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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취청오이의 나날

안담의 추천사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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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가 담긴 유리병은 내 양심을 상징하는 작은 장승이 되고, 그렇게 미신이 생겨난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 장승을 힐끔 쳐다보면서 이 집 식구들의 건강을 수호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2024.07.17)

pexels.

오이는 미신적인 음식이다. 머릿속이 희뿌옇고 배가 더부룩한 채로 책상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있기를 지속하다 보면 ‘건강’하게 먹어야겠다는 위기감이 절로 드는데, 그때 마트에서 집어 오는 식재료에는 꼭 오이가 포함되어 있다. 손가락 길이로 길쭉길쭉하게 잘라 포장마차 기본 안주처럼 손질한 오이를 유리병에 담고 깨끗한 물을 부어서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아직 먹지 않았는데도 피가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오이가 담긴 유리병은 내 양심을 상징하는 작은 장승이 되고, 그렇게 미신이 생겨난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 장승을 힐끔 쳐다보면서 이 집 식구들의 건강을 수호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아무래도 토템이니까 실제로 먹지는 않으면서, 필시 동의보감에 적혀 있을 오이의 어떤 건강 성분이 영적 감응을 통해서도 내 신체에 전해질 수 있다는 듯이…. 아직 읽지 않은 책의 책등과 표지를 너무 오래 쳐다본 나머지 책의 내용이 부지불식간에 내 영혼으로 전송된 것 같다고 느껴본 사람이라면 냉장고 속 오이의 작동 방식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브로콜리가, 양상추가, 당근이나 파프리카가 그런 식재료겠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장승은 나무나 돌로 깎은 것이 아니어서 수일 내로 흉하게 상한다. 유리병 속 물이 탁하게 변하고, 퉁퉁 불은 오이가 처리를 기다린다. 작고 근본 없는 초록의 종교 하나가 스러진다.

이번에는 기필코 오이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동네 마트에 있는 백오이를 사지 않고 굳이 취청오이를 찾아서 주문했다. ‘오이’하면 바로 연상되는 연둣빛의 껍질에 식감이 부드럽고 단맛이 있는, 어디서나 살 수 있는 다다기오이 또는 백오이를 나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쉽게 무르고 맛이 엷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짙은 청록색에 조직이 단단하고 오이다운 쓴맛이 풍부한 취청오이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근처에 오기도 꺼려지는 오이, 그런 진정성 있는 오이가 취청오이다. 너무나 두껍고 길어서 약간의 위압감마저 주는 취청오이 네 대. 그 앞에 서 있으니 일주일의 목표를 재정립하게 되었다. 이걸 다 먹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주의 새로운 목표다. 사람들과의 약속 몇 개를 취소해서라도.

오이를 얇게 썰어 소금에 절여두었다가 물기를 꼭 짜고, 달지 않은 그릭요거트와 섞는다. 다진 마늘과 레몬즙, 소금과 설탕으로 간하고 상쾌한 맛의 허브인 딜을 다져 넣는다. 이걸 차지키 소스라고 부른다. 빨간 후추 몇 알을 흩뿌려서 멋을 부린 차지키 소스를 한 번은 크래커에 올려서 먹고, 한 번은 카레에 밥반찬으로 곁들이고, 마지막으로는 그냥 퍼먹는다. 그렇게 오이 한 대가 사라진다. 다음으로는 오이탕탕이를 만든다. 오이탕탕이만큼 정직해서 웃긴 음식 이름도 드물 것 같은데, 오이를 두드려 패서 만드는 음식이 오이탕탕이이기 때문이다. 꼭지를 딴 오이를 비닐봉지에 넣고 밀대나 망치로 폭력을 가한다. 불규칙하게 으깨진 조직 사이에서 오이의 정수가 흘러나온다. 오이 국물을 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다진 마늘, 소금, 설탕, 식초, 통깨를 넣어 버무린다. 투박한 그릇에 오이탕탕이를 무심하게 담고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간이 안 좋은 친구를 불러서 밥보다 오이를 더 많이 먹는 식사를 한다. 그렇게 오이 두 대가 사라진다. 잘 드는 칼로 오이 반 개를 채친다. 차가운 국수에 고명으로 올릴 것이다. 메밀국수에 한 번, 파스타에 한 번 오이채를 듬뿍 얹어 먹는다. 오이가 중심이니까 국수는 평소보다 적게 삶아야 한다. 남은 오이 반쪽은 씨를 살짝 긁어내고 깍둑썰어서 다진 토마토, 삶은 렌틸콩이나 병아리콩, 소금,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넣고 버무려 샐러드로 만든다. 만약 오이가 좀 남았다면 두유나 콩국에 가늘게 채 친 오이를 넣고 소금을 조금 뿌려서 훌훌 마신다. 그렇게 오이 세 대가 사라진다.

그러나 아직도 오이 한 대가 남았다. 어쩔 수 없이 오이를 손가락 길이로 길쭉길쭉하게 잘라 포장마차 기본 안주처럼 손질하여 유리병에 담고 깨끗한 물을 부어서 냉장고에 넣는다. 많은 백오이가 이 병 속에서 물러갔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다. 이번 주에 오이를 왕창 산 진짜 동기를 떠올린다. 이 집구석에 안 아픈 게 나뿐이다. 더위와 습기에 지친 나의 개는 배탈이 나서 주룩주룩 설사하고, 6년 전부터 과로에 시달려 온 내 연인은 허리가 아파서 응급실에 다녀온 뒤 밥도 먹지 않고 누워있다. 상대적으로 건강한 건 나뿐인데, 나도 어디 가서 건강으로 뻐길 처지는 못 된다. 복수는 차게 내놓을 때 제일인 요리와 같다고 했던가. 혹시 그건 유리병 속에 담긴 야채 스틱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복수심에 이를 가는 사람이 먹어야 할 것은 군만두나 스테이크가 아니라 취청오이인 게 아닐까. 아픈 개와 아픈 사람이 내 침대를 차지하도록 두고, 말뚝처럼 실한 취청오이를 와작와작 씹으며 맥없는 기합을 넣는다. 이 집 기둥 누구야. 이 집 기둥 누구야. 이 집 기둥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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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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