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을 신뢰한 게 불찰이었다. 그날은 마침 약 처방전을 끊으러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나는 잠자기 전, 항경련제를 먹는다. 뇌수술 받은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는데, 그날은 병원과 병원 앞 약국을 거쳐 서울 종로통에 위치한 ㄱ문고에 들렀다.
아툴 가완디(Atul Gawande)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김미화 옮김, 소소, 2003)은 내가 검색한 인터넷서점 어느 곳이든 지금 주문하면 내일이나 24시간 안에 받을 수 있다는 표시가 있었다. ㄱ문고 고객 검색대에서 책을 찾았다. 어이쿠, 드넓은 매장에 그 책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어쩌나!
아무리 24시간 안으로 책이 온다 해도 인터넷서점에 주문을 넣어 이튿날 책을 받는 건 무리였다. 더구나 내일부터는 주말이었다. 종로통의 다른 대형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ㄴ책방에 책이 있었다. 휴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책 읽는 도중, 두 쪽을 건너뛰며 두 쪽씩 네 번에 걸쳐 여덟 쪽이 뒷면의 글자가 비치는 파본인데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산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은 2007년 3월 펴낸 초판 14쇄다. 표지에 인쇄된 딱지로 알 수 있는, 그러니까 이 책은 올리버 색스의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소소, 한창호 옮김, 2006)를 떠올린다. 두 권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저자의 직업부터 저자가 직접 겪은 일을 풀어놓은 것이라는 점과 한국어판을 낸 국내 출판사까지 말이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둘 다 직접 겪은 일이긴 해도 올리버 색스의 책이 자신의 병상일기라면, 아툴 가완디의 책은 외과의 진료기에 가깝다. 나는 올리버 색스 편에서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리뷰하며 내가 겪은 일을 곁들였다. 이번엔 그때 못다 한 말을 약간 덧붙일 생각이다.
‘열어봐야 안다.’ “오늘날 우리는 MRI 촬영, 초음파 검사, 핵의학 검사, 분자적 검사, 그 밖에도 수많은 첨단 검진법과 기기로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맹장염인 듯한 병색이 완연해도 직접 몸을 열어봐야 그 여부를 확신할 수 있다.
뇌수술에 필요한 검사가 이어지면서 나는 점점 ‘악성’에 가까워졌다. 수술 예비단계의 검사결과가 정확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정확한 검사결과가 나왔다고 첨단검사기기를 탓한 일은 아니다. 몸 바깥에선 제아무리 용을 써도 몸 안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다. 이것은 의학의 본질적 측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학을 지식과 처치가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이루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의학은 불완전한 과학이며, 부단히 변화하는 지식, 불확실한 정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들의 모험이며, 목숨을 건 줄타기다. 우리 일에는 과학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또 습관과 직감, 때로는 단순한 낡은 추측도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목표하는 것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꼬이게 만든다.” 이 책을 펴낼 즈음, 아툴 가완디는 8년간의 일반외과 훈련 막바지에 이른 외과 레지던트였다. 생각보다 경력이 일천하군! 젊은 의사로군! 그는 “레지던트는 독특하게 유리한 위치에서 의학을 바라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레지던트는 “내부자로서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에 개입한다. 하지만 동시에 새롭게 본다.” 또한 “레지던트 제도는 감독과 누진적 책임부과를 통해 잠재적 위험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덧붙인다.
나는 나를 맡은 교수팀의 수석 레지던트에게 가장 험한 말을 들었다. 수술을 위한 검사를 받기 위해 사흘간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이제는 환자도 자신의 병에 대해 알아야 한다며, 병명을 알려줄 테니 인터넷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으라고 했다. 나는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또 맨정신으로 1년을 살아야 할지, 멍청이로 10년을 살아야 할지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도 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수술을 안 하고 1년을 버틸 것인가, 아니면 수술이 잘못돼 심한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별것 아닌 듯해도 당사자에겐 한마디로 섬쩍지근한 선택의 갈림길이다. 어느 쪽도 그리 좋을 게 없다.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입원실로 오는 과정에서 엿들은 어느 간호사의 경솔한 언사는 이보다 덜 충격적이었다. 그 간호사는 내 침대차에 붙은 차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환자, 악성이네.” 그녀는 내가 자고 있거나 마취가 덜 깬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강한 ‘충격요법’이든가.
“수술실에서는 의식 없는 환자를 옮길 때 캔버스천을 씌운 롤링보드를 사용하고, 동작도 몇 차례로 나눠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서다.” 수술부위가 부위니만치 나도 물리적으로는 세심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간호사의 폭탄선언 한 방은 이에 대한 나의 고마움을 다 날려버렸다.
의과대학생 아툴 가완디는 직접 절개를 해본 그 순간 “외과의가 되고 싶어졌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외과의들은 묘한 평등주의를 고수한다고 한다. “그들은 연습을 믿지 재능을 믿지 않는다.” 외과의가 되려는 이에게 손재주는 부차적인 요소다. 또 “외과의들은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끈기는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연습, 연습, 연습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할 것은 완벽이 아니라 완벽을 향한 중단 없는 노력이어야 할 것이다.”
수련의가 혼자 집도하는 대상은 대체로 환자들 중에서 가장 힘없는 이들일 경우가 많다. 아툴 가완디는 “최상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환자의 권리는 의사의 수련이라는 목적보다 분명 상위에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만일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모두의 몫”이라는 일견 ‘물귀신 작전’을 편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나는 반발한다.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만 실험대상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그는 매우 현명한 원칙을 준비해뒀다.
“만일 학습이 필요하고 그것이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다들 요리조리 빠져나갈 것이고, 선택권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선택권은 연줄 있는 사람,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주어지고, 외부인들보다는 내부인에게 주어질 것이다. 말하자면 의사 자녀에게는 주어지지만 트럭 운전사 자녀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선택권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줄 수 없다면 아예 아무한테도 안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진료는 글쓰기와, 의학계의 어떤 활동은 출판계의 어떤 활동과 유사하다. 의료사고는 문필가로 치면 필화다. 그런데 필화와 의료사고의 원인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쫓김이다. 이로 인한 “서두름, 부주의, 피곤”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과정을 생략하게 되고 화를 부른다. 따라서 “의학은 뭐든 닥치는 대로 해내는 불굴의 의지를 요한다.”
아툴 가완디가 묘사한 미국 외과학회 정기총회 풍경은 마치 대규모 도서전시회 같다. “누렇게 바래 바스러질 것 같은 고서의 책장을 뒤적이며 나는 마침내 진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진짜 지속적인 가치가 있어 보이는 신약과 신기기, 도구들이 분명 있기는 했다.…고서판매 부스는 내가 경탄할 만한 가치 있는 뭔가를 찾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은 상식을 넓혀주기도 한다.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란 존재하지도 않는 패턴을 찾으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텍사스 명사수는 헛간 벽에 총을 쏘고 총알이 맞은 곳에 과녁을 그려 넣는다. 파라스케비데카트리아포비아(paraskevidekatriaphobia)는 13일의 금요일 공포증이다. 2000만 명 안팎의 미국인이 이 불안증에 ‘시달린다.’
파라스케비데카트리아포비아는 우리로 치면 4자 기피증이다. 대부분의 병원은 4층이 없고, 병원이 있는 건물의 승강기 단추는 4층을 F로 바꿔 놨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 이웃한 아파트 단지에는 우리 집(704호)마냥 4로 끝나는 호수가 없다. 4호는 전부 5호다. 그런데 이웃 아파트 단지의 4자 기피는 일관성이 없다. 동수와 층수에는 4자를 쓰고 있다.
“의사들은 신체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만성통 환자를 보게 되면 잘 안 믿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만성통 환자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역시 병원에서 내가 호소하는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 의사를 여럿 만났다. 어렸을 때 더 그랬다.
“그 환자들은 병을 고쳐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것, 진짜라고 믿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중증 질환자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복귀한 나를 보러 밀려든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짜증 났다. 2인실의 말 많은 ‘파트너’ 역시 그랬다.
‘환자 노릇’은 착실히 했다. “믿고 따를 때와 자기 의견을 주장할 때를 현명하게” 분별한 건 아니다. 담당교수 회진시간에 병상을 꼭 지켰다. “사려 깊고, 자신을 염려해 주며, 게다가 때때로 수도 잘 쓰는 의사 앞에서 결국 의사가 권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는 환자들은 거의 없다.” 수술을 맡은 의사와의 첫 만남에서 내 수술은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직감을 존중할 뿐더러 선호한다. “우리가 직감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때때로 들어맞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공은 논리적 사고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좀 뭣한 감이 있으나, 그렇다고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만 할 수도 없다.”
글을 쓰다가 안 풀릴 때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술술 풀린다. 그럴 때 나도 “바늘을 들어서 가슴을 찌르면 바늘이 지방층을 미끄러지듯 지나 뻑뻑한 근육층에 막혀 좀 고전하다가 다음 순간 미세하게 튕기는 듯하며 정맥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책 한 권의 리뷰든, 여러 권의 테마리뷰든, 어떤 주제의 출판시평이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늘 막막하다. ‘이걸 어떻게 쓰지? 잘 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럭저럭 써낸다. 도서평론가나 출판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이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가끔 칭찬도 듣는다. “우리의 노력으로 치료에 성공했을 때 아직도 때때로 나는 얼떨떨하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성과를 거둔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병원이 문을 닫지 않고 의사 노릇을 계속할 정도는 된다.”
근간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곽미경 옮김, 동녘사이언스, 2008)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속편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의료행위에 관한 이야기다.” 아툴 가완디는 먼저 손 씻기의 중요성을 거론한다. 병원 감염의 일차적인 매개체는 의료종사자들의 손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손 씻는 방법, 장난 아니다.
“우선, 온갖 박테리아의 온상으로 악명이 자자한 손목시계와 반지, 그 밖의 귀금속을 풀어놓아야 한다. 그다음, 따뜻한 수돗물에 손을 적신다. 팔꿈치 아래까지 비누를 묻혀 15~30초가량 제조업체가 써놓은 대로 비벼서 비누거품을 내고, 30초 동안 헹군 다음 깨끗한 일회용 수건으로 물기를 말끔히 제거한다. 그러고 나서 수건을 사용해 수도꼭지를 잠근다.”
환자와 새로운 접촉이 있을 때마다 이를 반복해야 한다. “사실 이 절차를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어서다. 그래도 아툴 가완디는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아마비 긴급퇴치에 나선 세계보건기구(WHO) 관계자에게 인도 남부의 소읍 시리굽파 주민 한 사람이 어째서 영양실조 퇴치 노력은 안하는지 따져 물었다.
세계보건기구 관계자의 답변은 궁색했다. 인도정부와 세계보건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굶어 죽을 지경인데 마비까지 되면 좋을 리 없지요.” 나는 샤프롱(chaperon)이 뭔지 몰랐다. 의사와 환자 간의 불필요한 시비를 막기 위한 진료 참관인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샤프롱은 간호사일 수도 있고, 환자의 보호자일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는 전편에 비해 약간 아쉽다. 속편은 전편만 못하다는 통설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사자가 줄어든 진짜 이유」가 큰 문제를 안고 있어서다. 미국의 두 번째 이라크 침략에서 미군 전사자가 1차 침략에 견줘 줄어든 까닭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 글에 드러난 ‘애국주의’는 몹시 거슬렸다. 아툴 가완디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바그다드의 제31전투지원병원 환자의 3분의 1은 이라크 부상자들이라고 하면서도 미군의 공격에 따른 엄청난 민간인 사상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전사한 미군 군의관을 영웅적인 개인 희생으로 떠받드는 건 그의 자유이나 내겐 설득력이 없다.
혹여 아툴 가완디의 ‘애국심’ 고취는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한 비백인의 ‘신원증명’은 아닐까? 최근 번역된 에이미 추아의 책은 이런 측면이 더 짙다. 중화(中華)주의와 아메리칸드림의 기이한 결합에다 친유대주의가 꿈틀거린다. 에이미 추아의 남편은 유대인이다. 하나씩 상대하기도 벅찬 마당에 셋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다. 에이미 추아를 포기한 이유다.
최성일
cellilion
2020.11.09
poe79
2020.11.06
갱이
20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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