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마니아가 있지만, SF 마니아들만큼 충성도가 높고 열심히 공부하며 마니아의 본령을 성실히 실천하는 사람들도 드뭅니다. 장면 장면의 의미를 집요하게 해독하고 과학적 원리에 대해 끈기 있게 탐구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스타 워즈〉 박스 세트나 26부작 TV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 DVD를 쫙 꽂아놓고 새로 나온 베이스볼 카드라도 모은 양 흐뭇해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도 눈에 확 띄는 SF 드라마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배틀스타 갈락티카〉입니다.

국내에도 방영이 되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시청률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했답니다. 1980년에, 1978년 시리즈의 30년 후 미래를 새로운 캐스트와 새로운 비전으로 그린 〈배틀스타 갈락티카 1980〉이 나왔지만, 이 작품은 제작자마저도 왜 이런 생각 없는 시도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참패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2003년에 새로운 〈배틀스타 갈락티카〉의 파일럿이 제작되고, 그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즌 1이 시작되었으니, 꽤 복잡한 역사를 지닌 드라마입니다. 어쨌거나 2003년 새 시리즈가 시작될 때는 스타벅이나 샤론 발레리 같은 주요 캐스트가 여자로 바뀌는 등의 이유로 오리지널 버전의 정통성을 주장했던 열혈 SF 마니아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노여워하던 오리지널 〈배틀스타 갈락티카〉 팬들도 이제는 마음을 풀고 새 시리즈에 환호하고 있고,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스타 트렉〉 이후 침체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 중평이던 SF 드라마계에 중흥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아니,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중흥의 바람을 넘어 SF 드라마계의 태풍의 진원지로서 새로운 지형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은하계 너머 머나먼 지구를 향해 유랑하는 과정에서, 사일론과의 지난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978년의 시리즈에서는 일명 '토스터'라고 불리는 전투 기계들만이 사일론으로 나왔다면, 새로운 시리즈에서는 인간처럼 생기고 생각하고 느끼는 인간형 사일론과 임무수행을 위한 프로그램이 작동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사일론까지 등장하여 이야기를 겹겹이 둘러쌉니다.
SF라고 하면 과학적 논리에 맞건, 맞지 않건 간에 신기의 테크놀로지를 주무기로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그런 면에서는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일론은 가이어스 발타라는 인류 최고의 천재 과학자를 이용하여 군사적 방어 시스템을 네트워크화한 후 손쉽게 무력화하고 콜로니 행성을 장악하며 대부분의 우주 군함을 격침하지만, 12개 배틀스타 중 하나로, 너무 오래되어 퇴물 취급을 받으며 해체식을 앞두고 있던 갈락티카에만큼은 손길을 뻗치지 못합니다. 다른 군함들과는 달리, 갈락티카는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40년 전에 있었던 사일론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그러한 시스템이 불러온 재앙을 몸소 목격한 아다마 함장의 고집으로, 갈락티카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수용하지 않았고 덕분에 살아남게 됩니다. 40년간 계속된 휴전으로 그 같은 맹점에는 눈을 감고 해이해져 있는 시기에, 갈락티카는 함장의 지휘에 따라 번거롭게 품을 들이면서도 과학과 기계에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 몸이 죽으면 프로그램된 정신이 새로운 몸에 다운로드되며 영원히 죽지 않는 모든 사일론은 육신의 죽음을 반복하며 더욱 강력한 증오와 복수심,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거듭납니다. 비행기나 우주선 슈팅 게임에서 스테이지가 넘어갈수록 적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요.
신화연구가 조셉 캠벨은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집 『신화의 힘』에서 〈스타 워즈〉에 담긴 '신화'라는 모티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꼭 캠벨이 말해서가 아니라,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와 인류의 존재론 사이의 관계 또는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애용되는 그릇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SF가 인간의 어두운 그늘만을 보여주는 데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는 것도 신화라는 모티브가 가진 힘입니다. 인류가 저지른 짓에 대한 우울한 반성에 끝도 없이 매달리는 것보다는, 피부에 와 닿는 바람과 비와 햇빛, 그 어느 것에서도 신의 숨결을 느끼는 겸손함으로 자신들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만의 껍질을 벗어낸다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묵시록을 피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 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대답은 당연히 "아니올시다"입니다. SF라는 장르가 탄생한 이래로 무수하게 반복되어 온 전형적인 질문을 되풀이하는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던 만고불변의 장인정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화시켜 놓은 작품입니다.
본격적인 성인용 SF를 표방하면서 가장 드라마적인, 아니 가장 연속극적인 재미를 배가시키는 미덕을 발휘하고 있는 〈배틀스타 갈락티카〉는 SF에 대한 문외한에서부터 마니아까지 모두를 포섭할 수 있는 대단한 물건임이 틀림없습니다.
신화니 유니버스니 레일건이니 워프니… 책장을 들춰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문적인 용어가 전혀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저 계속해서 보다 보면 폐인 모드로 자연스럽게 돌입하게 됩니다. 'SF'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작품을 '점프'하는 일은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랬다가는 '정치 드라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웨스트 윙〉을 외면했을 때의 안타까움, '청소년 드라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슨의 청춘일기〉를 외면했을 때의 갑갑함, '여자들 드라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섹스 앤 더 시티〉를 외면했을 때의 아쉬움, 그 이상의 후회가 밀려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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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40
2006.06.24
tazz
2006.04.13
아 그리고 글 언제 나 감사합니다^^
책벌레군
200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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