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히어로를 기다리며 - 『1984』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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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984』를 읽었을 때 나는 생활에 지친 중년 노숙자가 쓴 판타지 소설인 줄 알았다.

과학 문명의 폐허 인더스트리아 섬이 나오는 <미래 소년 코난>, 사람의 선악을 파악할 줄 아는, 소년의 슬픔을 가진 로봇이 나오는 <아톰>, 미래에서 우리를 구해주러 올,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아들과 인간 저항군, 눈을 부릅뜬 채 녹아내리는 터미네이터가 나오는 <터미네이터>. 화성에서의 기억과 한 줌 청량한 공기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토탈 리콜>. 세상을 지배하는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와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사이버 전사가 나오는 <매트릭스>. 인간적 우수에 젖어 죽어가는 리플리컨트(복제인간)가 나오는 <블레이드 러너>, ‘좋은 밤입니다.’라는 운명의 방송이 흐르던 2040년의 런던에 흐르는 공포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오는 <브이 포 벤데타>. 사랑하는 아들을 결국은 이 세상에 홀로 남겨둬야 하기 때문에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나오는 『로드』. 이 작품들은 모두 암울한 지구의 운명에 관심이 많다.

인간의 욕망, 핵전쟁, 3차 세계대전, 과학기술의 오용, 지구 온난화, 녹아내리는 빙하, 오염된 공기, 절대 권력, 다국적 기업, 재난, 자본주의…… 이 모든 것들이 힘을 합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세상 속에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의 우리는 마약에 취한 것만큼이나 몽롱한 시선을 교환하며 “혹시 당신이 저 먼지 구름을 뚫고 ‘더 따뜻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등장한 히어로? 왓치맨? 배트맨? 혹시 당신이 그 사람인가요?”라고 묻게 되는데, 갑자기 우리는 조지 오웰이 일찌감치 다른 카드를 내놨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중년의 판타지 작가도 몽상가도 아니요, 현인이었다.

‘4월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라는 첫 문장은 분명 지금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겠는데, 명심하라는 현인의 첫 번째 육성이다. 우리는 13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슬로건을 달고 있는 당의 최고 책임자 빅브라더스가 늘 주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의 직업은 일종의 공무원이다. 그는 과거에 대한 날조 행위를 담당하는 진리부에서 일하는데 당의 다른 파트로는 법과 질서, 억압과 사찰을 담당하는 애정부, 전쟁을 담당하는 평화부, 경제를 담당하는 풍요부 등이 있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고 패턴은 ‘이중 사고’라고 불리는데 그것의 특징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며 거짓말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사랑보다 더 큰 죄는 성욕이고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한다. 남녀의 섹스는 오로지 자식을 낳기 위한 한 가지 목적 외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가족 제도는 사상경찰의 확대 영역으로 자식은 부모를 밀고할 수 있고 그런 자식을 부모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이웃은 서로서로 감시하는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잘 아는 밀고자에 갇혀 지내는 신세다. 그렇게 고발된 사람은 구속 적부심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고 어딘가 모처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실종 처리된다. 진리부의 일 중 중요한 것은 과거 날조와 사전 편찬 작업인데 과거 날조는 진실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진실이란 게 과연 있었던가? 진실 자체를 의심하게 하며 결국 진실은 없다고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신조어를 만드는 사전 편찬의 주목적은 주로 형용사와 동사를 없애면서 사고의 폭을 좁히는 것이다.

빅브라더 체제 하에서 국가는 끝없이 전쟁 중인데 사람들은 전쟁의 이유는 잘 모른다. 그저 충성하고 환호하고 발을 구르고 눈을 부라리며 적을 증오하는 데 시간을 바친다.

영화 <1984>(1956)의 한 장면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빅브라더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는 늘 같은 꿈을 꾼다. 하나는 삼십 년 전,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서서히 가라앉는 배에 올라타 있었고 저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그와는 시선만 교환한다. 수백 길이나 되는 푸른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자기를 올려다보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커다란 눈망울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감정의 존엄성, 깊고 미묘한 슬픔, 부모 형제가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순수하게 서로 의지하던 시대가 그립다. 또 하나의 꿈은 들판을 가로질러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검은 머리의 여자에 관한 것이다. 꿈속에서 그녀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옷을 벗어서는 거만하게 옆으로 휙 던져버린다. 그녀의 몸은 아름답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욕망도 일지 않았다. 그는 사실 그녀의 알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가 보고 감탄하는 것은 그녀가 옷을 훌렁 벗어서 던지는 동작이다. 윈스턴은 우아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공기를 휙 가르는 그 팔 동작을 보면서, 이런 동작은 옛날에나 있었던 것이라고, 빅브라더와 당, 사상경찰마저 능히 무시해 버릴 만한 놀라운 팔 동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꿈을 꾸었을 때 윈스턴은 잠을 깨면서 셰익스피어라고 중얼거린다.

윈스턴 스미스는 서서히 당을 배신했다. 그 첫 번째는 일기를 쓰는 것, 이를테면 일기에다 그는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하는 것이 자유라고 써 놨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골동품 가게에 가는 것. 그는 거기서 오래된 노래 한 곡을 듣고 산호가 들어 있는 유리 문진을 산다. 그는 그것을 이백 년 전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오렌지와 레몬이여, 성 클레멘트의 종이 말하네
그대는 내게 서푼의 빚을 졌지
성 마틴의 종이 말하네

그대는 언제 빚을 갚으려나?
올드 베일리의 종이 말하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줄리아를 만난다. 그녀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모를 쥐여주고 마치 머릿속에 지도가 있는 것처럼, ‘기차를 타고 삼십 분간 달린 뒤 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꺾인 길을 따라 도보로 2킬로미터 가면 문설주 없는 문이 나와요. 그 문을 지나 들판을 가로 질러가다가 풀이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 덤불숲 사이의 샛길을 지나고 그러면 이끼 낀 고목 한 그루가 쓰러져 있는 곳이 나와요, 거기서 봐요.’라고 말한 뒤 정말로 둘이 만나고 초콜릿을 나눠 먹고 100미터 밖에서 나는 발소리도 다 들리는 곳, 큰 나무가 없어서 마이크도 숨길 수 없는 곳에서 개똥지빠귀 소리를 배경으로 꿈속에서 본 그대로, 상상했던 대로 재빨리 옷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장면은 아마 이 소설 전체를 통해서 가장 생기발랄한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줄리아와 그가 빅브라더의 체제에 저항하는 형제단에 가입한 뒤 체포된 뒤 벌어지는 고문, 조작은 『1984』 전체를 관통하는 빅브라더, 사상경찰, 통제, 전쟁, 권위주의, 전체주의의 이야기와 함께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기보다는 익숙한 신문 기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를 그렸는데 우리는 그가 그린 디스토피아의 모습에 놀라지 않고 이미 우리가 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란다. 『1984』는 소설가가 새로운 사실을 그려 넣어서 놀라운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수십 년 전 소설가가 그린 세상 속에 살고 있어서 더 놀라운 소설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몽상가, 철학자라기보다는 현인, 정치 풍자작가 같은데 이를테면 윈스턴 스미스가 어딘지 모를 곳에 끌려가서 당하는 일은 정확히 관타나모 수용소를 연상시킨다. 윈스턴 스미스는 전기 고문을 당하고 쥐에 얼굴이 물어뜯길 상황이 되고 약물을 투여받고 벌거벗겨지는데 관타나모 수용소의 죄수들은 엑스레이나, 로미오, 탱고 같은 이름의 수용소에서 거의 똑같은 일을 당한다(쥐 대신 개가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이미 유사 관타나모들, 온몸을 전선으로 칭칭 감고 있는 두건 쓴 죄수의 사진으로 유명한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사진을 본 일도 있다. 『1984』 속에서 고문의 이유는 ‘우리는 당신의 내면을 모두 쥐어짜 텅 비게 만든 뒤 우리가 원하는 것들로 당신의 내면을 채울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의 국가적 버전은 이상적인 국가를 재건하고 싶다는 명분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깡그리 초토화시킨 모습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맞을 듯하다.

『1984』의 사상경찰과 이웃과 이웃이 서로 감시하는 모습은 게슈타포나 헤르만 괴링의 돌격대, 구소련의 비밀경찰뿐만 아니라 9,11테러 이후 미국이 100만이 넘는 우편배달부, 계량기 조사원, 케이블 설치 기술자 등을 의심이 가는 사람은 보고하는 밀고자로 만들어버린 것, 근거 없이 이메일을 열어보거나 전화를 도청하는 것. 은행 거래 내역을 조회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애국법은 아예 서점직원, 도서관 사서, 의사 등도 사생활 보호로 분류되었던 개인정보를 국가에 넘기게 한다.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이라크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제시카 린치 일병을 람보처럼 용맹한 소녀로 만든 일, 아프간에서 미군끼리의 총격에 사망한 미식축구 선수 팻 틸먼을 격렬한 교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만든 일 등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래도 그중 가장 눈부신 최고, 하이라이트 중 하이라이트는 소위 말하는 부시의 착륙 작전일 것이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 종료를 선언하기 위해 작은 비행기를 직접 조종해 바다를 가로질러 USS 링컨호에 착륙하는데 대통령이 올 줄 몰랐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대통령은 공군 조종사 헬멧을 왼손에 들고 비행기 문을 열고 나온다. 그 뒤에는 ‘성취된 사명’이란 글자가 반짝 눈을 사로잡는데 (이라크전에서 숨진 미군의 수는 비밀로 할 뿐이고. 다행히 부시는 퇴임 즈음에 이 일이 임기 중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고백한 듯하다.) 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은 히틀러 선전 영화인 <의지의 승리>와 꼭 닮았다. <의지의 승리>에서 히틀러도 비행기 문을 열고 내려와 수많은 병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스타디움으로 가서 철 십자가가 세워진 가운데 연설을 한다. 우리도 『1984』에 나오는 적대자를 향한 ‘이 분간 증오’ 같은 시간쯤이야 얼마든지 간단한 교육용 프로그램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사회에 있다.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하루 일과는 감시 카메라에 담긴 한 편의 로드 무비라고 할 만하다. 영국의 감시 카메라 수는 국민 14명당 한 대꼴이다. 미국에선 3,000만 대의 카메라가 일 년에 40억 시간을 녹음하는데 그 녹음 분석 소프트웨어, 데이터마이닝 시장은 과거의 e닷컴처럼 가장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되었다. 신용카드, 휴대전화와 웹서핑은 감시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끝없이 추적당하게 도와준다. 단, 『1984』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가 소위 하이테크하게 감시당하는 동안에 오늘날의 국토 안보 산업 종사자들은 『1984』의 권력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 정도 아닐까 싶다.

조지 오웰
(George Orwell 1903~1950)
『1984』에서 당은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 『1984』 속에서 전쟁이야말로 계급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독특한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는 것 (즉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다. 전쟁은 점차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의 성격을 띤다)으로 설명되는데 현실 속에서 영국은 탄광 노동자의 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마가렛 대처 시절에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고 미국 역시 테러와의 전쟁, 이슬람 급진파와의 전쟁, 이슬람 파시즘과의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오래된 전쟁 등을 끝없이 벌이면서 그 전쟁 수행 도중에 국민들을 더욱더 순종적으로 만들고 사회를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미래의 어두움(에이즈나 조류 독감 같은 질병, 전쟁 등)에 기대를 거는 재난 기업 CEO 출신 정치인들이 장악하는 자본과 군사 프로젝트의 결합이 바로 오늘날 미국발 전쟁의 모습이다.

윈스턴 스미스가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산 오래된 유리 문진, 산호가 들어 있는 그 투명한 문진 덕에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탄생하는데 그 장면은 결국 윈스턴 스미스가 어떻게 살고 싶어 했는지를 알려준다.

윈스턴은 몇 분 더 누워 있었다. 방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밝은 쪽으로 돌아누워 유리 문진을 들여다보았다. 산호 조각보다도 유리 자체의 내부가 보면 볼수록 신비했다. 그것은 한없이 깊으면서도 공기처럼 투명했다. 유리 표면은 마치 그 안에 완벽한 대기권을 지닌 채 작은 세계를 둘러싼 하늘의 궁륭 같았다. 그는 유리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미 마호가니 침대, 접는 탁자, 벽시계, 판화, 심지어 유리 문진 그 자체까지 모두 함께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유리 문진은 그가 들어가 있는 방이고 산호는 그 결정체 안에 영원히 고정된 줄리아와 자신의 생명인 양 느껴졌다.

침대가 있고 텔레스크린이 없는 방에서 줄리아와 사랑을 나눈 윈스턴 스미스가 ‘옛날에도 이처럼 시원한 여름날 밤에 남녀가 옷을 홀라당 벗고 침대에 누워 욕정이 이는 대로 섹스를 하고 마음껏 이야기도 나누고 억지로 일어날 필요도 느끼지 않은 채 밖에서 들려오는 평화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가능했을까?’라고 생각할 때 창밖에서 빨래를 너는 노동자 아낙의 노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지만
언제나 잊을 수 있다고들 하지만
웃음과 눈물이 해를 거듭해
오늘도 내 가슴을 쥐어짜는구나


가 들렸다가 사라지고 다시 골목길의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노랗게 지는 해가 침대 발치를 비추고 줄리아는 옆에서 벌거벗고 잠들어 있는 이 장면은 보는 관점에 따라 무척 아름답기도 하고 또 무척 슬프기도 해서 결코 잊을 수 없다.

이 장면이 슬플 수도 있는 이유는 노동자 아낙네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빨래를 너는 동안 『1984』 속의 누군가는 감시당하고 끌려가고 고문당하기 때문인데, 그건 쓰나미가 몰려올 해안에 비치파라솔을 세우는 태국의 어부나 잠시 후 비상사태가 선포될 도시의 나이트클럽에 오토바이를 타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들어가는 젊은 아가씨, 옆 도시의 대학생들이 신나게 맞아 죽어가는 것을 모르고 풍작을 비는 축제를 벌이는 농민들, 슈퍼마켓과 헬스장, 영화관이 구비된 최첨단 미군기지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플레이스테이션을 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앳된 군인을 보는 것만큼이나 막막하다. 하이테크하게 살아가는 21세기의 우리들도 그 옛날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우리가 어떤 프로젝트 하에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 점에서 이미 우리 세상은 디스토피아 판타지 소설의 무대다.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를 감당 못해서 판타지의 슈퍼 히어로들의 가슴팍으로 뛰어가려는 우리의 앞섶을 붙잡고 은유 없이 직설로 가득한 문서 하나 넣어 준 셈이다. 그런 문서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필요로 한다. 『1984』는 이를테면 윈스턴 스미스의 ‘조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왜 어떻게 죽어갔나? 그는 어떻게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나?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낱낱이 보고된 사건 발생 보고서인데 그 조서를 읽는 우리의 대응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 혹시 아는가? 우리가 자신의 자질을 아직 발견 못 한 히어로 군단의 한 명일지도. 결국 조지 오웰이 내민 카드는 매트릭스에서 네오를 호출하는 전화처럼 우리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카드인데 우리는 행동할 때마다 속속 드러나는 다른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은 『1984』를 통해 디스토피아를 보여줬는데 우리는 거꾸로 무엇이 유토피아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이미 우리가 얼마만큼 디스토피아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빅브라더를 사랑했다는 윈스턴 스미스의 마지막 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

어쨌든 줄리아가 한 호흡에 후다닥 옷 벗는 장면은 언제나 신비롭다. 그리고 “당신은 살아있는 게 즐겁지 않나 보죠? 이건 나다. 이건 내 손이다. 이건 내 다리다. 하는 식으로 느끼는 게 좋지 않으세요? 저는 현실 속에 있어요. 확실하고 단단하게 살아 있다고요. 당신은 살아 있다는 게 좋지 않으세요?”라고 윈스턴에게 물으며 몸을 돌려 탄력 있는 가슴을 그에게 밀착시키는 것, 빵과 커피, 잼을 들고 흥분해서 뛰어오는 것, 기필코 하이힐과 실크 스타킹을 신어 보겠다고 하던 것. 바닥에 있는 먼지를 모아 네모 반듯하게 만든 뒤 비둘기 둥지에서 떼어낸 나뭇가지로 밀회의 장소로 가는 지도를 그리는 것, 군중에 몸이 밀리면서도 잽싸게 윈스턴의 손가락 끝을 꽉 쥐는 장면은 하나같이 잊을 수가 없다. 이런 모습들은 어떤 사회에서든 생기가 넘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고 젖 먹던 힘까지 내게 한다.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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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6.14

이 책 공상문학에서는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는 책이죠. 그런데도 아직 읽지 않았어요. 이 기사 보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이것도 사진이 막 짤려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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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2

지금 이 책 읽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제일 먼저 봤었는데, 그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 버렸죠. 1984도 처음부터 완전 빨려 들어갑니다. 올해엔 그의 에세이와 평전까지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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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2009.04.08

안녕하세요, 채널예스 담당자입니다. <정혜윤 PD의 옛날 영화처럼 보는 명장면>을 좋아하시는 독자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원래 4월 8일부터 다시 칼럼 연재를 시작하시기로 하였으나, 칼럼의 성격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자 <정혜윤 PD의 옛날 영화처럼 보는 명장면>은 4월 22일부터 새로운 제목과 조금 더 접근하기 쉬운 내용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정 PD님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여러분, 아쉬우시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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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저/<정회성> 역

출판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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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로 활동하였다. 1903년 6월 25일, 영국령 인도의 벵골 주 모티하리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사립예비학교에 들어갔으나, 이곳에서 상류층 아이들과의 심한 차별을 맛보며 우울한 소년시절을 보냈고, 장학생으로 들어간 이튼교에서의 학창시절 역시 계급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22년부터 5년간 미얀마에서 대영제국 경찰로 근무했으나 영국 제국주의가 저지르는 악마적 만행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 작가수업을 쌓았다. 유럽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작가가 되기로 한다. 파리와 런던에서 노숙자, 접시닦이, 교사,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속에서도 소설을 쓰고 서평과 에세이를 발표했다. 1933년에 파리와 런던에서 겪었던 생활을 바탕으로 한 첫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과 1935년 식민지 백인 관리의 잔혹상을 묘사한 소설 『버마 시절』이다. 이 시기부터 그는 죽음의 원인이 된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사회 정의의 문제에 민감했고,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그는 첫 소설 『버마 시절』에 이어 『목사의 딸』, 『그 엽란을 날게 하라』를 출간했고,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발표했다. 중·장년 시절에는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경찰관으로 재직했지만, 식민지배의 불합리성을 목격한 후 사직을 하고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빈곤한 생활을 겪다가 전체주의를 혐오한 그는 스페인 내전에 가담하여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체험을 기록한 1936년 『카탈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는 뛰어난 보도 문학으로 평가된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BBC방송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후 [트리뷴]의 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정치와 문학 분야의 논평을 정기적으로 썼다.그리고 2차 대전 직후인 1945년에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을 우화로 그린 『동물농장』으로 일약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아내를 잃고 자신도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1946년 스코틀랜드 주라 섬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전체주의의 종말을 기묘하게 묘사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년』을 집필하였고, 1949년에 출간되었다. 『1984년』은 전제주의라는 거대한 지배 시스템 앞에 놓인 한 개인이 어떻게 저항하다가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그 과정과 양상, 그리고 배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작품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전체주의의 극한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나라이다. 오세아니아의 정치 통제 기구인 당은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를 내세워 독재 권력의 극대화를 꾀하는 한편, 정치 체제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등을 이용하여 당원들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당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당원들의 사상적인 통제를 위해 과거의 사실을 끊임없이 날조하고, 새로운 언어인 신어를 창조하여 생각과 행동을 속박함은 물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욕까지 통제한다. 『1984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과 더불어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며, 이후 많은 예술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당의 통제에 반발을 느끼고 저항을 꾀하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혹독한 고문 끝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 '골드스타인'을 만났다고 자백하고, 결국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1984년』은 오웰을 20세기 최고의 영향력 있는 작가로 만들었다. 장르에 상관없이 언제나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글을 썼으며 소설, 에세이, 르포, 평론 등 70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1950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지 오웰의 47년간의 삶 중 시대적 배경은 전쟁으로 인한 평화가 무너지는 격변기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전체주의(집단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사상이 다변화되면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대표 언론가로 상징된다. ‘조지 오웰’은 21세기 새 시대를 맞이하여 199년 영국 BBC 조사한 ‘지난 천년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 3위’, 2008년 [더 타임스]가 선정한 영국 작가 50인의 2위로 선정되었다. 게다가 영문학에서는 ‘오웰주의’, '오웰주의자'라는 뜻의 Orwellism이나 Orwellian이라는 표현이 따로 있을 정도이니, 이 정도면 그가 서양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로 당대의 문제였던 계급 의식을 풍자하고 이것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으며, 또 일찍이 스탈린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서 다시 현대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악몽과 같은 전체주의의 풍토를 작품에 정착시켰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자신의 글 중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쓴 글들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의 나날』, 『목사의 딸』, 『엽란을 날려라』,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숨쉬러 올라오기』, 『고래 뱃속에서』, 『사자와 일각수』, 『동물 농장』, 『비판적 에세이』, 『영국 사람들』, 『1984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