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시즘과 호러가 뒤섞인 영화
뱀파이어가 요청한다. 인간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뱀파이어가 들어온다. 호명받지 않은 뱀파이어의 온몸이 균열되면서 피가 번진다. 그걸 알고도 들어오기를 감행한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만 네가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호명에 의해서만 연인이라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관계를, 이 영화 잔혹하게 보여준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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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 2008

이 영화, 악평할 수도 있다. 여러 장르를 잘 섞어 놓았다. 뱀파이어 서사를 축으로 에로티시즘, 멜로, 호러, 슬래셔slasher, 환타지에 학원폭력 서사까지 결합시키니 장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혼성장르 영화가 된다. 게다가 에로티시즘도 어린아이들에 의해 묘하게 정화되면서 관객의 관음을 되돌려 받는다.


그러나 장르를 섞었을 때 나타나는 과잉의 이미지는 없다. 마치 침묵의 눈雪이 다 덮어버린 듯. 낭자한 피도 눈이 다 덮어버려 화면은 내내 관객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극적인 장면일수록 카메라는 최대한 절제하고 냉정하게 다가가며 편집에는 기교가 없다. 어린 배우들의 표정은 무심하여 슬프다. 열두살 ‘오스카르’는 창백하고 파리하며, 뱀파이어 ‘엘리’의 동공은 초점마저 커다랗게 부풀어 사람들의 시간이 넘치게 꽉 차 들어 있는 듯하다.

보통 다른 뱀파이어 영화처럼 분명 알레고리 영화라는 것 알겠는데, 이 영화 왠지 알레고리로 읽기 싫어진다. 예컨대 어떤 부조리한 사랑이나 불가해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한 뱀파이어와 인간의 설정이 아니라, 정말 그냥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 뱀파이어와 인간이 현실에 ‘있다’고 한 순간만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사랑의 시작은 이러하다.
Let me in,

뱀파이어가 요청한다. 인간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뱀파이어가 들어온다. 호명받지 않은 뱀파이어의 온몸이 균열되면서 피가 번진다. 그걸 알고도 들어오기를 감행한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만 네가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어떤 호명에 의해서만 연인이라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관계를, 이 영화 잔혹하게 보여준다.


사랑은, 그러니까, 호명하든 하지 않든, 호명되든 되지 않든,
‘향하는’것이다.

꽃이 되지 못해도, 의미 같은 것은 없어도 발을 들여 놓는 것……. (그러나, 역시 이렇게 말하는 것, 자신없다.)

“엘리, 내 여자친구 될래?”
“오스카르, 나는 소녀가 아니야.”
(……)
“넌 죽은 거니?”

뱀파이어는 죽고 나서 귀환한 유령이 아니다.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기생해야 하므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죽어서 된 존재도 아니고, 인간이 퇴행하거나 진화해서 만들어진 존재도 아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포획되지 않는 비존재인 것이다. 엘리는 그래서 ‘소녀’도 아니고 삼인칭 ‘그녀’도 아니다. 단지 엘리를 아는 오스카르나 호칸에게 ‘너’일 뿐이다.

‘호칸’도 오스카르처럼 열두 살 때 엘리를 만나서 예순이 넘도록 그녀에게 피를 제공해 준 것일까? 사람이면서 산 사람의 피를 받고, 그 다음에 죽이고, 그랬을까? 그럼, 오스카르도 엘리와 함께 호칸처럼 살아가게 될까? 그러다가 호칸이 그랬듯이 “오늘만 오스카르를 만나지 않으면 안 돼? 소원이야.” 그런 말 남길까?


사랑할 수 없는 비존재이기에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서 인간의 삶을 엘리에게 모두 반납한 채 살겠지만, 오스카르도 열두 살을 빠르게 넘기고 서른, 쉰, 예순으로 치달을 것이다. 열두 살을 넘어가지 못하는 엘리는 ‘그 노인’을 연민하겠지만 그는 어느새 더 이상 힘에 부쳐 사람의 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엘리에게 거치적거리는 짐짝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럼, 호칸처럼 자신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알아보게 되면 같이 사는 엘리의 존재도 노출될 테니까)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고 응급실에 입원해 있다가 벽을 타고 온 뱀파이어 엘리에게 아무 말 없이 제 목을 내어주고 창에서 떨어져 죽게 될까?

인간에겐 다행히 ‘죽음’이란 게 있으므로 헤어짐은 어떻게든 ‘완성’되지만
죽음이 없는 뱀파이어는, 게다가 열두 살에 고착되어 있는 뱀파이어는
어떻게 이별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반복했을까? 엘리, 얼마나 오랫동안 열두 살로 지내며 이별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했을까? 뱀파이어 엘리가 말한다.
“잠깐 동안 내가 되어봐Be me for a while.”
인간은 뱀파이어가, 물론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for a while’이 아니다. 뱀파이어에게 흡혈되면 뱀파이어가 ‘영원히’되는 것이다. 엘리는 그러나 뱀파이어를 만들지 않는다. 뱀파이어를 만들어 서로 기대어 살지 않는다. 엘리는 직접 흡혈하지 않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인간에게 사랑받음으로써, 그 (비)연인이 인간의 방식으로 산 자의 피를 가져오게 한다. 불가피하게 자신이 하게 된 경우에도 흡혈 후 인간을 죽임으로써 ‘혼자’남는다. 흡혈 중 한 남자에게 걷어차여 결국 여자의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없었을 때 그 반인半人의 결말은 차마 비참하다는 것을, 오래오래 열두 살이었던 엘리는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스카르에게 “잠깐만 내가 되어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함께이기 위한 ‘잠깐’인 것이다.

죽음조차 죽지 않는 엘리에게 죽음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칠 즈음, 화면에는 암전처럼 검은빛이 들어차고 그 위에 점점이 박히는 유리가시 같은 눈. 그리고 기차. 오스카르. 오스카르 앞에 있는 큰 가방. 오스카르는 그 가방에 손가락 끝으로 모스부호를 보낸다. 가방 속에서 답변이 온다. 그들은 그렇게 떠난다. 예정되어 있는 끝으로 함께 간다.

***

사랑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은 닫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에 의해 필연적으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발적으로 버려짐으로써 이별과 죽음을 동시에 완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은 닫혀 있습니다. 끝을 안다고 그 끝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알기 때문에 슬픔 속에서 그 끝을 완수하는 과정을 밟아갑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이기도 할 것입니다.

 

#렛미인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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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2.03.09

한 두가지 장르가 아니라 그야말로 여러 장르를 버무려 놓았네요. 이렇게 버무려 놓은 영화는 자칫 잘못하면 영 아니올시다가 될 수도 있는데, '렛미인'은 제법 잘 머무려 놓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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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08

미국판보다 스웨덴판의 배우와 설정, 플롯이 훨씬 더 촘촘하고 섬세햇죠. 눈과 소년,소녀 그리고 뱀파이어 호러지만 일상의 날카로움처럼 느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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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풀

2010.09.20

한귀은님의 "이토록 영화같은 당신"을 읽고~ 렛미인이 보고싶어졌는데,,,
공포물은 워낙 무서워하는지라~ 아직도 못보고 있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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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문학을 가르치는 그녀는, 학생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문학을 가까이 하길 바란다. 20세기에 한 시인은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21세기엔 “아무도 병들지 않았지만, 모두들 아프다.”라고 그녀는 진단한다. 이 환부가 없는 아픔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치유의 시간만이 흐를 때, 문학이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 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문학의 소명은 치유에 있다고 믿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책, 영화, 드라마, 음악으로 배웠다. 마흔 즈음부터 그 배우고 익힌 것을 몸소 실험하면서 인문학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인문학으로 사랑뿐만 아니라 육아, 직장생활, 돈 쓰기나 쇼핑, 심지어 거절까지도 잘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문학 과격주의자이다. 감성만 있으면 늙어도 그냥 늙는 게 아니라고 믿는 감성 낙관주의자이며, 행복하지만 이 행복이 낯설어서 더 신이 나는 행복전향자이다. 그 외 고독능력자, 롤랑 바르트 신봉자, 작가 노희경처럼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KBS 진주 라디오에서 ‘책 테라피’(bibliotherapy) 코너를 진행했다. 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과정과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시간을 거치면서 책이 얼마나 안전하며 또 은밀한 치유제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2010년 하반기에는 이별한 여자의 치유 과정을 담은 ‘문학치료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영화를 통한 위로와 이해의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 『이토록 영화 같은 당신』을 펴냈으며, 그 외 저서로 『여자의 문장』,『하루 10분 엄마의 인문학 습관』, 『그녀의 시간』, 『엄마와 집짓기』,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이별리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