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의 경이적 기록, ‘스티비 원더’의 5대 명반
세계 최고 기량의 음악인들이 사력을 다해 겨루는 팝 음악계 속에서도 ‘경이」라 일컬어지는 천재들이 있다. 스티비 원더는 가히 천재 중의 천재, 대중음악계가 발견해 낸 20세기 최고의 뮤지션 중 하나다.
글ㆍ사진 이즘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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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기량의 음악인들이 사력을 다해 겨루는 팝 음악계 속에서도 ‘경이’라 일컬어지는 천재들이 있다. 스티비 원더는 가히 천재 중의 천재, 대중음악계가 발견해 낸 20세기 최고의 뮤지션 중 하나다. 그는 이미 13살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곡을 발표했고(「Fingertips pt.2」) 이는 아직까지도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며, 「Superstition」의 도입부 드럼 연주, 「Isn't she lovely」의 중반부 하모니카 연주는 바로 그의 것이다. 그는 그래미 ‘올해의 앨범’ 상을 3번이나 수상했으며, 이것은 심지어 차례로 발표한 3장의 앨범이 연속으로 수상한 것이었다. ‘전무후무’라는 수식어는 늘 그를 따라다닌다.

아래에 소개되는 앨범들은 이런 경이로운 재능의 소유자의 숱한 명작들 속에서도 가장 먼저 손꼽히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고전들이다. 흔히 1971년 모타운과의 재계약 이후 발표한 연속 5개의 앨범을 그의 ‘5대 명반’으로 부르는데, 이 시기에 그는 평균 1년에 하나 꼴로 쉴 새 없이 명반들을 쏟아낸다. 사실상 스티비 원더를 대표하는 히트곡들도 이때에 대부분 나왔다.

초기 대표곡들인 「Fingertips pt.2」(63년), 「Uptight (Everything's alright)」(65년), 「My cherie amour」(69년), 「Yester-me yester-you yesterday」(69년)는 이곳에 없다. 싱글로 발표되어 인기를 누린 1980년대 히트 퍼레이드 「Ebony and ivory」(82년),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84년), 「That's what friends are for」(85년)도 이곳에 없다. 하지만 그 곡들은 베스트 앨범이나 싱글 모음집으로 들어도 관계가 없는 반면에, 이곳에 있는 「Superstition」(72년), 「Higher ground」(73년), 「Sir Duke」(76년) 등은 반드시 앨범의 맥락 속에서 들려져야 한다. 예를 들어, 「Superstition」을 듣고서 그 유명한 클라비넷 펑키 리프가 스티비 원더의 초창기 전자 음악과 관련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일단 듣고서 재미는 있겠지만 그 의미는 모른 채 넘어갈 수밖에 없다. 현실 참여, 신, 인간의 도덕성 등에 대해 다룬 「Higher ground」「They won't go when I go」도 당시 스티비 원더가 앨범 속에 사회와 정치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성 촉구, 신앙심 등을 녹여내던 맥락을 모르면 허망한 것이다.

이 앨범들은 그동안 국내에서 절판되거나 발매되지 않았다가 2009년 1월 12일, 스티비 원더의 소속사인 모타운 레이블이 50주년을 맞으면서 이를 기념해 재발매되게 되었다. 한 뮤지션, 그것도 최정상의 기량과 영광을 누렸던 뮤지션의 ‘전성기’가 이곳에 정리되어 있다. 음악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나,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나, 이 앨범들은 꼭 한 번은 거치고 공부할 가치가 있는 대중음악의 교과서들이다.

스티비 원더 (1972)

는 스티비 원더의 ‘전자음’ 도입으로 유명한 앨범이다. 그리고 이후 나올 연속 4장의 앨범과 함께 스티비 원더 자신의 디스코그래피는 물론 흑인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리즈로 묶이는 5대 명반의 첫 주자다. 사랑 노래만을 부르며 히트 가수 정도에 머물던 스티비 원더가 사회의식, 실험성, 예술적 편곡과 장르들을 대거 도입해 위대한 아티스트로 거듭난 첫 번째 출사표가 바로 다.

앨범의 놀라운 음악적 성과를 말하기에 앞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앨범이 발표되기 1년 전인 1971년, 스티비 원더는 소속 레이블이었던 모타운과 맺은 계약이 만료되었다. 이는 레이블 입장에선 「Fingertips pt.2」(1위), 「Uptight(Everything's alright)(3위)」, 「My cherie amour」(4위) 같은 인기곡들을 배출한 ‘히트 메이커’가 떠날 수도 있음을 의미했고, 스티비 원더 입장에선 평소 모타운 측이 강압하던 음악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협상은 스티비 원더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후 첫 번째로 소속사에 안겨준 앨범이 바로 이 작품 다.

결국, 이 앨범의 핵심은 계속된 음악적 간섭에 시달리던 스티비 원더가 완전한 창작의 자율권을 획득해 마치 속박이 풀린 듯 자유롭게 자기 실험을 감행한 앨범이란 것이다. 따라서 는 ‘변화’, 특히 모타운 사운드로 대표되던 1960년대 ‘팝 소울’ 사운드로부터의 탈피에 프로듀싱의 초점이 있다.

모타운의 사장 베리 고디(Berry Gordy)는 그가 마치 전리품처럼 당당히 내놓은 이 전자음의 향연들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클라비넷이라는 전자 키보드로 만들어진 날카롭고 차가운 펑크 사운드를 듣고 당시 대중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빈 게이(Marvin Gaye)가 (71)을 만들었을 때 베리 고디가 대중성이 없다고 판단해 앨범 출시를 4달이나 미뤘다는 사실, 그리고 신시사이저의 본격 사용은 1970년대 말에 가서야 개화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 시절로 돌아가 당시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을 상상해보자. 아마 ‘놀라움’이 주된 반응 아니었을까? 베리 고디는 돈을 벌기 힘든 음악이란 것에 놀랍도록 좌절했을 것이고, 대중들은 「Fingertips pt.2」를 만들었던 그 스티비 원더인가 물으며 탄성 혹은 실망을 비쳤을 것이다. 어쨌든, 는 모타운의 역사를 바꾸고,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꾸었다.

사실 판매량에 있어선 베리 고디의 예측이 맞았다. 앨범은 최고 순위가 21위에 그쳤다. 싱글은 더욱 참패였다. 「Superwoman」은 33위를 기록했다. 다음 싱글이었던 「Keep on running」은 100위 안에 겨우 들어간 90위였다. 그 대단한 스티비 원더가 탑 텐 싱글을 하나도 배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것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음이 드러났다. 이 앨범에서 자기 통제권을 확실히 과시한 스티비 원더는 이후 앨범들에서 드디어 빛나는 팝 센스를 발휘해 무수히 많은 히트곡과 전보다 훨씬 좋아진 앨범 차트 기록들을 쏟아내며 1970년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재계약 이전에 발표된 앨범들 중 앨범 차트 탑 20을 기록한 것이 (1963) 하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이후로는 6개의 앨범이 연속으로 탑 5 안에 들었다. 더욱이 는 1위를 했다. 후자는 심지어 1천만 장 이상이 팔렸고, 단기간 히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스테디셀러이자 고전으로 남았다. 이것이 바로 아티스트에게 예술적 자유를 주었을 때의 효과다.

스티비 원더 (1972)

와 이 앨범 의 발표 날짜를 확인해 보면 두 앨범의 발표 시기가 겨우 7개월 밖에 차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연속된 명반을 1년 안에 2장씩이나 발표한 것이다.

마르지 않고 솟는 샘처럼, 스티비 원더는 한시도 쉬지 않고 1970년대 내내 수작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그는 작사, 작곡을 도맡는 것뿐만 아니라 악기들도 대부분 스스로 연주했다. 그래서 의 참여 인원 목록을 보면 스티비 원더, 로버트 마굴레프, 말콤 세실 단 세 명이서 다 소화하고 있다. 로버트 마굴레프(Robert Margouleff)와 말콤 세실(Malcolm Cecil)은 전자음을 실험하기 위해 초빙한 프로듀서로, 둘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가 혼자서 다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은 스티비 원더의 수많은 히트작들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앨범이다. 전작인 가 창작의 자율권을 획득해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감행한 앨범이라면 이 앨범은 그것이 다져지고 세련되어져 대중적 히트까지 거머쥔 앨범이다. 음악성과 대중성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을 그려 보이는 스티비 원더의 대표적 고전 「Superstition」「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가 바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Superstition」이 본 앨범에서 가지는 절대적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노래는 앨범의 발표 직후 나온 첫 싱글이었고, 「Fingertips」(63년) 이후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9년 만에 회복시켜주었으며, 드럼 소리에 이어 나오는 클라비넷 리프는 이후 클라비넷이란 악기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주 중 하나가 되었다.

먼 나라 한국에서도 곡이 발표된 지 20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 박진영, 김건모 등이 각각 「Kiss me」(98년), 「Kiss」(2008년)에서 동일한 클라비넷 리프를 구사한 것만 봐도 「Superstition」이 가지는 넓고 지속적인 영향력은 충분히 입증된다. 흑인 음악 키드들의 오랜 동경의 대상이랄까. 록 잡지 『롤링 스톤』에선 이 곡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 ‘74위’에 꼽았지만 이건 단순히 숫자와 랭킹만 가지고 논할 성격은 아니다.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커버한 록 버전은 그의 대표적 명곡이 되기도 했으며 (본래 「Superstition」은 역시 블루스 계열의 기타리스트였던 제프 벡(Jeff Beck)에게 돌아갈 뻔했다) 소울의 ‘천재’라 불리는 스티비 원더의 숱한 대표곡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손꼽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Superstition」의 뚱땅거리는 펑키 리프와 경쾌한 브라스 섹션에 맞춰 흑인 음악 그루브를 입문한 사람이 아마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Superstition」이 펑키 그루브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면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는 팝 영역에서의 정점이었다. 시작하는 첫 선율부터가 팝송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 수 있는 친숙한 것일 정도로 스티비 원더의 작곡 능력과 그것을 200% 발휘하게 만드는 출중한 노래 실력은 정말 탁월했다. 노래는 역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래미 시상식은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에는 ‘최우수 남자 팝 보컬’ 상을, 「Superstition」에는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최우수 알앤비 노래’ 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74년에 스티비 원더는 로 생애 첫 그래미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연이어 발표한 두 개의 앨범 모두 연속으로 ‘올해의 앨범’ 상을 거머쥐는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대기록을 수립한다. 실로 경탄할 만한 위업이었다.

스티비 원더의 전성기 명작들은 이미 당대에도 찬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은 그 찬란한 시절의 중심에 있었다.

스티비 원더 (1973)

“그의 아버지는 며칠을 14시간 동안 일하지, 하지만 1달러도 벌지 못하지, 그의 어머니는 바닥을 닦으시지, 그러나 그녀는 1페니도 벌지 못하지, 겨우 살아가, 간신히 도시 속에서 살아가. (중략) 그녀의 남동생은 똑똑하지, 그리고 그는 남들보다 센스가 좋아, 그는 인내심이 많지, 하지만 그는 곧 아무 것도 못 가질 거야, 직업을 구한다는 건 마치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아, 왜냐면 그가 사는 곳은 유색 일꾼들은 쓰지 않기 때문이야, 겨우 살아가, 간신히 도시 속에서 살아가” (「Living for the city」 중에서)

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사’다. 꼭 사회적 메시지를 설파한 앨범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록 평론의 관행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앨범 전체에 깃든 약간의 진중하고 어두운 분위기, 그리고 한껏 목청이 올라간 ‘센’ 스티비 원더의 보컬 스타일도 대부분 자신이 표현하고자 했던 가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미국은 젊은 청춘들의 ‘이상’으로 들끓어 올랐지만 그 이상에 대한 열망은 현실이 주는 비탄한 공허함에서 기인한 것이 분명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인종 차별에 참다못한 흑인들은 거리로 나와 행진했다. 이때 탄생한 곡이 바로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Respect」(67)다. ‘존중’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래는 흑인들의 인권을 흑인 스스로가, 그것도 여성이 외친 가장 위대한 정치적 흑인 찬가였다.

스티비 원더는 그러나 같은 흑인 가수면서도 이런 눈앞의 현실에 내내 침묵했다. 소속 레이블이었던 모타운의 경영 방침이 대중성에 맞춰져 있었고, 가수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용납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 스티비 원더는 재계약을 통해 ‘창작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보장받았고, 에서 음악적 실험과 변신을 시도한 뒤, 마침내 메시지 측면에서도 과감히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그게 바로 다.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레이블 동료이자 11살 형이었던 마빈 게이의 영향이 컸다. 그는 스티비 원더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들어 모타운과 재계약에 합의하고 창작의 자율권을 따낸 뒤 반(反) 모타운적인 신(新) 영역을 개척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최고의 성과가 바로 이었다. 앨범은 베트남 전쟁, 흑인들의 어두운 삶, 환경 문제, 마약 문제 등, 당대가 직면한 사회적 현안을 아련한 선율로 진혼하는 앨범이었고, 이 컨셉과 그에 대한 뜨거운 찬사가 막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스티비 원더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프린스(Prince),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등에 이르기까지 흑인 음악의 전 역사를 아울러 ‘현실 참여 음악’에 있어 절대적 참고서가 되고 있는 이 앨범을 당시 23살이던 스티비 원더는 재빨리 흡수해 자기만의 버전으로 만들어냈다. 이것 또한 명작이었다.

「Too high」, 「Don't you worry about a thing」은 마약 사용에 대한 노래이며, 「Higher ground」는 죄악의 세상을 만들어 낸 우리의 어두운 이면을 종교로 맞설 수 있다는 신념을 설파했다. 「He's misstra know-it-all」은 닉슨 정부 하의 세태를 향한 비판적 성토, 「Living for the city」는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고 구조적으로 차별이 고착화되어 있는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날카롭게 파고든 냉소적 서사시다.

자칫 어둡게 흐를 수도 있었을 이 앨범을 그러나 스티비 원더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팝 앨범으로도 만들었다. 「Higher ground」의 생동하는 펑키 그루브는 「Superstition」과 함께 일렉트로닉 펑크의 정점이 되었고, 「He's misstra know-it-all」의 세련의 극치를 달리는 선율, 「Living for the city」의 점층하는 대곡 구성 등은 음악적 측면에서도 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앨범은 냉정히 말해서 대중적이지 않다. 하지만 「Too high」의 정형적 진행을 깨고 나오는 초반부 스캣 속에서, 「Visions」의 몽롱한 기타 연주 속에서, 「Living for the city」의 당시로선 파격적인 신시사이저 연주 속에서, 우리는 이미 이 앨범이 얼마나 우리 삶에 친숙하게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 된다.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것들이다.

앨범은 197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후 나오는 2개의 앨범들 역시 연속으로 그래미 ‘올해의 앨범’ 상을 수상한다. 앞으로도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롤링 스톤』은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스티비 원더의 앨범들 중에서도 바로 이 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 선정에서 가장 높은 순위인 23위에 올려놓았다.

스티비 원더 (1974)

흔히 스티비 원더를 대표하는 곡이 「Superstition」「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Sir Duke」「Higher ground」 등이기 때문에 그는 펑키하고 밝은 노래를 부르는 대중적 히트 가수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앨범을 차분히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편인 사람이라면, 특히 와 이 앨범 (이하 FFF)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동의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에서 싱글로 발표된 곡은 무그 신시사이저와 클라비넷의 역동적인 펑키 비트가 빛나는 「You have done nothing」과 「Boogie on reggae woman」이다. 하지만 이 두 곡을 제외하면 더 이상 ‘신나는’ 곡은 없다. 나머지는 한숨과 센티함이 공존하는 몽롱한 팝 넘버들이 주를 이룬다. 사실 「Too shy to say」「Smile please」 등에서 발견되는 이런 무드야말로 스티비 원더가 이후 계속 추구해온, 그리고 “스티비 원더 표 발라드는 과연 무엇인가?”를 물을 때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Yester-me yester-you yesterday」보다 먼저 내놓아야 할 그의 공인된 음악 스타일이다.

사실 그는 진지할뿐더러 신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앨범의 커버 사진을 보면 스티비 원더가 주로 다루는 악기인 피아노의 건반들이 계단을 이루며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은 에서 죄악의 세상과 맞설 수 있다고 말한 「더 높은 곳(Higher ground)」이며, 신이 있는 곳이고, 이상향이 거주하는 곳이다. 이 하늘은 몇 겹의 구름과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야 할 만큼 현실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Heaven is 10 zillion light years away」), 스티비 원더는 이것을 음악의 계단으로 이어놓았다. 여기서 현실 참여, 음악, 신이 하나로 묶여 있는 스티비 원더의 음악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인간의 악한 본성에 의해 부패하고, 불평등해졌지만 이는 신의 사랑이 우리를 정화시킴으로서 해결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을 스티비 원더는 음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음악의 필수 요소이며 인간의 악한 본성에 속하지 않는 ‘사랑’을 얘기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지만, 는 그가 발표한 앨범들 중 가장 진중하고 낮게 깔린 무드를 가졌다고 평가된다. 앨범의 발표 직후 나온 『롤링 스톤』의 1974년 리뷰에서, 평론가 켄 에머슨(Ken Emerson)은 이 앨범이 “전작들에 비해 덜 펑키하다”며 “이 주로 여인의 사랑을, 가 인간성의 사랑을 다루었다면, 는 신의 사랑과 관계가 있다”고 평했다. 신앙 간증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자 올바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고독한 길임을 토로하는 「They won't go when I go」에서 이런 분위기는 절정을 이룬다.

이 앨범에서 백 보컬과 세션 출신으로서 이후 빌보드 차트 정상을 밟은 뮤지션이 무려 3명이나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라운 사실이다. 「Smile please」와 「Please don't go」의 기타는 1983년에 영화 <플래시 댄스>의 삽입곡 「Maniac」(1위)을 대히트시킨 마이클 셈벨로(Michael Sembello)의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을 꼽으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Lovin' you」(1위)의 주인공 미니 리퍼튼(Minnie Riperton)은 「Creepin'」에서 백 보컬을 맡았다. 1984년에 영화 <풋루즈>에 삽입되어 크게 인기 있었던 「Let's hear it for the boy」(1위)의 주인공 데니스 윌리엄스(Deniece Williams)도 「Smile please」, 「It ain't no use」을 포함해 4곡에서 백 보컬을 맡았다. 신은 자신을 사랑한 스티비 원더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스티비 원더 (1976)

이 앨범은 스티비 원더의 가장 널리 공인된 명반이며, 나아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다. 2LP, 총 17곡(EP 제외), 도합 87분이란 이 방대한 분량 속에는 실로 ‘명반의 기준’이라 불러도 될 만큼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드높은 성취들이 가득하다. 재즈, 소울, 펑크, 라틴, 클래식, 전자 악기들을 모두 아우르는 놀라운 장르적 다양성, 이것을 한 곡당 7, 8분 길이임에도 인기곡으로 만들어내는 극도로 능숙한 대중성, 그러나 결코 잃지 않는 작곡의 기품과 일급 연주들, 내용 측면에서도 사랑은 물론 가족, 사회, 신념, 거장에 대한 존경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아우르는 폭넓은 감수성까지. 실로 경이의 앨범이요, 대중음악의 경지다. 엘튼 존(Elton John)은 이 앨범을 두고 “난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를 복사해 가지고 간다. 나에겐 이것이 역사상 최고의 앨범이며, 들은 후엔 늘 감탄에 빠진다”고 열렬히 찬사했다.

이런 역사적 명반이 음악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다음에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1975년 말, 스티비 원더는 미국 정부와 음악 산업에 대해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작별 콘서트를 준비할 정도로 심각히 은퇴를 고려했다. (1972) 이후로 1년, 혹은 그것도 안 되는 기간에 쉴 새 없이 명반을 쏟아내던 그가 (1974) 이후 2년 가까운 공백을 가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잠시 음악계를 떠나 있으며 대신에 훨씬 커다란 스케일로 돌아온 야심작이 바로 이 앨범이다. 그는 1975년 모타운과의 재계약 때 3천7백만 달러에 달하는 액수와 다시 한 번 완전한 음악적 자율권을 획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 싱글로 발표된 4곡은 모두 전설적인 명곡이 되었다. 첫 싱글이었던 「I wish」(1위)를 필두로,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죽음을 기리며 (앨범의 출시 2년 전인 1974년에 작고했다)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Sir Duke」(1위), 8분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라틴 댄스의 금자탑 「Another star」(32위),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과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가 1999년에 리메이크해 다시 주목 받은 「As」(36위)는 팝 팬이라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상식이자 가장 널리 애청된 흑인 음악 싱글들이다. 싱글로 발표되진 않았어도 딸의 탄생을 기뻐하며 만든 「Isn't she lovely」는 저절로 라디오 전파를 타며 그의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었고, 「Pastime paradise」는 영화 <위험한 아이들>의 주제곡 「Gangster's paradise」에 샘플링되면서 훗날 그 가치를 재평가 받았다.

‘삶의 조(調)’로 쓰인 이 앨범은 발매 당시부터 초유의 관심을 이끌어내며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데뷔, (미국인이 발표한 앨범으로는 최초였다), 13주 연속 1위, 1천만 장 판매, 나아가 에 이은 연속 3번째 그래미 ‘올해의 앨범’ 수상까지 달성한다. 바로 전 해의 수상자인 폴 사이먼(Paul Simon)은 수상 소감으로 ‘스티비 원더가 올해 앨범을 발표하지 않아 고맙다’는 요지의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 앨범을 끝으로 그의 5대 명반 시기는 막을 내리지만, 무려 5장의 앨범 동안 꾸준히 최정상의 기량을 거듭하다가 이내 2장 분량의 거대한 화룡정점을 찍은 이 앨범을 두고 음악인들, 특히 알앤비 뮤지션들은 그들이 가장 사랑한 앨범이자 가장 닮고 싶은 앨범으로 끊임없는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들어도 여전히 세련되고 경이롭다.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명작이란 바로 이런 걸 가리킨다.

글 / 이대화(dae-hwa82@hanmail.net)
 
#스티비 원더
1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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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2.03.31

스티비 원더의 노래에는 감성이 충만하게 녹아들어 있는 곡들이 제법 많은 편이지요. 물론 국내에서도 그의 곡중에서 적지않은 곡들이 아직까지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실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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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3.21

스티브 원더라는 이름만큼은 들은 적 있고 유명한 천재가수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한번도 음악 들어본 적 없는 거같아요. 물론 이 사람에 대해서 이토록 천재일 줄도 몰랐고요. 언젠가 시디 사서 들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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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2010.04.06

후크 송이나 음원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는 요즘 우리 음악시장을 보면..이런 명반이나 뮤지션이 탄생할 수 있을까 싶어요. 요 며칠새 MP3에 수록할 곡을 고르는 중인데 스티비 원더 곡도 몇곡 넣을 작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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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