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선명한
[작지만 선명한] 포도송이 같은 연결을 만드는, 포도밭출판사의 책
작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시리즈 '작지만 선명한'. 관계를 만들고 확장해 나가 '포도밭출판사'의 책.
글: 최진규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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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출판사는 2014년에 충북 옥천에서 시작했습니다. 11년이 된 회사이지요. 돌아보건대 그동안 포도밭출판사에서 해온 일이 어찌 보면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기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혹은 배우고 싶은 사람을 찾고, 그와 책 만드는 일을 도모하고, 다음 작업을 기약하며 헤어지기를 반복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은 (이렇게 말하면 책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관계의 부산물입니다. 부산물이란 말이 폄훼의 표현은 아닙니다. 버섯을 균사체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책도 관계망에서 출현하는 부산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물이자 선물이며 다시금 이어질 관계의 시작이지요.


 

『먼지의 말』

채효정 저 | 포도밭출판사

 

저는 오래전 땡땡책협동조합이라는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출판 활동을 기성의 방식이 아닌 대안의 방식으로 시도하고자 했고,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만들고자 꿈꾸었던 곳이지요. 땡땡책협동조합에서 활동하며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습니다. 채효정, 하승우, 박영길, 김신범, 김민희, 희정 같은 친구들. 포도밭출판사를 시작하고서 그들에게 집필을 부탁하여 그들의 책을 만들었고, 그들이 좋다고 소개해 준 원고들로 다른 책들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앞에서 썼듯 포도밭출판사의 책 대부분이 관계에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채효정 선생님은 평소 정말 많은 글을 쓰면서도 출간 제안을 할 때마다 자신은 ‘책 내는 특권’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말 거는 일’, ‘말로 만지는 일’로 생각했고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않았지요. 『먼지의 말』은 그런 그의 글들을 제가 몰래 모아서 한 권으로 엮은 후 어느 날 찾아가 보여주며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식으로, 조금은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타자들의 생태학』

필리프 데스콜라 저/차은정 역 | 포도밭출판사

 

이 책도 책 자체보다 책을 만들게 한 인연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16년 어느 날 한 인류학 연구자가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공부삼아 올린 번역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일본 학자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라는 원서를 번역한 원고였지요. 동료 연구자들과 공유하고자 올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의미 있는 내용을 발굴하고 번역 소개하는 열의에도 감동했지만 그 내용도 너무 인상적이라서 저는 꼬박 이틀 동안 매달려 그 긴 글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 주인인 인류학 연구자께 연락을 했지요. 올리신 번역 원고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그러고 앞으로 당신의 글들을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그분이 인류학자 차은정 선생님이었습니다. 이후 차은정 선생님의 주도로 월딩 시리즈의 모든 책(『타자들의 생태학』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오늘날의 애니미즘』 『라인스』 『만들기』)을 기획했고 여러 인류학 연구자들(존재론의 자루 모임, 김수경, 김지혜, 오성희, 권혜윤)을 역자로 모시고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차은정 선생님의 저작을 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한인정 저/서재현 사진 | 포도밭출판사 

 

다섯 곳의 지역 출판사가 연합해 런칭하는 ‘어딘가에는’ 시리즈에 참가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처음에는 많이 막막했습니다. 저는 지역에 살며 출판일을 하고 있지만 지역에서 출판의 소재를 찾는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역의 소재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역과 어떻게 연결돼 있고 어떻게 단절돼 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지요. 막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우연찮게 ‘이주여성협의회’ 주최의 발표회장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한인정 연구자이자 활동가의 발표를 들었는데, 단박에 이 사람들 그리고 이 활동과 연결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 살다가 결혼과 함께 옥천으로 이주해 온 여성들이 겪은 폭력에 관한 증언들을 들었고,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폭력에 맞서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혜를 바라지 않았고 권리를 읍소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억지로 다른 존재로 바뀌지 않아도 좋다는, ‘자기 자신 그대로’여도 좋다는 인식을 이 땅에서 스스로 획득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온전한 일상을 위해 벌이는 싸움이 제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각별합니다. 아참, 이 이야기를 해야지요. 뜨거운 글을 쓴 저자 한인정 님과 따뜻하고 씩씩한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서재현 님은 이번 달(11월)에 혼인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혼인식에서 무려 ‘성혼선언문’을 작성하고 읽었더랬지요. 큰 임무를 맡은 탓에 혼인식 시작 전에는 도망가고 싶을 만큼 떨렸는데요. 제 차례가 오자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고 덕분에 그 순간이 얼마나 뭉클하던지.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구불구불 빙빙 팡 터지며 전진하는 서사』

제인 앨리슨 저/서제인 역 | 에트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같은 전형적인 ‘선형’ 이야기 구조 말고 다른 이야기 방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책은 구불구불한 비선형 이야기 방식을 선보입니다. 같은 비유라도 은유와 환유가 무척 다른 방식이듯, 같은 서사 구조라도 선형과 비선형은 무척 다른 방식이지요. 이 책이 제안하는 ‘다른 방식’은 기대 이상으로 강력한 전환의 효과를 일으킵니다. 서제인 역자의 반짝거리는 말을 옮겨와 봅니다. 이 책은 이렇듯 생각의 방향을, 속도를 달라지게 해준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폭을 넓혀주고, 선형적이기만 했던 움직임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작지만 반짝이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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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의 말

<채효정>

출판사 | 포도밭출판사

타자들의 생태학

<필리프 데스콜라> 저/<차은정> 역

출판사 | 포도밭출판사

구불구불 빙빙 팡 터지며 전진하는 서사

<제인 앨리슨> 저/<서제인> 역

출판사 | 에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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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규

충복 옥천에 산다. 포도밭출판사 편집자이자 디자이너. 『책 만들기 책』 『남의 노래』(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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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데스콜라

인류학자. 194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히스패닉 역사학자인 장 데스콜라가 그의 부친이다. 데스콜라는 생클루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파리대학 고등연구원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지도하에 에콰도르와 페루 국경의 아추아르 족을 현지 조사하여 민족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6년 9월부터 만 3년간의 일정이었고 아내이기도 한 인류학자 앤크리스틴 테일러와 함께한 현지 조사였다. 아추아르 족은 1970년대 당시 아마존 열대우림의 동부지역에 기반한 지바로 족 중 거의 유일하게 바깥 세계와 접촉하지 않은 부족이었다. 데스콜라는 아추아르 족이 인간과 비인간 동식물을 ‘사람’이라는 동일한 차원에서 사고하며 인공적인 구조물과 자연물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양의 우주론과는 별개의 아마존의 애니미즘적 우주론을 정립했다. 이 연구는 『길들인 자연: 아추아르 족의 상징주의와 실천 La Nature domestique: symbolisme et praxis dans l'ecologie des Achuar』(1986)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1987년에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 교수로 임명되었고, 2000년 6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자연의 인류학’의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2001년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설립한 사회인류학연구소(LAS) 소장으로 임명되어 2013년까지 운영했다. 2012년에 국립과학연구원(CNRS)으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고 2014년에 국제 코스모스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연의 사회에서: 아마존 원주민의 생태학 In the Society of Nature: A Native Ecology in Amazonia』(1994)에서부터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Par-dela nature et culture』(2005)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다양한 우주론의 실천적 전개를 가로막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 간 ‘관계의 생태학’을 주창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식과 실천이론을 제시해왔다. 그는 지금까지도 지구 생태계를 위한 인문학을 모색하며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