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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지나친 성공은 실패만큼 나쁘다 – 2024 한국영화 100선에 부쳐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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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상업적인 위기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안은, 우리에게 있어 한국영화를 상상하는 방법이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들이 자꾸만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아닐까? (2024.07.19)

 이미지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나를 포함한 시네필들에겐 질 나쁜 버릇이 있다. 타인의 베스트 리스트에 자연스레 질적 평가를 내린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어디 잡지가 주관한 리스트는 어떤 비평적 의지도 없어서 형편없다느니, 누구의 리스트는 어떤 영화를 누락해서 실격이라느니… 아마도 (1960~1970년대 미국의 록키즘과 비슷하게) ‘힙스터적’ 저널리즘을 오랜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리스트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는 속물주의는 시네필리아에 있어 어느 정도 필연적일 터이다. 물론 필연적이라고 해서 당연시하자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는 최근 발표된 한 리스트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지난 5월 31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개관 50주년을 맞아 ‘2024 한국영화 100선’ 리스트를 발표했다. 이를 위해 작년 여름에 진행된 설문조사에 나 역시 참여했으며, 내 리스트는 영자원이 운영하는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KMDb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자원이 주관한 한국영화 100선 리스트가 발표된 건 이번이 세번째로, 그 사이에는 2019년 한겨레 신문과 CJ 문화재단이 함께한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 리스트도 있었다. 이러한 이전의 리스트들에 대해 차별점을 명확히 만들고자, 영자원 측은 이번의 설문조사에서 총 24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선정인단에게서 리스트를 받아 취합했으며, 또한 선정인단의 범주도 배우, 소설가, 미술가, 기자 등 다양한 분야의 종사자들로 확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리스트는 내게 적잖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김기영의 <하녀>가 쭉 1위를 지키리란 것쯤은 물론 누구나 예상했을 게다. 그러나 10위권의 절반이 21세기 영화들로 채워질 줄은, 또 그 중에서도 봉준호와 박찬욱의 영화가 두 개씩 이름을 올릴 줄은 대다수가 예상 못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100편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21세기(즉 지난 20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가 39편이나 포함되어 가장 높은 분포도를 차지한 반면 1930~1960년대 영화는 다 합쳐도 불과 17편만이 포함됐으며, 양주남의 <미몽(죽음의 자장가)>나 김소동의 <돈>같은 중요한 작품들은 2014년의 리스트와 달리 이번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아무리 범주를 확장했다 해도 선정인단의 대다수는 영화학이나 영화평론에 몸을 담그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선정결과를 본 직후 내 리스트에서 <미몽>을 뺀 것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이런 리스트에 대해선 이런저런 불만을 한참 늘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형편없는 영화가 꼽혔다거나, 반대로 과도한 정전화를 지향한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나로선 지양하고 싶다. 리스트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태도는 그릇된 ‘힙스터리즘’으로써 관객 문화를 경직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전을 명확히 세우는 데 목적을 둔 이도, 정전에 들어갈 리 없는 특수한 경우들을 거론하는 데 목적을 둔 이도 모두 목적 자체로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10편을 꼽은 리스트만으로 작성자의 취향을 알 수 있다 자신하는 이들만큼 순진하기도 어려울 게다) 나의 진정한 불만은 따로 있다.

한 번 옛날을 떠올려보자. 한국영화를 하나의 종(種) 내지는 고유한 영토로 여기며 ‘한국영화적인 것의 가능성’을 논하는 게 유효한 제스쳐로 여겨진 옛날. 그것이 옳았건 그릇되었건 상관없이, 이번의 한국영화 100선은 그 옛날이 정말로 옛날이 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준다. 지금 그 자리를 거의 대체한 것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중심 삼은 한국영화사 서술이다. 보다 정확히, 봉준호와 박찬욱을 비롯해 80~90년대에 청년 영화광이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직간접적으로 재정립된 한국영화사. 물론 그들에게 이 한국영화에 무관심한 한국영화 100선의 책임을 돌리자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하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테다, 지나친 성공은 종종 실패만큼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지나친 성공은 종종 그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불필요한 잉여로 취급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영을 비롯한 ‘스타일리스트’들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사를 뒤집고 계승(을 자처)한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지나치게 성공했으며, 그래서 의도치 않게 실패만큼 나쁜 결과를 초래해버렸다. 한국영화의 상업적인 위기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안은, 우리에게 있어 한국영화를 상상하는 방법이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들이 자꾸만 단절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아닐까? 이번 한국영화 100선은 내게 그런 불만을, 아니 불안을 불현듯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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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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