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의 탐정 생활 - 〈베로니카 마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03.02
작게
크게
세상은 대개 돈을 많이 들일수록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들이면,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먼 곳으로 여행 가서 더 좋은 숙소에 묵을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대중문화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들이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쓸 수 있는 도구를 비교적 자유롭게 쓰면서, 또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인기 많은 배우를 쓰고 양질의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요컨대 양질의 재료를 바탕으로 더 때깔 좋고 탄탄한 물건이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큰, 더 좋은 조건을 우선 따놓고 들어가는 셈이지요. 블록버스터들은 종종 제작비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을 대대적인 홍보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아니 한국에서도 영화나 드라마 제작비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경우에는 드라마까지 포함하여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 풍부합니다. 거기에 전 세계적인 시청자 팬층이 날로 두터워지고 있는 것도 제작비를 한층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기반이 되겠지요. 한국도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해가면서, 작품의 제작 규모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이 500만 명 이상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을 넘긴다는 초특급 예산의 영화도 나오곤 하며,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었기에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 부을 수 있는 드라마가 기획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자의 입장에서 사는 경우와는 다르게, 물건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는 비교적 더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이 그 예외입니다. 천문학적인 투자를 했는데도, 시장에서 참패를 하고 마는 고급차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디어와 적은 투자로 크나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없지 않고요.

대중문화산업에서도 그런 예외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개런티로 3000만 달러를 받았네 어쩌네, 제작비가 사상초유를 기록했네 어쩌네 하면서 쫄딱 망하는 영화도 가끔 이상으로 나오는 한편, 적은 예산을 들이고도 만든 사람마저 깜짝 놀랄 만큼 성공하는, 또는 경제적으로 거둔 성공은 미미하지만 그 미미한 성공이 너무나 안타까울 만큼 알찬 작품도 나옵니다.

돈을 적게 들이고도, 이른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으나 잘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창 무성한 〈베로니카 마스〉라는 드라마도 그런 예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티븐 킹은 이 드라마를 놓고, 어떻게 그렇게 적게 들이고, 어떻게 그렇게 잘 만들 수가 있느냐고, 자기가 아는 한, 인생은 그것과는 별로 비슷한 점 없이, 즉 돈을 적게 들이고도 좋은 것을 얻는 경우가 별로 없이 흘러가는데 그 몹쓸 놈의 드라마는 왜 이 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느냐고 너스레를 떱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넵튠 고등학교에 다니는 베로니카 마스라는 여학생의 탐정활동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소재도 어째 묵직한 힘이 뒷받침되는 것 같지 않고, 땅딸막한 여고생이 원톱으로 나오는 것도 흥행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데, 〈베로니카 마스〉는 현재 국내에서도 여느 드라마 못지않게 열혈 팬들을 양산해 내며 롱런의 기대를 가득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즌 1은 베로니카의 가장 친한 친구인 릴리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살인범이 밝혀지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렇다 보니 줄거리와 구성 면에서 〈위기의 주부들〉과 종종 비교가 되곤 하지요. 〈위기의 주부들〉은 하나의 자살사건을 놓고 시즌 내내 딱히 손에 잡히는 사건 없이 중산층 마을의 주부들 이야기를 소소하게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보는 사람에 따라 그런 이야기에서 격랑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임을 강조하며 말씀드리자면, 좀 밋밋하고 늘어진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답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릴리 케인 살해 사건을 큰 축으로 놓고 가되, 매회 두어 가지의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갑니다.

이 작품은 정말로 예산이 부족하거나, 정말로 저예산이 컨셉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사물에 등장하는 그 흔한 액션 장면이나 정교하고 매끈한 수사도구 같은 것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꽤 튼실한 내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또 십대를 그리는 미국 드라마에서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방탕한 생활이나 화려한 파티 장면도 여간해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 케인 살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파면된 보안관 아버지를 둔 베로니카는, 학교에서는 단단히 찍힌 왕따이기 때문입니다.

영민하나 고등학교라는 만만치 않은 사회에 섞이기 어려운 괴짜 꼬마 탐정답게, 베로니카의 곁은 순진하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역시 왕따 기질이 있는 친구가 충성스럽게 지키고 있고, 가슴 따뜻한 날라리 친구가 가끔은 해결사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정작 베로니카 마스는 심심한 인생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자극적이고 화려한 화면을 선사하지 않으면서도, 아기자기함을 무기로 삼는 사건과 사건 해결방식, 주변 인물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기술만큼은 현란합니다. 말마따나 베로니카는 물만 마시려 하면 누군가가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는 소녀 탐정 신세니까요.

릴리 케인의 오빠이자 베로니카의 옛 남자친구인 던컨 케인, 베로니카와 던컨의 러브라인은 출생의 비밀이 얽혀들면서 시청자로부터 감정의 괴리를 경험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드라마라지만 터부를 무한정으로 그릴 수 있는 운신의 폭은 여전히 한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가정사 탓에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로건 에콜스가 옛 여자친구인 릴리의 죽음 이후 베로니카와 교류하며 엉덩이에 뿔을 빼나가는 과정을 설득력이 있게 그리면서 곧 상쇄되고, 둘의 관계가 불신의 벽에 부딪혀 흔들리는 장면은 애틋함을 자아내기도 하지요.

로건 에콜스는 미키 루크와 〈마네킨〉의 앤드류 매카시를 섞어놓은 듯하게 생긴 배우 제이슨 도링이 분했는데요, 미국 드라마를 보면 유명 영화배우를 닮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 누가 누구를 닮았나 알아맞히는 것도 꽤나 심심풀이 땅콩이 된답니다. 어쨌거나 규모는 작게 가지만, 〈베로니카 마스〉에 등장하는 인생의 음모는 결코 작지 않으며, 베로니카가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밀도가 촘촘합니다.

〈베로니카 마스〉는 지상파라고는 하나, 어지간한 케이블 방송하고나 어깨를 견줄(?) 정도로 고전하다가 경쟁 지상파 방송국인 WB와 합병에 이르게 된 네트워크인 UPN에서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UPN이 쇠퇴의 길을 걸으며, 〈베로니카 마스〉는 구성의 흡입력과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평이 자자함에도 여전히 그 운명이 풍전등화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시청률이 도무지 나오지 않아, 1시즌을 끝으로 접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으나, 당시 UPN 사장의 지대한 총애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하지요. 그나마 운이 좋았다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새로 합병된 그룹에는 “되는 드라마만 하자”라는 얘기가 있어서 향방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아마도 WB와 UPN이 합병된 새 네트워크에서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드라마 1순위가 〈스몰빌〉임에는 틀림없겠으나, 〈베로니카 마스〉역시 순전히 작품만의 힘과 재미로 시청자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2순위를 차지할 확률 역시 상당합니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베로니카 마스〉는 트리플 A라는 마이너리그의 슈퍼 루키임은 틀림없지만, 인수합병을 통해 확실한 메이저로 거듭나려는 측에서 보면 메이저리그 정규 로스터에 세울 수 없는 재목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베로니카 마스〉가 비운의 슈퍼 루키로 사라지는 안타까움만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관련 상품 보기

『위기의 주부들』 존 데이빗 콜즈,제프리 멜맨 | 브에나 비스타 | 2005년 11월
<위기의 주부들> 시즌 1은 각기 다른 4명의 주부들이 이웃의 자살을 목격하고 난 후,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살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미스터리 코미디 드라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4명의 주부들로 사랑에 목말라하는 귀여운 이혼녀 수잔, 네명의 자녀들과 씨름하는 전직 커리어 우먼 리네트, 마샤 스튜어트 만큼이나 완벽한 주부인 브리, 남편 덕분에 부를 누리지만 불만이 많은 전직 모델 가브리엘이 바로 그들이다.

『스몰빌 시즌 4 박스세트』 워너브라더스 | 2005년 11월
12년 전, 캔사스의 한 마을인 스몰빌에 큰 유성이 비처럼 떨어져 많은 마을 사람들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조나단 켄트와 부인 마르타는 유성이 떨어진 옥수수밭에서 파괴된 우주선과 한 갓난아기를 발견하고, 아기를 몰래 데려와 키우기로 한다. 세월이 흐른 후, 어느덧 아기는 클라크 켄트라는 소년으로 자라난다

6의 댓글
User Avatar

satva7

2006.03.17

1시즌 후반부가 꽤 재밌죠. 로건도 귀엽구요. 개인적으로 스몰빌보다 훨씬 재밌는데 2순위든 1순위든 순위에서 탈락하지 않았음 좋겠네요.
답글
0
0
User Avatar

쌩긋

2006.03.10

베르니카 마스~ 1시즌 초반엔 이게 뭐야 싶더니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흥미진진해져서 이틀만에 1시즌을 끝냈답니다^^ 근데 2시즌은 솔직히 별로인 것 같아요 1시즌의 재미를 돌려달라~~~
답글
0
0
User Avatar

곰탱이

2006.03.06

재밌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몰라 보기를 망설였는데 글을 읽고나니 드라마에 대해 더 궁금해 지네요 꼭 봐야겠어요 ^ㅡ^
추리물을 좋아라 하는데 여태 몽크밖에 몰랐는데 (아~ 몽크 //) 지금 당장 봐야겠네요
(나이스한 강아지 그루밍 기술 저도 너무 배우고 싶은 건데 참 어려운 길이죠 ㅅㅅ)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Writer Avatar

문은실

홍익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의 꿈은 건축가였지만,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본 후부터는 무언가 집요하게 조사하고 탐구하며 결실을 맺는 직업, 예컨대 평전 작가 같은 것에 대한 갈망이 생겼고, 그 소망은 가슴 한켠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를 참 좋아해서 한때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겠다고 캠코더를 메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한국과 미국 보스턴에 머물며 10여 년간 출판기획과 취재를 하면서 대중 문화 자유기고가와 영미권 도서 번역가로 활동해왔다.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 대해서 그녀만큼 깊이 있으면서 재미있게 쓰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미국 드라마 평론가이기도 하다.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본의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 골프채는 잡아본 적도 없지만 18홀 라운딩을 함께 하고픈 사람을 한 명 고르라면 단연코 메이저리그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다. 향후 배워보고 싶은 것으로는 "브라더 미싱으로 예쁜 원피스 만들기" "매킨토시로 그림 그리기" "나이스한 강아지 그루밍 기술" 등이 있으며,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으로는 "야구장의 몇 만 관중 앞에서 시구하기" "험머 타고 북미 대륙횡단하기" "플레이 스테이션 위닝 일레븐 게임에서 오버헤드킥 성공시키기" 등이 있다. 국내 리그는 물론 메이저리그 야구 마니아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이다. 특히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좋아해서, 그의 플레이를 보려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전 시즌을 관전하기도 했다. 직접 쓴 책으로는 『미드 100배 즐기기 시즌 1』, 『위트 상식사전 프라임』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야구 교과서』, 『첼시』, 『리버풀』, 『유쾌한 깨달음』, 『자연과학 상식사전』, 『디자인이 만든 세상』, 『하버드가 지배한다』, 『마이 히어로』,『훈육의 심리학』, 『나 누주드, 열 살 이혼녀』, 『마테크』, 『그 여자의 살인법』, 『냉동 인간』, 『수비의 기술』, 『외지인의 죽음』 『매춘부의 죽음』, 『대식가의 죽음』, 『잔소리꾼의 죽음』, 『돌런갱어 시리즈』(전5권), 『몸을 긋는 소녀』, 『언더베리의 마녀들』, 『뼈 모으는 소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