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의 잔혹에 관한, 지극히 사실적인 풍속도, 『시구루이』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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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조 노리오가 원작을 쓰고, 야마구치 타카유키가 그린 『시구루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친동생 타다나가가 할복을 강요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수만 마리의 원숭이를 학살했다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 기괴한 소문이 자자했던 난폭한 영주 도쿠가와 타다나가. 하지만, 공식적으로 타다나가의 잔혹함을 알리는 기록은 하나뿐이라고 한다. 『스루가 다이나곤비기』에는 칸에이 6년 스루가성의 어전시합 기록이 남아 있다. 22명의 검객이 출전하여, 진검을 들고 승부를 겨루어 살아남은 자는 단 6명. 그중에 2명은 중상이었다. 참혹한 전국시대가 끝나고, 공식적인 진검승부가 허용되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대에 벌어진 끔찍한 살육이었다. 당시 어전시합을 반대하여 타다나가의 앞에서 할복자살한 신하가 둘이나 되었지만, 타다나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타다나가의 무모한 행사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사의 생명은 무사의 것이 아니라 주군의 것’이며 ‘주군을 위해 죽을 장소를 얻게 되는 것 또한 무사의 명예’라는 생각이 당시에는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 봉건시대는 자신의 야망이나 욕망, 혹은 단순한 쾌락을 위하여 휘하에 거느린 무사와 백성을 이용하는 것이 허용되는, 기묘한 시대였던 것이다. 전국시대가 끝난 후, 공식적인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지만 폭력적인 시대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래로 잠복하여 들끓고 있었다. 타다나가의 행동은, 그런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야만’이었다.

『시구루이』의 원작자인 난조 노리오는 『고성 이야기』 등의 작품을 통해 ‘잔혹스토리의 붐’을 일으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난조 노리오는 ‘잔혹’에 대해서 명확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아무 문제없이 일상생활이 평온하게 영위되고 있을 때, 잔혹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문제가 발생하고, 사회나 세상, 주변의 인간관계가 그 문제를 완화시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극으로 달렸을 때 드러나는 것이 잔혹이다.’ ‘나는 주로 역사소설을 써 왔지만, 예전의 사회에서는 잔혹이 드러나기 쉽다. 전국시대의 무장들처럼 대립을 완충해주는 조직이 없는 곳에서는 모두가 적대자와 직접 부딪쳐야 한다. 자신이 이기든지 적의 손에 죽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람들이 웃어른이나 동료들에게도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기 때문에 일단 그 균형이 깨지면 모든 것이 충돌하게 된다. 여러 감정들이 일시에 분출되고 극단으로 달린다. 잔혹해진다.’ 타다나가는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균형이나 안정 같은 것을 추구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주는 정치를 무시하고, 진검을 사용하는 어전시합을 벌이는 인간은 그러나, 평화시대에는 필요가 없다. 그래서 타다나가는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잔혹이란 것은 한편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문제가 없는 세계, 있어도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 인간들은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조용히 억누르려 하지 않고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인간, 감정을 극단으로 밀어내는 인간이다.’ 난조 노리오는 그런 소설을 썼고,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주변의 우려를 무시하고 ‘잔혹’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검객들을 압도적인 필력으로 그려낸다. 『시구루이』의 주인공은 진검 어전시합에 출전하여 대결을 벌이는 후지키 겐노스케와 이라코 세이겐이다. 어전시합에 나온 두 남자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한다. 외팔이 무사인 후지키가 과연 살을 베어내고, 뼈를 자를 수 있을까. 절름발이에 눈이 보이지 않는 이라코의 검이 과연 후지키에게 닿을 수 있을까. 하지만, 후지키의 엄청나게 발달한 등 근육과 기묘한 자세로 무명역류를 펼치는 이라코의 기세를 보면, 누구든지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두 남자는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돌아온, 잔혹이라는 글자를 온몸에 새긴 검귀인 것이다.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후지키와 이라코의 과거를 보여준다. 어전시합이 열리기 7년 전, 노우비 지역에는 신의 검객이라 칭송받는 이와모토 코간의 도장이 있었다. 이라코는 코간에게 도전하려고 도장에 들어가 후지키와 첫 대결을 펼친다. 이라코는 경혈을 눌러 기를 막는 골자술을 써 후지키에게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수제자인 우시마타 곤자에몬에게 패배하자 이라코는 코간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한다. 이라코의 목적은 단지 코간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창녀의 자식이었던 이라코는 엄청난 출세의 야망이 있었고, 입문 2년 만에 코간류를 통달할 재능도 있었다. 이라코는 코간의 데릴사위가 되어 가마를 타고 성에 들어갈 수 있는 무사가 되고, 이어서 천하를 제패할 꿈을 꾼다. 교활한 이라코는 코간의 데릴사위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코간의 첩 이쿠를 건드린 실수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다. 눈을 잃고, 한쪽 다리까지 못 쓰게 된 채 이쿠와 함께 떠나간 이라코. 하지만, 몇 년 후 이라코는 돌아와 코간의 제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후지키와 이라코의 승부는 아직 초반전이었던 것이다.

『시구루이』를 보면 몸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내장이나 검을 휘두르는 아찔한 순간의 육체의 아름다움, 즉 미와 추를 박력 있게 그려내는 묘사에 압도된다. 그로테스크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육체의 묘사에 빨려든다. 그리고 ‘무사의 길은 죽음에 미쳐가는 것이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은 시작된다’ 등등의 말이 의미하는 ‘잔혹’ 그 자체를 만나게 된다. 후지키와 이라코는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원했고, 그것이 무너진 순간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잔혹해져야만 한다. 잔혹하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이길 수도, 얻을 수도 없었다. 『시구루이』가 말하는 것은, 아니 보여주는 것은 남자들의 잔혹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가에 상관없이, 그들의 잔혹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남자의 감정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잔혹해졌을 때다. 남자도 부드러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연극적이다. 남자는 잔혹해졌을 때 그 본성이 나온다. 그래서 남자의 세계를 현실로 표현하려면 잔혹은 필수다.’ 『시구루이』는 남자들의 잔혹에 관한, 지극히 사실적인 풍속도다.

3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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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n414

2019.11.29

김하나님 인생책이 궁금해요!! 오은 시인님이 좋아하는 작가님이 누구인지 긍금합니다.
책읽아웃 작가님 소개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박서련 작가님과 손보미님. 흥미 있게 들었는데 어떤 스텝 분이 어떻게 조사해서 소개 하시는지 궁금해요 아주 재밌어요.
https://www.instagram.com/p/B46-tfFlnq6/?utm_source=ig_web_copy_link
숙박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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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re11

2019.11.28

책읽아웃 모꼬지 신청합니다 :)

1) 사랑, 마음, 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저는 2017년 첫 시작부터 매주 기다리며 책읽아웃을 들어왔어요. 순간순간 그 마음이, 그때의 순간이 기억이 나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2개의 방송이 있는데요. 이 내용을 너무 나누고 싶어요!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요. 책읽아웃을 듣는 동안 저에게 많은 생각의 변화가 있었고, 그것이 또 궁금해요. 책읽아웃을 하면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어떤 큰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요.

2) https://www.instagram.com/p/B5aWuqHJ_SV/?igshid=ribu2bm5o44l
2019 올해의 책은, 모두 책읽아웃에서 소개된 작가님 책 인것 같아요 :)

3) 숙박은 괜찮아요 :) 하지만 가능해도 좋아요! (서울입니다)

4) gregre11 / gre1231 (***앞으로 많이 남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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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

2019.11.28

책읽아웃 모꼬지! 신청해봅니다 :)

1. 책읽아웃에 출연하시는 진행자 분들 모두 굉장히 친해보이고 보기 좋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서로 많은 면을 알게 되었을 텐데, 처음 보았을 때의 첫인상과 알고보니 오해했던 점, 그리고 혹시 있었다면 서운했던 것과 고마웠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 https://www.instagram.com/p/B5aP2vOl4yz/?igshid=1guof1mg2yj8j

3. 보안여관에서 하룻밤을 한 번 보내보고 싶지만, 서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께 양보하겠습니다.

4. 올해 3월에 올린 리뷰가 있어요! ‘그냥’님이 소개하신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영업 당해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
https://www.instagram.com/p/BvYO4JjHcdG/?igshid=xzuoa3vd0h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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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루이 1

<난조 노리오> 글/<야마구치 타카유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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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글 쓰는 일이 좋아 기자가 되었다. [씨네21] [브뤼트] [에이코믹스] 등의 매체를 만들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소설, 만화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연스레 대중문화평론가, 작가로 활동하며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좀비사전』 『탐정사전』 『나도 글 좀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 등을 썼다.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 7, 8년의 프리랜서를 경험하며 각양각색의 인간과 상황을 겪었다. 순탄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통과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는 그 시기를 거치며 깨달았다. 직장인과 프리랜서 모두 쉽지 않고,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 월급도 자유도 결국은 선택이고, 어느 쪽도 승리나 패배는 아니라는 것. 모든 이유 있는 선택 뒤엔 내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남는다는 것. 다 좋다. 결국은,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2007년부터 13년간 상상마당 아카데미 ‘전방위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쌍은 경험과 노하우를 이 책에 그대로 풀어냈다. 글쓰기 초보자에게 글을 잘 쓸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준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모든 이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 확신한다. 주요 저서에는 『전방위 글쓰기』(2008), 『영화 리뷰 쓰기』(2008),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2012), 『나의 대중문화표류기』(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미스터리』(2015),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호러』(2016), 『고우영』(2017) 등이 있다. 공저로도 『클릭! 일본문화』(1999), 『시네마 수학』(2013), 『탐정사전』(2014),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르 가이드: 웹소설 작가 입문』(2017)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