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고의 과학 저술상' 수상자
『인간 없는 세상』은 비판적 책읽기의 대상으로 알맞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눈을 틔워 주기도 한다.
글ㆍ사진 최성일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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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스티븐 호킹의 주장과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의 『인간 없는 세상The World without Us』(이한중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은 극단을 달린다. 그래도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상상은 인간의 영역을 지구 대기권 바깥으로 확장하자는 제안보다 현실적이다.

우리 모두가 사라질, 그것도 당장 사라질 확률은 꽤 희박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물들은 다 남고 인간만 사라질 가능성은 더 희박하지만, 그래도 제로보다는 높다.

그렇다고 『인간 없는 세상』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이 책의 몇 가지 점들이 유감스럽다. 우선, 약 4만 8,000년 전 호주 대륙을 시작으로 인류가 신대륙에 발을 디딜 때마다 마주친 동물들이 멸종했다는 이른바 ‘전격전 이론’은 근현대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물귀신 작전’이다.

비판적 책읽기와 독자의 눈 틔워주기

‘전격전 이론’은 동물 전멸의 책임을 옛날 옛적의 원주민에게 떠넘긴다. 불도저로 북미와 남미의 숲을 밀어버린 개발업자, 숲을 개간한 농장주, 숲을 불태운 목장주 들과 땔감용으로 베어낸 농민들에게 균등한 책임을 묻는다. 그러면서 미국의 백인들이 자행한 버팔로 대량학살은 은근슬쩍 넘어간다.

나중에 유럽인의 질병이 대륙 전역에 퍼지면서 인디언들이 거의 멸절되자 버팔로가 급격히 늘어났다. 버팔로는 멀리 플로리다까지 퍼졌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이동 중이던 백인 정착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남겨둔 극소수를 제외하고 버팔로가 거의 다 사라지자 백인 정착자들은 인디언의 조상들이 태워놓았던 대평원을 잘 이용했다.

‘아프리카의 역설’ 또한 ‘원주민 책임론’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아프리카의 대형 포유류는 왜 아직 멸종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프리카에선 “인간과 거대동물이 함께 진화했기 때문이”고, “다행히도 아프리카의 거대동물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남는 적응력을 갖춘 형태를 나름대로 발전시”킨 덕분이란다. 과연 그럴까?

앨런 와이즈먼은 외국의 여느 환경운동가나 생태계 보존과 생물다양성에 관심 있는 학자들처럼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른 비무장지대(DMZ)를 낭만적으로 본다.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바로 그날인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남북 분단의 기원은 약간 허탈하다.

군사분계선의 정의는 잘못되었다. “군사분계선은 비무장지대에서 양측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한가운데 지점의 초소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선을 말한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그러니까 군사분계선(휴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있는 GP들을 잇는 선을 가리키는 용어는 딱히 없다. OP들을 연결한 선은 남방한계선과 일치한다.

그래도 비무장지대의 앞날에 대한 앨런 와이즈먼의 예측은 정확하다. 전쟁터를 평화공원으로 바꾸자는 DMZ포럼의 제안은 “달콤한 전망이다. 하지만 이미 DMZ를 넘보는 개발 세력들에게 먹혀버리기 쉬운 전망이기도 하다.” 평야지대인 서부전선과 철원 인근의 민간인통제구역은 진즉에 부동산 바람이 불었다.

나중에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 토지의 원소유자 후손들이 땅을 되찾으려는 요구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몹시 위험천만한 곳이 야생동물의 피난처가 되었다는 DMZ의 역설을 “특별한 행운”이라 하기에는 분단의 질곡과 그것이 남긴 상처가 너무 크고 깊다.

한편, 자발적인류멸종운동(VHEMT)에는 맬서스 『인구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앨런 와이즈먼이 인용한 이 운동의 창립자가 한 말이다. “적극적으로 번식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중국의 경우 출산율이 1.3퍼센트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매년 1,000만 명이나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근, 질병, 전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성장률을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이렇듯 『인간 없는 세상』은 비판적 책읽기의 대상으로 알맞을 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눈을 틔워 주기도 한다. 흙과 모래와 석회 반죽을 섞어 만든 콘크리트는 로마인들의 발명품이다. 마사이족의 전통 의상 ‘슈카’의 유래는 이렇다. “전통 의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19세기에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이 나눠준 특유의 격자무늬 담요가 시초였다.”

철(Fe)은 금속이자 비금속(卑金屬)이다. 철은 쇠붙이다. 비금속(非金屬)은 아니다. 비금속(卑金屬)은 귀금속에 대비되는 공기 중에서 산화하기 쉬운 금속을 통칭한다. 본뜻은 이렇지만, 비금속(卑金屬)은 귀금속보다 값싼 천한 금속이다. 스테인리스스틸도 산소와 짠물에 노출되면 삭기 시작한다. 여기까진 사소한 상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두 섬 모두 찌그러진 플라스틱 병, 폴리스티렌 부표 조각, 나일론 뱃줄, 라이터, 자외선에 분해된 온갖 상태의 고무,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병마개, 일본제 로션 튜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어진 무수한 플라스틱 조각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바다에 떠다니거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쓰레기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태평양에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북태평양 환류의 면적은 거의 아프리카 대륙에 맞먹는다고 한다.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와 조수가 바위를 모래로 만드는 작용이 플라스틱에도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플라스틱 입자들이 생태계에 끼치는 악영향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바다에 버려지는 것은 각국 정부의 관리부실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진 않다. “관리라는 말은 결국 가만히 두면 언젠가는 쓰러져 숲의 거름이 되어줄 거목을 베어내기 위한, 그리고 팔기 위한 입발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겹쳐 읽다

『인간 없는 세상』은 다른 책들과 겹쳐 읽을 수도 있다. 1978년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에서 메리 리키 팀이 발견한 것은 젖은 재에 찍혀 있는 350만 년 전 직립원인의 발자국이다(69쪽).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부모와 아이 것으로 추정되는 두 발자국을 실제로 볼 수 있다(『코스모스』 특별판, 680쪽).

『인간 없는 세상』의 348쪽부터 356쪽까지의 내용은 윌리엄 파운드스톤의 『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동녘사이언스)에도 나온다. 그런데 보이저 호에 탑재한 어딘가 있을 외계지적생명체에게 보내는 골든 레코드에 관한 두 권의 설명 가운데 서로 다른 내용이 있다. 『인간 없는 세상』에선 천문학자 프랭크 드레이크가 하드웨어 기술을 ‘개발’(?)한 것으로 나온다.

드레이크는 디지털미디어가 유행하기 이전 시대에 이미 금을 입힌 구리로 만든 30센티미터의 아날로그 디스크에다 소리와 이미지를 함께 기록하는 법을 고안해냈는데, 거기에다 축음기 바늘을 달고 가능하면 작동법을 알려주는 그림을 함께 넣어주기로 했다. (349-350쪽)

반면, 『칼 세이건: 코스모스를 향한 열정』에선 “그림을 LP판에 집어넣는 장치”를 사용하여 앞의 작업을 실행한 기술자가 등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도 프랭크 드레이크가 그림들이 축음기 레코드 홈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쓰고 있다.

드레이크는 고주파 텔레비전 신호를 저주파 오디오 신호로 바꿀 수 있는 기계를 찾고 있었다. 오디오 신호가 테이프에 한번 녹음되면 어떤 레코드 스튜디오에서도 그것으로 레코드를 만들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발렌틴 보리아코프라는 이름의 일급 하드웨어 해커를 데려왔다. 보리아코프는 갓 창업한 회사인 콜로라도 비디오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설립자들은 사람들이 앞으로 언젠가는 텔레비전 그림들을 전화선으로 보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 신호를 오디오 신호로 바꾼다는 뜻이다. 그들은 최근에 그것을 위한 장치를 설비하였고, 또한 레코드를 도울 마음도 있었다. (434-435쪽)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는 지금보다는 한결 평온할 것이다. 가까운 사례를 든다면, 적어도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인하여 바다와 바닷가가 오염되고, 거기에 사는 생물들이 떼죽음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유조선 옆구리가 찢어져 유출된 엄청난 양의 원유를 덮어쓴 바닷가에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이 물결을 이뤘다.

그들의 봉사정신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시민들이 나서서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래는 미국의 언론운동 활동가 셸던 램튼과 존 스토버가 공저한 『거짓 나침반』(정병선 옮김, 시울, 2006)에 인용된, 보수적인 어느 논평가의 논평을 확증하는 홍보업계 저술가의 발언이다.

기름을 뒤집어 쓴 후에 ‘구조된’ 거의 모든 새가 결국은 죽는다. 정화 작업의 주요 목표는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대개 상징적인 조치일 뿐이지만 기업이 환경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작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있으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에서도 사고 당사자들이 이 원칙(=오염자부담원칙)을 회피하기 위해 분주하다고 한다.”(<한겨레> 2007년 12월 18일자 34면)

탐욕적 생활방식에 대한 경고

“1년에 상어가 사람을 15명 정도 공격한다면, 인간은 상어를 1억 마리씩 잡고 있습니다. 정정당당한 싸움은 아니지요.” (보존 해양생물학자 엔리크 살라)

“게놈 수준에서 볼 때 산호와 우리의 차이는 적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곳에서 왔다는 분자 차원의 강력한 증거지요.” (미생물학자 포레스트 로워)

『인간 없는 세상』“너무도 탐욕적인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경고다. 탐욕적이고 거만하며, 때로는 심한 엄살까지 부리는 우리가 과연 타성에 젖은 생활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대오 각성한다면 모를까, 나는 극히 회의적이다. 『인간 없는 세상』은 꽤 읽을 만한 책이다.

『가비오따스』(황대권 옮김, 월간말, 2002)에 대해선 박병상 선생의 서평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박병상의 「남미 오지에 건설한 이상주의자들의 공동체」는 시민에게 권하는 100권의 환경책 서평 모음집 『환경책, 우리 시대의 구명보트』(환경과생명, 2005)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자연의 원금을 축내지 않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에 대한 취재 보고서나 무미건조한 기행문이 아니다. 아마존 열대우림이 안데스 산맥과 이어진 해발 3,000미터의 고원, 생활 기반은 물론 도로도 제대로 개설되지 않은 오지 중의 오지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가고자 의기투합한 이상주의자들의 힘겹지만 아름다운 시행착오의 경험담이다. 환경 문제에 천착하는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발품을 팔아 썼고 농업 중심의 생태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황대권이 옮겨서 그런지, 전하는 메시지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해 함께 고민하고 안타까워하게 만든다.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미국 #저술상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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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ㅎ

2008.01.12

겹쳐 읽기는 잘 이해 안되지만,;;; 인간 없는 세상을 비판하면서 읽는것은 이해가 잘되요^ ^
논술쓸때 좋은 자료가 될수 있을것 같아요^ ^
탐욕적 사고방식을 보니 이 책이 생각나네요.
<나무위의여자>라고..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이라는 젊은 여성 환경운동가가
나무위에 올라가서 사는 생활을 담은 책인데 재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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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