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의 욕망을 숨길 수 없었던 <컬투쇼> PD - 『카시오페아 공주』 이재익
‘안드로메다’에서 왔다는 사람들. 궁금했다. 어떤 곳일까. 그곳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구와 안드로메다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
201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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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에서 왔다는 사람들. 궁금했다. 어떤 곳일까. 그곳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구와 안드로메다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 그곳에 가면, 누군가는 ‘너 지구에서 왔니?’라는 말을 듣게 될까. 사실 이곳에서도, 나는 아주 가끔 안드로메다에서 왔냐는 의혹(?)을 받는다. 혹시 내 고향은 안드로메다, 아닐까. 안드로메다, 넌 어떤 곳이냐.
약간의 궁금증, 풀렸다. 『카시오페아 공주』(이재익 지음|황소북스 펴냄) 덕이다. 외계에서 온, 카시오페아 별자리를 찾아 파동을 보내면, 그곳에서 같은 파동을 보낸다는 「카시오페아 공주」.
그 외계에서 온 공주도 웃고 넘어갈, 감동 받을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단다. 그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 중 ‘님 짱 드셈’ 하는 <두시탈출 컬투쇼>(이하 <컬투쇼>). <컬투쇼>의 파동은 카시오페아 별자리까지 미치나보다. 이 프로그램 연출을 맡고 있는 이재익 PD가 카시오페아 공주의 이야기까지 쓴 것을 보면.
아니, 라디오 PD가 소설까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재익은 이미 기성 작가다. 카투사로 복무하던 1997년 월간 문학사상 소설부문으로 등단했고, 이듬해 첫 소설 『질주질주질주』를 내놓고 문학사상사 장편소설상을 받았다. 이 소설은 영화 <질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 장편소설 『200X 살인사건』 『노란 잠수함』 『미스터 문라이트』 등을 썼다. 『카시오페아 공주』는 다섯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이번 책에는 「카시오페아 공주」를 비롯해 5편이 수록돼 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열정을 간직한 그를, 라디오PD와 작가 사이를 오가며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는 그를, 지난 6일 <컬투쇼>가 막 끝난 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한때 작품성과 문체의 벽에 갇혀 괴로워했으나 이제는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기의 재미를 따르기로 했다. 안에서 넘쳐나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더 자주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50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길 바란다니. 이재익, 그 이름, 기억할 만하지 않은가. 언젠가, 이야기의 재미가 풀풀 풍기는 <속세탈출 이재익쇼>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고.
작가로서 두 번째 시작이라는 『카시오페아 공주』. 아마도 책에 나온 이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서른여섯.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니겠지?”(p.113) 아무렴. 늦은 나이, 아니다. 내가 아는, 마흔 무렵은 그렇다. 인생을 재부팅하기에 아주 이르지는 않지만, 완전히 늦지도 않은 나이. 티.오.피까지는 어렵지만, ‘그냥’ 아저씨는 될 수 있는 무렵.
두 번째 시작, 『카시오페아 공주』
다섯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소회부터 듣고 싶다.
“이번 책은 일단, 두 번째 시작이다. 앞으로 자주 많이 낼 생각이다.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엄격한 예술성이나 문장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한다. 엄격하지 않아서 재밌는 얘기를 자주 써서 독자들과 만나고 싶다. 그런 시작이 되는 책이 이번 책이다.
나는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을 했다. 그래서인지, 문학과 문체에 대한, 순수예술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앞선 『질주질주질주』나 『노란 잠수함』 등은 옷이 내게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흉내를 냈다. 이 책으로 부담감을 많이 털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재밌는 얘기를 쓰고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임을 시인하고 파악했다. 순수문학이나 예술적인 지향에 대한 부담을 털어내고 즐겁게 썼다.”
표제작이 「카시오페아 공주」인데, 택한 이유가 있나.
“제목이 제일 그럴듯해서.(웃음) 분량도 제일 길고, 가장 최근에 쓴 것이 「카시오페아 공주」였다. 「레몬」은 쓴 지 12년이 넘었다. 그런 작품을 표제작 하기엔 찔리잖나. 스스로도 생각하기에도 (「카시오페아 공주」가) 가장 무게감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마다 시오리 마쓰모토의 그림을 내걸었다. 모티브인가? 아니면 시오리 마쓰모토의 그림을 좋아해서?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웃음) 원고를 넘기고 출판사와 표지 시안을 얘기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 있으면서 인터넷을 뒤지며 적당한 일러스트를 찾았다. 찾다보니 집에 들어가는 걸 포기했는데, 아마 새벽 3시였지. ‘리틀 가든(little garden)’이라고 「섬집 아기」의 표지로 있는 그림을 봤다. 인상 깊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다. 그래서 (시오리 마쓰모토의 다른 그림을) 찾아봤다. 정말 잘 어울린다 싶어서 출판사에 얘기해서 써보자고 했다. 다행히 시오리상이 흔쾌히 허락해줬다.”
구원과 용서, 나의 영원한 테마
「카시오페아 공주」의 희준, 「섬집 아기」의 현호, 「레몬」의 나, 「좋은 사람」의 현주, 「중독자의 키스」의 수아 등 이재익을 조금씩 반영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가장 가까이 혹은 깊이 투영한 인물이 있다면.
“음, 사실 희준의 모습이 묻어있을 수 있겠다. 「카시오페아 공주」에 아버지와 이모의 얘기는 집안 얘기를 그대로 쓴 거다. 아버지는 실제로도 약국을 하시고 비슷한 성격이시다. 이모도 (소설속의) 같은 일을 당하셨다. 나도 이모와 이모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눈빛을 통해 사람 마음이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모가 이 책을 보시고 희망을 갖게 되셨으면 한다. 또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사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웃기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각자 어두운 부분도 있을 테고. 주인공들이 다들 내 모습을 조금씩 담고 있긴 하다.”
이모를 보면서 좌절을 이겨내는 도 다른 방식을 배웠다. 슬픔이란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는 것도 알았아.(p.32)
소설들을 관통하는 정서 중의 하나가 ‘슬픔’이 아닐까 싶다.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들(희준, 현호, 현주), 이별(「카시오페아 공주」,「레몬」,「중독자의 키스」) 등인데, 그런 한편으로 빛이 스며든다. 만남을 기대하고 분노를 삭이고 희망을 여미는 그런 것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테마가 구원, 용서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것은 아니고.(웃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받아들여 주는 것이 용서이고 구해준다는 것이 구원인데, 그런 마음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구원과 용서로 가기 위해선 깊은 골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앞부분에는 슬픔, 아픔 등이 있는 사건을 배치했다. 그렇게 그것을 극복하면 좋잖나. 기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다.”
「레몬」의 주인공은 외국계은행을 가기 싫다며 포기할 것 같았지만, 결국 회사에 들어가고 재밌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렇다고 레코드가게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되레 긍정적으로 자신을 마주대하는 느낌이랄까. 인생은 레몬 같다는 말, 이재익에겐 어떤 것인가.
“아주 오래전, 비디오방에서 본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원 나잇 스탠드>에 나온 대사다. 중요한 대사도 아니고 조크 같은 거였다. 거기서 착안했는데, 이 책에선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썼다. 인생은 새콤한 것이야, 이런 게 아니고. 레몬 대신 오렌지가 될 수도 있겠지. 인생에서 크고 무게감 있는 의미를 찾는 게 부질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레몬」은 이십 대 초중반에 쓴 소설이다.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입장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도 전업 작가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등단 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속물근성이나 두려움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기도 싫더라. 지금 대기업 월급쟁이로 살고 있지만, 주인공의 태도나 선택의 방향이 비슷했다. 많이 투영했다. 내 과거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나는 광고회사를 1년 다녔는데, 그냥 그만뒀다. 글 쓰고 영화 일을 하고 싶어서. 절대로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려고도 했다. 자영업을 하려고, 샌드위치 가게를 알아보고 다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그 시절과 맞닿아 있는 소설이라 애정이 많다.(웃음)”
이건 우스운 얘긴데, 난 레코드 가게를 하고 싶었어. 가기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쓰는 거야.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가게 문을 닫고 훌쩍 여행도 떠나고. 되게 진부하지? 그런데…(p.183)
「좋은 사람」에서 결말 부분의 전개는 다소 느닷없다는 느낌도 준다. 원래 장편을 줄여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다시 장편으로 내놓을 계획이 있나.
“날카로운 독자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원래 처음 썼을 때 3인칭이 아니었냐고. 정말 예리하다.(웃음) 뒷부분에 사건이 복잡하다. 슬러시 무비에 가깝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앞에서 풀어줘야 할 부분 많은데, 1인칭 시점 이다보니 그리 못한 게 있다.
음, 아마 재탕하면 욕먹을 것 같다.(웃음) 사실 소설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만질 자신도 없다. 일단 토픽 자체가 끔찍한 얘기잖나. 물론 현실에서도 비슷한 강도로 강력사건이 발생하지만, 글로 쓰다 보니 힘든 부분이 있다.”
「카시오페아 공주」의 돼지국밥이나 롯데 자이언츠는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디테일은 어떻게 잡은 건가.
“부산에서 한 달 넘게 살았던 적이 있다. 물론 취재 때문에 갔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문에 출장 가서 해운대에서 한 달 정도 묵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취재를 빌미로 돌아다니면서 많이 봤다. 돼지국밥도 많이 먹고.(웃음)
롯데 자이언츠는, 야구에 관심 있는 건 아닌데, <거인의 꿈>이라는 롯데 자이언츠 2군 선수를 다룬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 상동구장에 취재를 갔었다. 그때 그 경험 때문에 그런 디테일이 나온 것 같다.”
지엽적인 건데, 「레몬」의 아나운서 윤미는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비문을 쓴다. 윤미의 부족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었나.
“아나운서가 그런 문장을 쓰게 한 것은, 어긋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나쁘게 그리기 위한 건 아니고. 요즘은 보통 사람들도 그게 비문이라는 것을 많이 알 텐데, ‘좋은 하루 되라’는 말에서 어긋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찍어냈나. 「레몬」이 문학사상의 문예지에 실렸었는데, 당시 평을 써 주신 김윤식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지적은 안 나왔는데…(웃음)”
공간이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많은 부분이 강남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니면 익숙해서?
“어릴 때부터 많이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서울의 다른 곳은 많이 가 보질 않았다. 잘 모른다. 목동도 회사에 입사하면서 처음 왔다. 내가 아는 동네, 쓰기 편한 동네를 쓰다 보니 그랬다. 내 한계이기도 하다. 다양한 공간에서 살았으면 정서들이 다채로울 텐데, 공간에 대한 정서에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최근 복수가 영화계에선 한 화두이기도 한데, 「카시오페아 공주」는 복수보다 용서를 택한다. 용서의 힘에 대해 부연하자면.
“용서는 기본적으로 나도 잘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생각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든다. 감정이 딱딱해지는 것 같고. 나부터 그래야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 감정이 과할 수 있다, 내 감정이 얕은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충분히 많은 용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카시오페아 공주」에서 사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용서하기 힘든 사건이다. 또 복수의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망과 나락에서 함께 빠져나온, 한편으로 은인이기도 하다. 원수 같은 부모자식이라도 용서는 가족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녀에게 배웠다. 이 세상에는, 우리 인생에는, 과학과 논리를 넘어서는 질서도 있다는 가르침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결국은 용서가 증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p.114)
일필휘지로 썼다는 느낌을 준다. 글을 쉽게 쓰는 편인가.
“빨리 쓰는 편이다. 자기검증이 필요한 직업이 작가인데, 그렇다. 한때 문체나 예술성(문학성)에 대해 천착을 했는데, 그걸 버리니까, 빨리 쓰는 것 같다. 계기가 있었다. 2000년이었던가. 문학동네의 장편소설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린’이라는 작품으로 유일하게 최종결선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당선소감을 준비했다. 결선에 올라갔으니까, 당선작이 될 줄 알았던 거지.(웃음)
결선에 올라갔다고 한 뒤로 잠깐 소식이 없었는데, 문예지가 나왔다. 내 작품이 언급돼 있는데, 당선작이 없다고 발표가 났더라. 그때가 스물 대여섯이었는데, 충격을 받았다. 자의식 과잉의 시기라서, 창피한 얘기지만, 반항심이 생겼다. ‘더 이상, 안 쓸래’, 그랬다.(웃음) 이후 시나리오 일을 했다. 젊고 빨리 쓰니까 콜이 많았다. 글 써달라는 사람 많은데, 굳이 힘들게, 안 어울리게 (소설을) 쓸 필요도 없다고 당시는 생각했다. 그런데, 숨길 수가 없는 것 같다. 소설 쓰고 싶은 욕망은. 부담을 털어내니까 빨리 써진다.”
(당시 심사평은 어땠나) “아직 기억이 난다.(웃음) 숙련되지 못한 문장, 성찰 없는 글쓰기로 이야기와 내러티브에 대한 재능이 아깝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재승덕(才勝德)이라는 말씀도. 그런 부분을 채우려고 문장 수련을 했으면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웃음)”
소설가와 PD, 시너지 효과를 내다
소설 쓰는 작업은 일종의 세컨드 잡이다. 라디오 PD가 프로그램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 왜 쓰는가.
“이중생활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서로 방해가 된다면 못했겠지. 습작해보면 알겠지만, 피곤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또래의 비슷한 집단을 보면 직업 외의 남은 시간을 주로 골프, 증권, 게임, 술, 모임 등으로 보낸다. 그런데 나는 좀 특이한 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 것을 안 하니까. 다른 전업 작가만큼 시간이 남는다. 아무리 중요한 통화도 3분 이내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전화에 시간을 뺏기지도 않는다.
내게 글쓰기는 또 다른 에너지를 쓰는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를 충전하는 작업이다. 글을 쓰면서 하루 동안 생긴 잉여 물을 소화시키고 배설시킨다. 또 글 쓰면서 그 단상 등을 방송에 녹여낼 때도 많다. 내겐 글쓰기와 직업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 같은 일이다. <컬투쇼>도 콘텐츠, 소설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일 아닌가.”
이번 소설집, 장르도 다양하다. 왜 다양하게 쓰는가.
“시기가 중요했다. 소설 쓰기를 쉬면서 충무로에서 20대 중반 3~4년을 짱돌처럼 굴렀다.(웃음) 글 쓰는 직업 중 가장 열악한 것이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다. 대우나 근무환경 등에서. 젊은 호기로 3년을 버티다보니 장르를 가릴 수가 없었다. 의뢰가 들어오면 무조건 하는 거지. 까라면 까는 거였다. 3년 동안 온갖 장르의 시나리오를 하다 보니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없어졌다. 그게 소설에도 적용되고.”
그러면 좋아하는 특정 장르가 있나.
“굳이 꼽으라면, 스릴러와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코미디나 건조한 문체의 소설은 의도적으로 연습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 재능이 없는 건지. 그래서 그런 작가들이 부럽다. 웃기는 작가들이나 냉정한 작가들.”
식상한 질문이다. PD 이재익과 작가 이재익,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같나.
“PD로서 내 스타일을 보면, 딱히 남보다 잘 하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내세울 게 없지만, 그래도 친절한 피디다.(웃음) 굉장히 의도적으로 친절한 PD가 되고 싶다.” (이유가?) “PD라고 하면 의도하지 않아도 권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속된 말로, 사람 망치기 쉬운 직종이지. 유혹이나 로비도 많고. ‘슈퍼 갑’이라고 칭하는 직업군이라, 의도적으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PD가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색깔을 내기보다 스태프들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 조율하는 쪽의 PD가 이재익의 스타일이자, 브랜드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반대다. 혼자하고 싶은 욕망이 크다. 디자인 등에도 세세하게 참여하고 싶고. 작가로서는 독재자이고 싶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개인의 장르가 아닌가. 물론 상품으로 나가면 다르긴 해도. 이야기나 콘텐츠에 대해서라면 독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그러면, 어느 것에 더 끌리나.) “소설가가 더 좋다.” (독재자라서?) “그렇다.(웃음)”
<컬투쇼>, 시쳇말로 ‘인기 짱’이다. 쇼의 느낌이 더해진 남다른 프로그램인데, 기획부터 직접 했나. 앞으로 또 어떻게 꾸려나가고 싶나.
“나는 세 번째 PD다. 초창기에는 컬트한 소수의 마니아를 상대로 지저분한 얘기부터 솔직한 얘기 등을 했다.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두 번째 PD부터 판 자체가 커졌다. 청취자층을 넓게 만들어 놨다. 바통을 받았을 때, 이미 <컬투쇼>는 지금의 위치에 오른 상태였다. 고민을 많이 했다. 보름달이 차오르면 이지러지는 것밖에 안 남지 않나. 컬투쇼가 어쨌든 1위로 달려온 시점이라, 부담을 많이 느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략은 이렇다. 재미로서의 검증은 끝났고, 판 자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컬투쇼>에서도 눈물 나는 사연과 공익적이고 감동적인 콘텐츠를 다루고 싶다. 그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 내가 몇 년을 더 할지는 몰라도, 덩치도 크지만 날렵하기도 한 멋있는 남자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창작의 동력? 사람!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이런 모든 창작활동의 계기나 동력은 뭔가.
“<컬튜쇼>만으로는 못한다. 내겐, 동력이라면 사람이다. 책은 매주 2~3권 가량 보지만, 책보다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내가 받아들인 것을 머릿속에서 캐릭터로 만들어보는 상상을 많이 한다. 사람도 보면, 대개의 경우 한 부분만 알게 되는데, 그럴 때 궁금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이지. 직접 물어보고 아는 작업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 자극을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면 이야기 만들어진다. 그런 작업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책 읽은 친구들이 내 얘기냐고, 묻는데, 많이 바꾼다.(웃음) 아무리 그대로인 것 같아도 바꾸고, 인물이나 사건을 왜곡하고 변형시키고 부풀린다.”
「중독자의 키스」에서 수아의 영화에 대한 생각은 이재익의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영화 프로듀서 중에는 결혼하지 않은 분도 많다. 영화와 결혼했다고 하지.(웃음) 즉, 스크린과 사랑을 나누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이런 캐릭터가 재미있겠다 싶어서 빌렸다. 수아의 캐릭터를 만들게 한 특정인물이 있는데,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분이 이렇게도 살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만들어봤다.”
영원히 영화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영화 속의 한 인물이 되어 두 시간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카메라 앵글과 조명 속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다음어진 대사들을 말하며, 결코 지루한 법 없이 흘러가는 장면들 속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눈물도 웃음도 권태도 오르가슴도 탄생도 죽음도 사랑도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단정하게 정리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pp.308~309)
소설 속에 언급된 음악 등을 보면 PD 이전에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레코드 가게 얘기도 그렇고.
“좋아하는 것만 따지라면, 음악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는 일 때문에 하는 거지.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지, 예술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다. 영화는 그렇지만, 음악은 정말 좋아한다. 작업할 때도 음악을 틀어놓고 할 때도 있다.”
「레몬」에는 보호벽 길과 보호벽, 여행자의 욕구와 용기가 나온다. 이재익에게는 어땠나.
“우리가 다 어른으로 태어난 건 아니다. 교육을 받는다. 이런 게 멋지고, 잘 사는 거고, 실패한 거라는 뉘앙스를 부모, 친척, 선생 등의 주변 환경을 통해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 게 보호벽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 배운 것과 다르지 않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기가 쉬운 건 아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 사고… 이런 과정이 많은 사람들이 거친 삶이고 보호벽이고 길이다.
거기서 ‘다른’ 자신의 욕망이라면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10년 전에 했던 고민이지만 지금 20대도 비슷한 고민이 제일 크지 않을까 싶다. PD라는 직업에 있으니까, 이에 관심 많은 청년들이 많은데, 질문을 들어보면 10년 전과 똑같다. 모양과 패션, 트렌드만 다르지 근본적인 것은 같지 않나 싶다.”
가기 싫은 곳엔 가지 않으면 된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 된다.(p.183)
살아가는 건 길을 걷는 것이다. 길 양 옆으로는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보다 더 두터운 보호벽이 높이 서 있다. 보호벽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어떤 것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여행자의 고정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보호벽은 점점 더 두터워진다. 문제는 보호벽이 인도하는 방향이 여행자의 진실한 욕구와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 보호벽을 부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p.184)
무엇을 글로 표현하고 싶으며, 다음 집필 계획은 어떤가.
“탈고를 2개 끝냈다. 하나는 ‘압구정 소년들’(가제)로 장편이다. 성장소설을 많이 봤다. 강남이라는 동네도 대한민국에서 실존하는 동네고, 강남 아이들의 성장소설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강남에서 자란 사람이 쓴 리얼한 성장소설이 될 거다. 그런 틀과 스릴러의 장르적인 틀을 결합하고 싶었고, 연예계의 초상이 겹친, 3개가 맞물려서 쓰인 소설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또 하나는 ‘아가씨’(가제)라는 장편소설인데, 착한 여자들은 모르는 세계의 아가씨들 얘기다.(웃음)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네 명의 주인공이 나와 옴니버스로 구성됐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네 명이 엮여, 인생의 격렬한 시점을 그렸다. 후반부에서야 오래전부터 다 얽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명이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엮어있었다는…
나는 기본적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복수 주변의 의외로 가까운 곳에 구원과 용서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내 소설의 오랜 테마로 남을 거다. 아직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약간의 궁금증, 풀렸다. 『카시오페아 공주』(이재익 지음|황소북스 펴냄) 덕이다. 외계에서 온, 카시오페아 별자리를 찾아 파동을 보내면, 그곳에서 같은 파동을 보낸다는 「카시오페아 공주」.
그 외계에서 온 공주도 웃고 넘어갈, 감동 받을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단다. 그 많은 라디오 프로그램 중 ‘님 짱 드셈’ 하는 <두시탈출 컬투쇼>(이하 <컬투쇼>). <컬투쇼>의 파동은 카시오페아 별자리까지 미치나보다. 이 프로그램 연출을 맡고 있는 이재익 PD가 카시오페아 공주의 이야기까지 쓴 것을 보면.
‘이야기꾼’으로서의 열정을 간직한 그를, 라디오PD와 작가 사이를 오가며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는 그를, 지난 6일 <컬투쇼>가 막 끝난 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한때 작품성과 문체의 벽에 갇혀 괴로워했으나 이제는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기의 재미를 따르기로 했다. 안에서 넘쳐나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더 자주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50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길 바란다니. 이재익, 그 이름, 기억할 만하지 않은가. 언젠가, 이야기의 재미가 풀풀 풍기는 <속세탈출 이재익쇼>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고.
작가로서 두 번째 시작이라는 『카시오페아 공주』. 아마도 책에 나온 이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서른여섯.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니겠지?”(p.113) 아무렴. 늦은 나이, 아니다. 내가 아는, 마흔 무렵은 그렇다. 인생을 재부팅하기에 아주 이르지는 않지만, 완전히 늦지도 않은 나이. 티.오.피까지는 어렵지만, ‘그냥’ 아저씨는 될 수 있는 무렵.
두 번째 시작, 『카시오페아 공주』
다섯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소회부터 듣고 싶다.
“이번 책은 일단, 두 번째 시작이다. 앞으로 자주 많이 낼 생각이다.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엄격한 예술성이나 문장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으려 한다. 엄격하지 않아서 재밌는 얘기를 자주 써서 독자들과 만나고 싶다. 그런 시작이 되는 책이 이번 책이다.
나는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을 했다. 그래서인지, 문학과 문체에 대한, 순수예술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앞선 『질주질주질주』나 『노란 잠수함』 등은 옷이 내게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흉내를 냈다. 이 책으로 부담감을 많이 털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재밌는 얘기를 쓰고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임을 시인하고 파악했다. 순수문학이나 예술적인 지향에 대한 부담을 털어내고 즐겁게 썼다.”
표제작이 「카시오페아 공주」인데, 택한 이유가 있나.
“제목이 제일 그럴듯해서.(웃음) 분량도 제일 길고, 가장 최근에 쓴 것이 「카시오페아 공주」였다. 「레몬」은 쓴 지 12년이 넘었다. 그런 작품을 표제작 하기엔 찔리잖나. 스스로도 생각하기에도 (「카시오페아 공주」가) 가장 무게감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마다 시오리 마쓰모토의 그림을 내걸었다. 모티브인가? 아니면 시오리 마쓰모토의 그림을 좋아해서?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웃음) 원고를 넘기고 출판사와 표지 시안을 얘기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어느 날 회사에 있으면서 인터넷을 뒤지며 적당한 일러스트를 찾았다. 찾다보니 집에 들어가는 걸 포기했는데, 아마 새벽 3시였지. ‘리틀 가든(little garden)’이라고 「섬집 아기」의 표지로 있는 그림을 봤다. 인상 깊었다. 그래, 이런 느낌이다. 그래서 (시오리 마쓰모토의 다른 그림을) 찾아봤다. 정말 잘 어울린다 싶어서 출판사에 얘기해서 써보자고 했다. 다행히 시오리상이 흔쾌히 허락해줬다.”
구원과 용서, 나의 영원한 테마
「카시오페아 공주」의 희준, 「섬집 아기」의 현호, 「레몬」의 나, 「좋은 사람」의 현주, 「중독자의 키스」의 수아 등 이재익을 조금씩 반영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가장 가까이 혹은 깊이 투영한 인물이 있다면.
“음, 사실 희준의 모습이 묻어있을 수 있겠다. 「카시오페아 공주」에 아버지와 이모의 얘기는 집안 얘기를 그대로 쓴 거다. 아버지는 실제로도 약국을 하시고 비슷한 성격이시다. 이모도 (소설속의) 같은 일을 당하셨다. 나도 이모와 이모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눈빛을 통해 사람 마음이 전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모가 이 책을 보시고 희망을 갖게 되셨으면 한다. 또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사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웃기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각자 어두운 부분도 있을 테고. 주인공들이 다들 내 모습을 조금씩 담고 있긴 하다.”
이모를 보면서 좌절을 이겨내는 도 다른 방식을 배웠다. 슬픔이란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는 것도 알았아.(p.32)
소설들을 관통하는 정서 중의 하나가 ‘슬픔’이 아닐까 싶다.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들(희준, 현호, 현주), 이별(「카시오페아 공주」,「레몬」,「중독자의 키스」) 등인데, 그런 한편으로 빛이 스며든다. 만남을 기대하고 분노를 삭이고 희망을 여미는 그런 것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테마가 구원, 용서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것은 아니고.(웃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받아들여 주는 것이 용서이고 구해준다는 것이 구원인데, 그런 마음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구원과 용서로 가기 위해선 깊은 골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앞부분에는 슬픔, 아픔 등이 있는 사건을 배치했다. 그렇게 그것을 극복하면 좋잖나. 기본적으로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다.”
「레몬」의 주인공은 외국계은행을 가기 싫다며 포기할 것 같았지만, 결국 회사에 들어가고 재밌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렇다고 레코드가게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되레 긍정적으로 자신을 마주대하는 느낌이랄까. 인생은 레몬 같다는 말, 이재익에겐 어떤 것인가.
“아주 오래전, 비디오방에서 본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원 나잇 스탠드>에 나온 대사다. 중요한 대사도 아니고 조크 같은 거였다. 거기서 착안했는데, 이 책에선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썼다. 인생은 새콤한 것이야, 이런 게 아니고. 레몬 대신 오렌지가 될 수도 있겠지. 인생에서 크고 무게감 있는 의미를 찾는 게 부질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레몬」은 이십 대 초중반에 쓴 소설이다.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입장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도 전업 작가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등단 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이었는데, 속물근성이나 두려움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하기도 싫더라. 지금 대기업 월급쟁이로 살고 있지만, 주인공의 태도나 선택의 방향이 비슷했다. 많이 투영했다. 내 과거의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나는 광고회사를 1년 다녔는데, 그냥 그만뒀다. 글 쓰고 영화 일을 하고 싶어서. 절대로 대기업에 다니지 않으려고도 했다. 자영업을 하려고, 샌드위치 가게를 알아보고 다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그 시절과 맞닿아 있는 소설이라 애정이 많다.(웃음)”
이건 우스운 얘긴데, 난 레코드 가게를 하고 싶었어. 가기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쓰는 거야.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가게 문을 닫고 훌쩍 여행도 떠나고. 되게 진부하지? 그런데…(p.183)
「좋은 사람」에서 결말 부분의 전개는 다소 느닷없다는 느낌도 준다. 원래 장편을 줄여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 다시 장편으로 내놓을 계획이 있나.
“날카로운 독자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원래 처음 썼을 때 3인칭이 아니었냐고. 정말 예리하다.(웃음) 뒷부분에 사건이 복잡하다. 슬러시 무비에 가깝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앞에서 풀어줘야 할 부분 많은데, 1인칭 시점 이다보니 그리 못한 게 있다.
음, 아마 재탕하면 욕먹을 것 같다.(웃음) 사실 소설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만질 자신도 없다. 일단 토픽 자체가 끔찍한 얘기잖나. 물론 현실에서도 비슷한 강도로 강력사건이 발생하지만, 글로 쓰다 보니 힘든 부분이 있다.”
「카시오페아 공주」의 돼지국밥이나 롯데 자이언츠는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디테일은 어떻게 잡은 건가.
“부산에서 한 달 넘게 살았던 적이 있다. 물론 취재 때문에 갔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문에 출장 가서 해운대에서 한 달 정도 묵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취재를 빌미로 돌아다니면서 많이 봤다. 돼지국밥도 많이 먹고.(웃음)
롯데 자이언츠는, 야구에 관심 있는 건 아닌데, <거인의 꿈>이라는 롯데 자이언츠 2군 선수를 다룬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 상동구장에 취재를 갔었다. 그때 그 경험 때문에 그런 디테일이 나온 것 같다.”
지엽적인 건데, 「레몬」의 아나운서 윤미는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비문을 쓴다. 윤미의 부족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이었나.
“아나운서가 그런 문장을 쓰게 한 것은, 어긋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나쁘게 그리기 위한 건 아니고. 요즘은 보통 사람들도 그게 비문이라는 것을 많이 알 텐데, ‘좋은 하루 되라’는 말에서 어긋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건 찍어냈나. 「레몬」이 문학사상의 문예지에 실렸었는데, 당시 평을 써 주신 김윤식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지적은 안 나왔는데…(웃음)”
“어릴 때부터 많이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서울의 다른 곳은 많이 가 보질 않았다. 잘 모른다. 목동도 회사에 입사하면서 처음 왔다. 내가 아는 동네, 쓰기 편한 동네를 쓰다 보니 그랬다. 내 한계이기도 하다. 다양한 공간에서 살았으면 정서들이 다채로울 텐데, 공간에 대한 정서에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최근 복수가 영화계에선 한 화두이기도 한데, 「카시오페아 공주」는 복수보다 용서를 택한다. 용서의 힘에 대해 부연하자면.
“용서는 기본적으로 나도 잘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생각이 딱딱해지는 느낌이 든다. 감정이 딱딱해지는 것 같고. 나부터 그래야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 감정이 과할 수 있다, 내 감정이 얕은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충분히 많은 용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카시오페아 공주」에서 사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용서하기 힘든 사건이다. 또 복수의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망과 나락에서 함께 빠져나온, 한편으로 은인이기도 하다. 원수 같은 부모자식이라도 용서는 가족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녀에게 배웠다. 이 세상에는, 우리 인생에는, 과학과 논리를 넘어서는 질서도 있다는 가르침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결국은 용서가 증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p.114)
일필휘지로 썼다는 느낌을 준다. 글을 쉽게 쓰는 편인가.
“빨리 쓰는 편이다. 자기검증이 필요한 직업이 작가인데, 그렇다. 한때 문체나 예술성(문학성)에 대해 천착을 했는데, 그걸 버리니까, 빨리 쓰는 것 같다. 계기가 있었다. 2000년이었던가. 문학동네의 장편소설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린’이라는 작품으로 유일하게 최종결선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당선소감을 준비했다. 결선에 올라갔으니까, 당선작이 될 줄 알았던 거지.(웃음)
결선에 올라갔다고 한 뒤로 잠깐 소식이 없었는데, 문예지가 나왔다. 내 작품이 언급돼 있는데, 당선작이 없다고 발표가 났더라. 그때가 스물 대여섯이었는데, 충격을 받았다. 자의식 과잉의 시기라서, 창피한 얘기지만, 반항심이 생겼다. ‘더 이상, 안 쓸래’, 그랬다.(웃음) 이후 시나리오 일을 했다. 젊고 빨리 쓰니까 콜이 많았다. 글 써달라는 사람 많은데, 굳이 힘들게, 안 어울리게 (소설을) 쓸 필요도 없다고 당시는 생각했다. 그런데, 숨길 수가 없는 것 같다. 소설 쓰고 싶은 욕망은. 부담을 털어내니까 빨리 써진다.”
(당시 심사평은 어땠나) “아직 기억이 난다.(웃음) 숙련되지 못한 문장, 성찰 없는 글쓰기로 이야기와 내러티브에 대한 재능이 아깝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재승덕(才勝德)이라는 말씀도. 그런 부분을 채우려고 문장 수련을 했으면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웃음)”
소설가와 PD, 시너지 효과를 내다
소설 쓰는 작업은 일종의 세컨드 잡이다. 라디오 PD가 프로그램 제작에 열과 성을 다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 왜 쓰는가.
“이중생활을 좋아하는 것 같다. 서로 방해가 된다면 못했겠지. 습작해보면 알겠지만, 피곤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또래의 비슷한 집단을 보면 직업 외의 남은 시간을 주로 골프, 증권, 게임, 술, 모임 등으로 보낸다. 그런데 나는 좀 특이한 건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 것을 안 하니까. 다른 전업 작가만큼 시간이 남는다. 아무리 중요한 통화도 3분 이내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전화에 시간을 뺏기지도 않는다.
내게 글쓰기는 또 다른 에너지를 쓰는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를 충전하는 작업이다. 글을 쓰면서 하루 동안 생긴 잉여 물을 소화시키고 배설시킨다. 또 글 쓰면서 그 단상 등을 방송에 녹여낼 때도 많다. 내겐 글쓰기와 직업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 같은 일이다. <컬투쇼>도 콘텐츠, 소설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건 기본적으로 같은 일 아닌가.”
이번 소설집, 장르도 다양하다. 왜 다양하게 쓰는가.
“시기가 중요했다. 소설 쓰기를 쉬면서 충무로에서 20대 중반 3~4년을 짱돌처럼 굴렀다.(웃음) 글 쓰는 직업 중 가장 열악한 것이 충무로의 시나리오 작가다. 대우나 근무환경 등에서. 젊은 호기로 3년을 버티다보니 장르를 가릴 수가 없었다. 의뢰가 들어오면 무조건 하는 거지. 까라면 까는 거였다. 3년 동안 온갖 장르의 시나리오를 하다 보니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없어졌다. 그게 소설에도 적용되고.”
그러면 좋아하는 특정 장르가 있나.
“굳이 꼽으라면, 스릴러와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코미디나 건조한 문체의 소설은 의도적으로 연습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 재능이 없는 건지. 그래서 그런 작가들이 부럽다. 웃기는 작가들이나 냉정한 작가들.”
식상한 질문이다. PD 이재익과 작가 이재익,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같나.
“PD로서 내 스타일을 보면, 딱히 남보다 잘 하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내세울 게 없지만, 그래도 친절한 피디다.(웃음) 굉장히 의도적으로 친절한 PD가 되고 싶다.” (이유가?) “PD라고 하면 의도하지 않아도 권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속된 말로, 사람 망치기 쉬운 직종이지. 유혹이나 로비도 많고. ‘슈퍼 갑’이라고 칭하는 직업군이라, 의도적으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PD가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색깔을 내기보다 스태프들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 조율하는 쪽의 PD가 이재익의 스타일이자, 브랜드인 것 같다.
하지만 작가로서는 반대다. 혼자하고 싶은 욕망이 크다. 디자인 등에도 세세하게 참여하고 싶고. 작가로서는 독재자이고 싶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개인의 장르가 아닌가. 물론 상품으로 나가면 다르긴 해도. 이야기나 콘텐츠에 대해서라면 독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그러면, 어느 것에 더 끌리나.) “소설가가 더 좋다.” (독재자라서?) “그렇다.(웃음)”
<컬투쇼>, 시쳇말로 ‘인기 짱’이다. 쇼의 느낌이 더해진 남다른 프로그램인데, 기획부터 직접 했나. 앞으로 또 어떻게 꾸려나가고 싶나.
“나는 세 번째 PD다. 초창기에는 컬트한 소수의 마니아를 상대로 지저분한 얘기부터 솔직한 얘기 등을 했다.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두 번째 PD부터 판 자체가 커졌다. 청취자층을 넓게 만들어 놨다. 바통을 받았을 때, 이미 <컬투쇼>는 지금의 위치에 오른 상태였다. 고민을 많이 했다. 보름달이 차오르면 이지러지는 것밖에 안 남지 않나. 컬투쇼가 어쨌든 1위로 달려온 시점이라, 부담을 많이 느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략은 이렇다. 재미로서의 검증은 끝났고, 판 자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컬투쇼>에서도 눈물 나는 사연과 공익적이고 감동적인 콘텐츠를 다루고 싶다. 그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 내가 몇 년을 더 할지는 몰라도, 덩치도 크지만 날렵하기도 한 멋있는 남자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창작의 동력? 사람!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이런 모든 창작활동의 계기나 동력은 뭔가.
“<컬튜쇼>만으로는 못한다. 내겐, 동력이라면 사람이다. 책은 매주 2~3권 가량 보지만, 책보다는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내가 받아들인 것을 머릿속에서 캐릭터로 만들어보는 상상을 많이 한다. 사람도 보면, 대개의 경우 한 부분만 알게 되는데, 그럴 때 궁금해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이지. 직접 물어보고 아는 작업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 자극을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면 이야기 만들어진다. 그런 작업이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책 읽은 친구들이 내 얘기냐고, 묻는데, 많이 바꾼다.(웃음) 아무리 그대로인 것 같아도 바꾸고, 인물이나 사건을 왜곡하고 변형시키고 부풀린다.”
「중독자의 키스」에서 수아의 영화에 대한 생각은 이재익의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영화 프로듀서 중에는 결혼하지 않은 분도 많다. 영화와 결혼했다고 하지.(웃음) 즉, 스크린과 사랑을 나누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이런 캐릭터가 재미있겠다 싶어서 빌렸다. 수아의 캐릭터를 만들게 한 특정인물이 있는데,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그분이 이렇게도 살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만들어봤다.”
영원히 영화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영화 속의 한 인물이 되어 두 시간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카메라 앵글과 조명 속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다음어진 대사들을 말하며, 결코 지루한 법 없이 흘러가는 장면들 속에서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눈물도 웃음도 권태도 오르가슴도 탄생도 죽음도 사랑도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단정하게 정리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pp.308~309)
소설 속에 언급된 음악 등을 보면 PD 이전에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레코드 가게 얘기도 그렇고.
“좋아하는 것만 따지라면, 음악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는 일 때문에 하는 거지.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지, 예술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다. 영화는 그렇지만, 음악은 정말 좋아한다. 작업할 때도 음악을 틀어놓고 할 때도 있다.”
「레몬」에는 보호벽 길과 보호벽, 여행자의 욕구와 용기가 나온다. 이재익에게는 어땠나.
“우리가 다 어른으로 태어난 건 아니다. 교육을 받는다. 이런 게 멋지고, 잘 사는 거고, 실패한 거라는 뉘앙스를 부모, 친척, 선생 등의 주변 환경을 통해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 게 보호벽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 배운 것과 다르지 않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기가 쉬운 건 아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집 사고… 이런 과정이 많은 사람들이 거친 삶이고 보호벽이고 길이다.
거기서 ‘다른’ 자신의 욕망이라면 무서워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10년 전에 했던 고민이지만 지금 20대도 비슷한 고민이 제일 크지 않을까 싶다. PD라는 직업에 있으니까, 이에 관심 많은 청년들이 많은데, 질문을 들어보면 10년 전과 똑같다. 모양과 패션, 트렌드만 다르지 근본적인 것은 같지 않나 싶다.”
가기 싫은 곳엔 가지 않으면 된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 된다.(p.183)
살아가는 건 길을 걷는 것이다. 길 양 옆으로는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보다 더 두터운 보호벽이 높이 서 있다. 보호벽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어떤 것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여행자의 고정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보호벽은 점점 더 두터워진다. 문제는 보호벽이 인도하는 방향이 여행자의 진실한 욕구와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 보호벽을 부수는 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p.184)
무엇을 글로 표현하고 싶으며, 다음 집필 계획은 어떤가.
“탈고를 2개 끝냈다. 하나는 ‘압구정 소년들’(가제)로 장편이다. 성장소설을 많이 봤다. 강남이라는 동네도 대한민국에서 실존하는 동네고, 강남 아이들의 성장소설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강남에서 자란 사람이 쓴 리얼한 성장소설이 될 거다. 그런 틀과 스릴러의 장르적인 틀을 결합하고 싶었고, 연예계의 초상이 겹친, 3개가 맞물려서 쓰인 소설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또 하나는 ‘아가씨’(가제)라는 장편소설인데, 착한 여자들은 모르는 세계의 아가씨들 얘기다.(웃음)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네 명의 주인공이 나와 옴니버스로 구성됐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네 명이 엮여, 인생의 격렬한 시점을 그렸다. 후반부에서야 오래전부터 다 얽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네 명이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엮어있었다는…
나는 기본적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복수 주변의 의외로 가까운 곳에 구원과 용서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내 소설의 오랜 테마로 남을 거다. 아직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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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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