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누가 왕을 죽였나』를 읽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 1998)라는 제목으로 초간되었다가 최근 제목을 바꾸어 재간된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 2005)은, 27명의 임금 가운데 독살설에 휘말린 8건의 사례를 연구한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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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이덕일의 『누가 왕을 죽였나』(푸른역사, 1998)를 읽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 1998)라는 제목으로 초간되었다가 최근 제목을 바꾸어 재간된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 2005)은, 27명의 임금 가운데 독살설에 휘말린 8건의 사례를 연구한다. 그 가운데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영명한 학자 군주로, 왕조 중흥의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22대 정조대왕도 들어 있다. 저자는 “‘만약 정조가 10여 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면서, 그의 사후 전개된 극단적인 수구 정치가 조선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수구파에게 독살된 절대 계몽 군주라는 ‘정조 신화’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이인화이다. 그가 쓴 『영원한 제국』(세계사, 1993)은 오늘의 선진화된 유럽 국가는 봉건시대 말기에 하나같이 강력한 절대왕정기를 거쳤다는 사관史觀 아래, “홍재 유신이 실패함으로써 우리 민족사는 160년이나 후퇴했다. 우리의 불행은 정조의 홍재 유신 대신, 박정희의 10월유신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정조 독살설에 정조의 개혁 군주 상像이 겹쳐 있기 때문에, 이 음모론은 자세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사전처럼 곁에 두고 보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가운데 제15권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한길사, 2001)는, 정조 사후 꾸준히 나돌았던 독살설을 노론 벽파에게 오랫동안 소외되어 울분에 빠져 있던 영남 남인과 일부 소론이 지어낸 것이라며 배척한다. 또 이보다 앞서 출간된 박광용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 역시 동일한 해석 끝에, “정조가 절대 계몽 군주를 지향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독살설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닭은 “계몽 군주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신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특징”이므로 “이런 군주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최홍규의 『정조의 화성 건설』(일지사, 2001)이 좋은 예이다.

유봉학의 『정조대왕의 꿈』(신구문화사, 2001)은, 정조 독살설이 솔깃한 까닭이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던 원인”을 통속적으로 해명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근대로의 개혁이 과단성 있는 지도자 정조 한 사람에 의해 진행되다가, 독살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지도자가 시해되자, 이후 그가 추진한 근대로의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는 정조 독살설은, 전근대적 영웅 사관에 입각하여 개발 독재마저 용인해 주는 논리도 된단다.

정조의 정치와 개혁 정책에 관한 가장 폭넓고 냉철한 평가는 박현모의 『정치가 정조』(푸른역사, 2001)에 기술되어 있다. 따로 또 한 편의 독후감이 필요한 이 책은, 독살설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과로와 조로화早老化”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정조가 죽던 재위 24년째 대왕은 “연신筵臣 중에 나와 나이가 같은 자는 소년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정력이 이러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피폐해진 육신을 슬퍼했다.

실제로 스물다섯에 왕위에 오른 준비된 왕 정조만큼 오랜 재위 기간 동안 경장(更張: 개혁)에 공을 쏟은 왕은 없었다. 하지만 “경장 반대 세력의 움직임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여 본격적인 경장을 추진하지 못”했으며, “때를 틈타 좀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것은, 정조의 학문적?정치적 역량을 고려해 볼 때 대단히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정조가 애써 이룬 경장책은 그의 사후 정권을 차지한 세력에 의해 ‘말짱 도루묵’이 되었고, 더욱 나쁜 것은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공론 정치)도 따라서 무덤에 묻혔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정조 사후 63년간 지속된 세도정치가 사실상 영?정조 시대에 배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정조의 왕권 강화 정책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 이념인 붕당정치를 파괴했다. 유봉학에 의하면 정조 대의 사대부와 각신들이 수구로 몰리면서까지 정조를 따르지 않은 것은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점, 조선조의 붕당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 주는 한편, 근대를 맞이하기 위해 절대왕정기가 ‘필수 코스’라고 믿어 온 우리들의 서구 중심주의를 재고하게 해 준다. 오늘의 관점으로든 당대의 관례로든, 사대부들보다 정조가 오히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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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7
장정일 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07월
‘독서일기’라는 제목으로 1993년부터 꾸준히 출간되어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일곱 번째 권. 이번에는 2003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87편의 독서일기를 추려 담았다. 일곱 번째 독서일기에서 장정일은 에세이를 포함한 문학 분야 40권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예술과 동서양의 역사,정치,인물을 포함한 인문 분 44권, 과학과 실용 분야로 분류되는 3권 등 총 87권의 도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랜덤하우스 코리아와의 제휴에 의해 연재되는 것이며, 매주 수요일 총 2개월 간(총 8편)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나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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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5.16

제목을 보고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겠다고 생각했는데 좀 철학적인 데가 있네요. 정조는 높게 평가된 분이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그 때문에 독살설은 일종의 바램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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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whale

2007.10.23

게다가 정조의 개혁이 '계몽 군주'로서의 개혁이 아니라고 해도 수구세력을 압박한 이상 독살설의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죠.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제기는 독살설의 부정이 아니라 정조가 '왕권강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명제에 집착했기 때문에 '계몽군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로군요. 흠... 정말 흥미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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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whale

2007.10.23

오오, 흥미로운 문제제기로군요. 하지만 [계몽 군주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하고 신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특징”이므로 “이런 군주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의 논리는 좀 조야한데요. 박광용의 원문을 읽어봐야 알겠습니다만 본 칼럼의 다른 부분과도 좀 따로 노는 듯 하여 지적해보았습니다. 계몽 군주란 필연적으로 개혁 군주이고 개혁을 저지하는 수구세력과 부딪히기 마련인데 신민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수구세력과 갈등을 빚지 않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저 논리대로라면 수구세력과 갈등을 빚지 않아야 계몽군주라는 괴이쩍은 결론을 가져오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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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어린 시절의 꿈은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다섯 시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었다 한다. 책읽기는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학교를 싫어했던 그는 삼중당문고를 교과서 삼아 열심히 외국 소설을 독파했고, 군입대와 교련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핑계로 드디어 1977년 성서중학을 끝으로 학교와의 인연을 끊는다. 그러나 1979년 폭력범으로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그는 학교와 군대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세상에서 가장 몹쓸 지옥인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하얀몸」을 비롯한 그의 시의 바탕이 된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겪은 그는 박기영을 스승으로 삼아 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마침내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였고, 1987년에는 희곡 「실내극」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극작활동도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발표하면서, 지금껏 문단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던 '장정일'이라는 '불온한 문학'이 드디어 '중앙'에 입성했음을 알린다.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펠리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한 그는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 장편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를 연이어 발표하고 이 소설들이 모두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장정일'은 드디어 우리 문화의 뚜렷한 코드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발간한 후 그가 파리에 있는 그의 아내인 소설가 신이현을 만나러 출국한 사이, 한국에서는 외설시비가 일어나고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포르노로 규정받고 있던 그해의 마지막날, 장정일은 파리에서 자진 귀국하여 당당히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한다. 그러나 영화 <거짓말>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법원의 최종판결은 유죄. 그리고 또 한번의 구속으로 이어진다. 당시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강금실은 후에,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라는 책에서 당시의 장정일과 재판에 대한 글 <장정일을 위한 변명>을 썼다. 그 사이 한국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일본에서 발간되는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고, 그는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중국에서 온 편지』(1999)와 자전적 소설 『보트하우스』(2000)를 펴낸다. 그의 '독자 후기'를 모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5권까지 펴내며 그는 지금 대구에서 평생 소원인 책읽기와 재즈듣기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머리같이 쓸데 없는 데서는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모가 바리깡으로 직접 깎아주는 빡빡 머리와 헐렁한 골덴 바지 그리고 청색 면 티 차림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