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보라의 엄마가 된다
[이길보라 칼럼] 젖 먹이는 게 뭐 어때서
하루 여덟 시간 넘게 젖을 먹이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글: 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202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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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먹이는 게 뭐 어때서'의 태도를 장착했던 수유부 11개월 차의 사진. 일본 후쿠오카 시내의 트렌디하고 힙한 카페에서 수유하면서 커피 마실 권리를 행사했다. © Ken Tanaka

 

출산 후 두 달 정도 되었을 즈음 하루에 한 번 정도 홀로 짧은 산책을 했다. 그마저도 아이가 배가 고파 울까 싶어 멀리 나가지 못하고 핸드폰을 끼고 다녔다. 찰나의 자유를 만끽하다 전화가 걸려오면 급히 집으로 뛰어갔다. 아이가 태어난 지 네 달이 지나자 수유텀이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은 수유를 마치고 나면 두 시간 반 혹은 세 시간 정도의 자유 시간이 생긴다는 뜻이었고, 집 앞 카페에서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여차하면 장을 보러 다녀올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젖 물리는 요령도 어느 정도 생겼기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이라 덥지 않은 시간대를 골라 아이와 집을 나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집 앞 공원을 산책하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젖을 물릴 때가 되어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수유했다. 아이는 젖을 먹고 나는 좋아하는 풍경을 바라봤다. 아기야, 이제부터 엄마가 아끼고 좋아하는 곳을 소개할게. 외출을 새롭게 감각했다. 옆에 앉은 파트너는 어깨에 걸친 수유 가리개가 떨어질 때마다 손을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안 보이는 데서 수유하는 게 좋지 않겠어?”

 

산책하는 사람들이 종종 지나다닐 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누구도 우리를 보지 않는데 왜 그러느냐고 대답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어디서든 젖을 물릴 수 있어야 한다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바깥에서 가슴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성적 규범이 맞부딪혔다.   

  

아이와의 외출을 준비하면서 수유가리개를 주문했다. 젖을 먹일 때 보이게 되는 가슴과 젖꼭지를 가리기 위한 용도였다. 집 앞 카페에서 처음으로 바깥 수유를 해보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점원이 수유부를 위한 디카페인 원두를 준비했다며 마음껏 주문하라는 말에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기를 무릎 위에 눕혔다. 새로 주문한 가리개는 시원한 재질로 된 것이었지만 여름이라 더웠다. 체온이 높은 신생아를 내 몸에 바짝 붙이고는 그 위를 가리개로 덮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조그만 틈새 사이로 아이의 입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젖꼭지를 밀어 넣었다. 아기는 평소 하던 대로 텁, 하고 물고 싶지만 쉽게 되지 않아 짜증을 냈다. 나는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이와 씨름했다. 공공장소에서 젖가슴을 드러내고 수유를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태연한 표정과 자세 역시 유지해야 했다. 아이가 울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 뻔했으므로 아기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빠르고 신속하게 행동했다. 흘러내리는 가리개를 덮고 또 덮던 파트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새로운 가리개를 주문하겠다고 했다. 사지 말라고, 머리 위로 써서 어깨를 숄처럼 덮는 가리개는 사용하기도 불편하고 지금 쓰기엔 더워서 안 된다고 했지만 파트너는 장비가 중요하다며 주문을 강행했다. 결국 그 가리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서랍으로 직행했지만 말이다.

 

생후 2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방문했을 때다. 그때 당시의 수유 간격은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반 정도로 들쭉날쭉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식당으로 향하는데 아이가 정신없이 울었다. 양쪽 젖을 먹이고 소화시킬 때까지는 적어도 40분이 필요했다. 사정없이 우는 아이를 데리고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고 주문한 후에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수유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함께 있던 파트너와 동생에게 말했다. 

 

“수유실 가서 젖 먹일 테니까 먼저 가서 밥 먹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무척 억울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걸 알았는지 자애로운 동생이 김밥 한 줄과 생수를 수유실로 가져다주었다. 수유실에서의 취식은 금지되어 있지만 모유를 생성하느라 목이 마르고 허기져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젖을 물린 채 허겁지겁 호일을 벗겨 먹었다. 출산 후 처음으로 방문한 고국에서 먹는 첫 한국 음식이었다. 아직도 그 맛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횟수가 늘자 수유의 풍경도 달라졌다. 집 앞 카페, 산책 코스인 바닷가에서부터 쇼핑몰 수유실, 가전용품점에 딸려 있는 수유실, 식당, 이자카야, 파트너의 부모님댁 거실, 운동하러 다녀온 집 근처 야트막한 산 정상의 벤치, 동생이 일본에 왔을 때 함께 방문한 트렌디하고 힙한 카페, 북한산국립공원 둘레길까지. 수유실이 있을 때는 수유실에서 젖을 먹였고 수유실이 멀거나 찾기 어려울 때는 사람이 적은 곳에서 수유가리개를 착용하거나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수유했다. 경험이 쌓이자 ‘젖 먹이는 게 어때서’의 태도도 단단해졌다. 가리개를 착용하지 않고 수유하기를 시도했다. 민망할 때도 있었고 나 대신 옆 사람이 부끄러워할 때도 있었다. 젖 먹고 싶다고 우는 아이를 안고 수유실을 향해 달리고,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찾아 헤매고, 좁은 장소에서 벽을 바라보며 한 시간 남짓 젖을 먹일 때마다 마음이 복잡했다.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어디서나 젖을 먹이고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토로하자 스웨덴에 사는 친구가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한 스웨덴 여성이 길거리에서 수유하는 사진이었다. 원피스를 입은 수유부가 벤치에 앉아 제법 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었는데 목 아래로 파인 골 사이로 젖가슴이 나온 모습이 파격적이었다. 거리에서 가슴골 사이로 젖을 꺼내 아무렇지 않게 수유할 수 있다니, 충격적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조선시대 후기에 젖가슴과 허리가 드러나는 미니 저고리를 입고 아이를 업은 여성의 사진이 떠올랐다. 1700년대에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많은 여성들이 저고리 아래로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 당시의 가슴은 노출이 제한되는 금기의 장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가 된 것은 19세기 후반 일제의 침략과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부터라고 한다. 10대 후반에 인도를 여행할 때 허리와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전통 의상인 사리를 입는 여성들을 보았을 때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함께 여행하던 언니가 인도에서는 허리와 배꼽을 노출하는 것보다 어깨나 종아리 부분을 드러내는 것을 더 조심스럽게 여긴다고 귀띔해 주었다. 시대, 문화, 종교, 역사, 기후 등에 따라 성적 규범은 다르고 새롭게 구성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에 여덟 시간도 넘게 젖을 먹이며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젖 먹이는 게 뭐 어때서, 라는 말은 수유부와 아기의 접근성과 사회 참여권에 대한 논의와도 적확하게 이어진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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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영화감독, 작가)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고요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를 오가며 자랐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며 서로 다른 세계들을 연결하면서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등이 있고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등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