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만만 하이힐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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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삶에 대한 태도는 너무 가벼우면 보잘것없게 느껴져서 참을 수 없고, 너무 무거우면 부담스러워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 중간쯤에서 서성이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색다르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개개인의 일상은 몸소 경험하고 스스로 창안해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림 공부를 하다 보니 기존에 의미를 지니던 것들이 우리 주변에 그 의미를 상실한 채로, 혹은 의미를 달리한 채로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내가 선택한 이 물건이 나에게 특별하다면, 그것은 단지 스타일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도록 그 스타일에 덧씌워져 온 겹겹의 의미 때문이 아닐까요? 그 의미들을 소소한 내 일상으로 끌어와 보면 어떨까요? 너무 가볍지도 않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말입니다.

*

여럿 모인 자리에서 모멸감 느끼는 발언을 들을 때가 간혹 있다. 소란스럽게 언쟁을 벌이기는 싫고, 그렇다고 꾹 참고 앉아있기도 싫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의자를 시끄럽게 밀고 일어나서, 귀에 거슬리게 뚜벅뚜벅 구두 발굽 소리를 내면서 나가야 한다. 내가 불쾌하다는 것을 구두 소리로라도 알려야 한다. 적막을 깨면서 걸어 나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다. 모두들 긴장할 것이다. 여기까지 상상해 보았다. 실제로 나는 싱겁게도 사뿐사뿐 슬쩍, 마치 화장실에 가듯, 밖으로 나간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내가 화난 줄 모른다. 내 구두는 가엾게도 마음껏 또각또각 소리를 내지 못한다. 평소에도 행여 발굽 소리가 지나치게 크지 않나 싶어 스스로 위축되어 있는 구두다. 소심한 주인을 만난 탓이다.

날카로운 뒤굽 소리를 내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신발은 하이힐일 것이다. 하이힐을 신으면 발걸음 소리도 유별나지만, 무엇보다 한결 높아진 시야로 인하여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적들이 조금은 만만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키가 작던 나폴레옹은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 좀처럼 말 위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부하들을 올려보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차고 대단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도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함을 나폴레옹은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즐겨 신던 신발은 일종의 하이힐이었다.

도판1.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그네 The Swing>, 1766, 캔버스에 유채, 81 x 64.2 cm,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려는 것은 지배자가 가진 속성이다. 지배자의 위상은 애정관계 내에서도 성립될 수 있다. 로코코 시대의 화가 프라고나르가 그린 <그네>를 보자. 그림 속의 여자 주인공은 지금 숲이 우거진 정원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고 있는 중인데, 눈으로는 앞쪽 나무숲에 숨어 있는 젊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여자가 두 남자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위치가 시사해준다. 그네를 타고 이 남자와 저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노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여자는 슬리퍼 한 짝을 벗어 마치 미끼를 던지듯 젊은 남자에게 날려 보낸다. 마치 신데렐라가 신발 한 짝을 왕자에게 남겨두고 온 것처럼……. 여자의 구두는 몸에 비례해서 볼 때 말도 안 되게 자그맣다. 그러고 보니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도 아무의 발에나 덥석 맞을 만큼 현실적인 크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림(Grimm) 형제가 쓴 원작에서는 유리 구두가 얼마나 작은지 묘사하기 위해 동화에서는 빠져 있는 다소 잔혹한 장면들을 동원시키고 있다.

“신데렐라의 두 언니가 유리 구두를 신어볼 차례가 왔다. 맏언니는 자기 방으로 구두를 가져가서 억지로 발을 끼워 넣어 봤지만 넓은 발가락이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도끼를 가져와서 발가락을 잘라버려라.’ 맏언니는 붕대를 두른 채 궁으로 들어갔으나, 스며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할 수가 없어서 들키고 말았다. 둘째 언니가 신어 볼 차례가 왔다. 이번에는 둔탁한 뒤꿈치가 들어가지 않았고, 둘째 언니 역시 뒤꿈치를 칼로 쳐낸 후 구두를 신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궁에서 쫓겨났다.”

비현실적인 재료와 크기의 유리 구두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신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 속 유리 구두의 존재는 신데렐라가 타고나게 비범한 존재, 이를테면 아주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제였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다시 <그네>로 돌아가자.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풍성한 정원은 로코코 그림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런 정원에서 귀족들은 다른 계급과 섞이지 않고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낙원을 꿈꾸곤 했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사랑의 유희 속에 젖어 사는 것이 그 시기 귀족들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그렇듯 비현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신었던 신발 역시 하이힐이었다. 하이힐은 구두 주인이 많이 걷지 않아도 되고 애써 일하지 않아도 되는 한가한 계급임을 드러내 주는, 작고 예쁘기만 할 뿐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신발이었다. 물론 그것에는 약간의 실용성도 개입되어 있다. 하수 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고 포장된 도로가 드물었던 시기에 귀족들은 고급 옷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욕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들의 스타일을 슬며시 샘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18세기 말엽 신분 사회가 무너지면서 힘을 가지게 된 시민계급은 귀족의 스타일을 자신들의 일상에서 과감하게 축출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마음속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다가 여자들에게로 특히 집중 투사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자들은 계급적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민과 여자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당시 여자는 시민의 머릿수에 포함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여자가 시민으로서 권리를 획득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어쨌거나 여자들은 계속해서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 그러나 하이힐의 속성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 높이, 그리고 귀족과 얽혀 있는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것에는 능력 면에서나 매력의 차원에서 독보적이고 싶은 지배자의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었느냐 신지 않았느냐의 선택만으로도 상이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이미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고 편한 신발을 신고 나왔다면, 그날만큼은 아랫사람들과 마음을 트는 편안한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심정을 노출시킨 것일 수 있다. 물론 당사자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신발을 골라 신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무의미하게 보이지 않는다.

도판2.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침실의 철학 Philosophy in the Boudoir>, 1947, 개인소장, 워싱턴.

하이힐은 그 상징성 때문에 주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파워 슈즈(power shoes)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침실의 철학>을 소개한다. 화면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 속 주인공은 내일 설레는 데이트가 있는지, 방에 원피스를 걸어놓고 탁자에는 하이힐을 올려놓은 채 옆에서 잠이 들었나 보다. 밤새 그녀의 옷과 구두는 각각 그녀의 몸뚱이와 발로 반쯤은 변해 있다. 물건이 주인에 대한 기억을 머금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주인이 물건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달라져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신발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마치 샤를 페로의 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평범한 고양이 한 마리가 단지 부츠를 신었다는 이유만으로 영주의 충실한 총사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종국적으로는 자기 주인을 진짜 영주로 만들어준 이야기처럼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하이힐도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세워준 적이 있었다. 언젠가 그것을 신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 위로 우뚝 선 가장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면접이 있던 날, 첫 강의를 하던 날, 그리고 왠지 주눅 들게 하는 사람 앞에 나설 때, 나의 파워 슈즈는 나를 자신감 넘치는 자로 새롭게 탄생시켜 주곤 했다.

반드시 하이힐이 아니어도 좋다. 지금 야심과 배짱이 필요하다면, 당신만의 파워 슈즈를 신고 허리를 똑바로 편 채 또박또박 걸어볼 것을 권한다. 허름하고 비굴하던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당당히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구두, 그 취향과 우아함의 역사
루시 프래트, 린다 울리 지음/김희상 역 | 작가정신 | 2005년 12월

영국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의 직물의상 분과 큐레이터들이 실무경험을 살려 집필한 구두의 역사에 관한 아름다운 책. 공들여 만든 수제화를 잘 찍은 이미지로 접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다.

어떻게 이해할까? 로코코
토마스 R. 호프만 지음/안상원 역 | 미술문화 | 2008년 7월

화가 프라고나르의 시대, 18세기 로코코 하면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이 떠오른다. 핑크빛이 도는 발그레한 볼, 로맨틱한 리본장식 드레스. 19세기 사람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과도한 양식이라며 경멸하던 로코코 시대를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새롭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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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

2008.09.16

셋째를 낳으며 하이힐은 포기했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이힐에 대한 미련과 추억은 포기가 안되네요.
세아이와 운동화가 나의 파워슈즈라 여기며
파워슈즈를 신고 허리를 세워 자신있게 살아가렵니다.
세번째 글은 언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주실 글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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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라면

2008.09.04

가끔 그런생각을 한적이 있다..내가 선택한 물건은 내 스타일이라구..내가 좋아하는것이라고...이글을 보니 아니였구나..어쩜 나도 샘내하면서 나도 모르게 따라하는 것은 아닐까....멋진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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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아는것이 아니다

2008.09.03

마그리트의 작품중에 이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마그리트는 뭔가 철학적이고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알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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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에세이스트이자 미술을 이야기로 쉽게 설명해주는 작가다. 처음에는 학술서 번역을 했고 그것을 계기로 신문과 잡지에 미술칼럼을 썼다. 그의 글을 읽으면 심부에 은근한 울림이 있고 이유를 알 수 없게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는 독자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그림으로 하는 마음 치유’라는 주제로 글을 써 10만 독자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2013 경향신문 뉴 파워라이터’로 선정된 그는 지금도 예리한 관찰력과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 섬세한 문체로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그림에, 마음을 놓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 『다, 그림이다』(공저) 『그림이 톡, 생각이 아하!』 『이미지로 생각해요』 『미감』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가 있으며, 조선일보에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를 장기 연재 중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덴버대학교에서 「로세티의 제인 모리스 초상에 관한 연구」로 미술사 석사학위를, 이화여자대학원에서 「빅토리안 회화의 인물상을 통해 본 근대 영국 사회의 특성」으로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원을 역임하였고 현재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