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작가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 하루 대부분을 책과 함께 하는 편입니다. 일과 독서가 분리된 일반 사람들과는 좀 다르지요. 제게는 독서와 집필이 곧 일이니까요. 서재 겸 작업실이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차지해요. 밖에서는 일부러 책을 안 갖고 다녀요. 직장인이 퇴근 후에도 일해야 하면 짜증나는 심정과 비슷하죠. 밖에서 이동 중이나 짬이 날 때는 생각을 하거나 차라리 멍하게 있는 편입니다.
예외적으로 서재 밖에서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욕구가 생길 때가 있기는 해요. 큰 기대 없이 집어 든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경우죠. 예를 들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 중의 하나죠.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어디에 있든 옆에 끼고 다니게 돼요. 일년에 한두 번 경험하는 일입니다.
현재는 대한민국 헌법을 인문학적으로 탐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곧 원고가 완성될 예정이고요. 최근에 새로운 관심을 자극하는 분야가 있어서 마음이 쿵쿵 설레는 중입니다. 과학과 인문학을 접목시키는 작업입니다. 그간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과학자가 과학의 시선에서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연결시킨 작업이 몇 차례 있었지요. 저는 시선을 좀 달리해서 인문학에 무게 중심을 두고 과학의 제 발견과 원리를 연결시키는 작업에 흥미를 갖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각 단계의 인문학적 사유와 당시의 과학적 원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나아가 현대철학이 최근의 양자역학이나 사회생물학 등과 어떻게 소통 가능한지 등을 탐색하는 일이죠.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는 작업이긴 하지만 기대감 때문에 벌써 기분 좋은 흥분과 떨림이 있습니다. 틈틈이 책을 모으고 있고요.
이 관심사와 연관된 여러 분야의 다양한 책이 있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과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사상』 등이 빨리 자기 먼저 읽어달라고 자꾸 제 시선을 잡아 끄네요. 서재 이름이요? 글쎄요.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서재 겸 작업실에 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을 말하자면 ‘고독의 방’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책장으로 사방을 둘러쳐 놓은 공간 안에서 지내거든요. 제 부족한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유폐시키지 않고서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더라고요. 사람을 만나고 이러저러한 모임에 나가는 순간 독서와 집필 작업이 진척되지 않아서요. 자발적 선택이긴 하지만 외로움 때문에 숨이 턱 막히곤 해요. 종종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할 때가 있기는 해요. 그래도 고독해야 생각이 시작되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지력이 유지되는 동안 쓰고 싶은 책을 다 내놓고 싶은 욕심에 그럭저럭 고독과 친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최근에 『세상의 모든 교양, 미술이 묻고 고전이 답하다』라는 책을 냈어요. 주요 고전 내용을 접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고전 독해능력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난해한 문장 때문에 번번이 포기하잖아요. 고전을 친구로 만들려면 그에 필요한 사고능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지요. 이를 위해 핵심 내용을 읽고 분석하는 방식이 가장 좋아요. 책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다독보다는 숙독을 권합니다. 특히 핵심 문장이나 명제를 붙들고 싸워야 하죠. 중요한 용어에서 문장구조에 이르기까지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에 낸 책은 이를 위해 요약정리가 아니라 원문의 주요 내용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핵심 단어와 구절을 해부하여 꼼꼼한 이해를 돕는 방식이고요. 미술작품을 안내자로 삼아 조금은 친근하고 수월하게 핵심 내용에 다가가도록 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 저/이재형 역
현대사회는 여전히 근대에 젖줄을 대고 있습니다. 루소의 이 책은 근대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중세의 신 자리를 대신할 사회운영 원리가 필요했고, 근대사상가들은 이를 사회계약론에서 찾았죠. 루소의 문제의식은 프랑스대혁명 직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물론이고 이후 현대 민주공화국 헌법정신의 기본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개인이 어떻게 다수의 집합적인 사회, 국가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원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저/김희영 역
20세기 전반 소설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문학 작품으로 완성된 심리학의 대서사라고 할 만합니다. 작가 자신의 마음을 유년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추적하는 과정이 펼쳐지며 심리 탐구에서 만나는 고민과 쟁점이, 소설에 녹아 든 구체적 인물의 삶과 내적 탐험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앙드레 말로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현대문학은 물론이고 현대 예술 전체의 분기점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K. 마르크스 저/김수행 역
마르크스에 대한 찬반 혹은 호불호를 떠나,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만나야만 하는 책이죠.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이어졌지만 자본주의 승리를 경축하는 환호성이 가시기도 전에 도처에서 위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긴장, 갈등과 빈곤 등 위기의 조짐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진단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데에 《자본론》은 필수적이지요.
장자 저/김학주 역
진지하게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큰 전환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통념을 뒤집는 생각의 힘, 지식을 넘어서는 성찰의 힘, 존재의 의미를 찾는 내면의 힘을 주기 때문이죠. 동시대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보다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을뿐더러 장자가 보여주는 개념이나 범주는 형이상학, 인식론, 방법론 심지어 인생철학까지 방대한 영역에 닿아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봐야 한다는 장자의 입장은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예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저/강승영 역
웬만큼 독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장에 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는 책이죠. 이 책을 접하면 대부분 숲속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하며 사색에 잠긴 모습을 떠올리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은이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죠. 그의 사상과 삶은 현대 사상과 사회운동에 적지 않은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월든 숲에서 모색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의 자극제였고, 시민 불복종은 민주주의 절차가 보장된 현대사회에서의 저항 방법으로서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국가의 억압적 본질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통찰은 인권운동의 발상과 상당한 접촉면을 갖습니다.
임상수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상의 절반에 불과한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여성조차도 가부장제 의식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시각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죠. 성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만, 대체로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대상화해 온 반면 이 영화에서 여성은 스스로 성을 즐길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화 주제로 삼습니다. 또한 성적 환상과 욕망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드러내죠. 영화 속의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나머지 절반의 시각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흥미로운 계기를 마련해주는 영화입니다.
무의식에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 즉 꿈 조작을 통해 현실 의식을 지배한다는 발상이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정신분석학을 근간으로 함에도 추리나 액션을 적절히 섞어 재미까지 선사합니다. 영화에는 프로이트와 연결되는 몇 가지 장치가 나오는데요. 인간 행동은 의식의 결과가 아니고, 무의식의 그림자라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맞닿아 있죠. 영화에선 4단계까지 꿈 안의 꿈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전의식→무의식→기억조직들→지각조직' 퇴행 과정과 유사합니다.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는 영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강의》를 읽으면서 본다면 새로운 지적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박홍순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귀한 책” 인문학 작가 박홍순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