 했다.
20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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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증거가 남아 있다. 내 귀여웠던 어린 시절의 사진으로 말이다. 아빠가 내미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웃겼다. 내가 언제 여기서 폼을 잡았지?
어린 나를 어떻게 데리고 다녔는지 물어보니까 그때가 훨씬 더 편했다고 한다. 아이스크림만 사준다고 하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힘든 척도 하지 않았고 아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이 만병통치약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면 말을 약간 잘 듣긴 하지만 말이다. 아빠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면서 웃는다.
숙소에서 나가는 길에 아빠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다. 어제도 약간 힘이 없어 보였는데 오늘은 정말로 안 좋은 모양이다. 여행 중에 오늘처럼 힘없는 모습은 처음 본다. 완전 강철 체력인 줄 알았는데…. 아빠도 사람이긴 사람인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넌 아프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루브르 박물관에 어렵게 도착했다. 지하철 파업 때문에 두 정류장을 걸어서 갔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이 난다면 이게 무슨 일이냐며 뉴스에서 떠들썩하고 역에서도 난리가 났을 텐데 파리 시내는 그런 게 별로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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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자마자 「승리의 여신」 조각상 앞에 섰다. 아빠가 별 말도 안 하면서 그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다짜고짜 계단 위에 서라고 했다. “어릴 때 네가 이 자리에서 뭐라고 했는지 아니?”라고 물어보시곤 “네가 「승리의 여신」을 보면서 큰 소리를 질렀어.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와! 팅커 벨이다!’ 하고. 그때 네가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이 피터 팬이었으니까”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얘기까지 들었는데도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팅커 벨이다!’라고 외쳤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저 큰 니케를 보고 팅커 벨이라고 하다니 꼴에 귀엽다.
「승리의 여신」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나리자」가 있었다. 모나리자의 크기는 예상 외로 작아서 진짜 저게 「모나리자」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빠가 다빈치의 그림은 루브르에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며 들어온 김에 실컷 보라고 했다. 그래서 「암굴의 성모」랑 「성 모자와 성 안나」까지 다 보았다.
루브르 박물관이 전 세계에서 미술 작품이 가장 많다고는 했지만 다빈치의 작품까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그런데 다빈치뿐 아니라 라파엘로나 티치아노의 그림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뜨거운 스페인에서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본 벨라스케스도 있었고, 로마에서 길을 물어가면서 찾아본 카라바조의 그림까지 있었다.
아빠가 “저건 알겠지?”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데를 보니까 엘 그레코의 그림도 있었다. “엘 그레코네?” 하니까 같은 화가 그림을 계속 보여준 보람이 있군, 하신다. 여행을 오기 전에는 엘 그레코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아빠는 유럽에 여행 와서 명화들을 많이 보는 것은 생활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고 하신다.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봐두면 내가 살아가면서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을 거라면서.
내 평생(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는 않지만) 반나절 동안 이렇게 많은 그림을 본 것은 처음이다. 프라도나 소피아, 우피치 미술관에도 그림이 많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비하면 도토리 키 재기였다. 왜 사람들이 루브르, 루브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났다. 나는 배만 고프면 힘이 쏙 빠진다. 아빠는 숙소에 가서 사장님이 도시락으로 싸준 샌드위치를 먹자고 했다. 아빠는 숙소로 가는 버스에서 내내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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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아빠는 “어이, 아들, 오늘 따뜻한 국수 안 끓여 먹을래? 네가 한번 끓여봐라.” 하고는 힘없이 침대에 기댔다. 국물을 잘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한 국수를 끓였다. 신 김치가 있으면 좋으련만….
아빠는 후루룩 먹더니 누워 있을 테니까 두 시간만 있다가 깨워줘 하고는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몸살이 난 모양이다. 사장님한테 얘기해서 몸살 약을 받아다가 아빠한테 드렸다. 물 좀 갖다달라고 해서 약을 먹으시더니 곧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오늘은 루브르 간 것 빼고 딴 건 아무것도 못했지만 일찍 들어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 뒤에 혹시나 해서 깨워봤지만 잠꼬대처럼 여행 중인데 아무 데도 못 가서 미안, 하고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아빠는 엄청나게 아프면서도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서울이라면 약국에 가서 약을 좀 사올 텐데….
막상 아빠가 아프니까 아무것도 할 게 없다. 하루 종일 책도 읽고 게임도 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아빠가 아픈 바람에 완전 한가한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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