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듯 꿈꾸는 날카로운 문체로 기이한 사랑의 초상을 그리는 에스더 이의 『Y/N』이 은행나무 ‘환상하는 여자들’ 시리즈 제3권으로 출간되었다. 저자의 첫 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2023년 출간과 동시에 “팬덤과 환상에 대한 카프카식 열병이자, 모든 형태의 매혹에 관한 훌륭한 해부” “열망의 블랙홀에 빨려드는 낯설고 아름다운 작품” “학술 논문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 넣은 시와 같은 농도”라는 평을 받으며 해외 여러 매체에서 매우 독특하고 탁월한 데뷔작으로 비평적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소설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케이팝 보이그룹의 멤버 문(Moon)에게 빠진 뒤 삶이 불가능해진 익명의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아, 예술, 매혹,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허기에 사로잡힌 화자는 독자가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을 수 있는 ‘Y/N(Your Name)’ 팬픽을 쓰기 시작하고, 돌연 문이 은퇴를 발표하자 그를 찾으러 서울로 향한다. 불가해한 꿈처럼 거듭 미끄러지는 전개 속에서 현실과 환상은 어지럽게 뒤섞이며, 이야기는 존재의 공허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을 실험하는 철학적 무대가 된다.
당신의 첫 소설 『Y/N』은 이름 없는 화자가 무언가에 돌이킬 수 없이 매혹된 사태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를 비밀스럽게 만들며,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고, 매섭게 하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휘감을 수 있는 늪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정된 운명처럼, 친구를 따라간 콘서트에서 케이팝 아이돌 ‘팩 오브 보이즈’의 멤버 문Moon의 불안한 목과 초월적인 춤에 사로잡혀 그를 열망하게 된다. 이후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이 매혹됨에서 비롯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달로의 항해, 혹독한 축복이자 저주의 장면들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Y/N』을 이루는 최초의 조각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는 나를 ...라고 불렀다.”― 『Y/N』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문이고, 화자는 그 아래 관객들 사이에 있다. 문이 화자를 무엇으로 불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유기체적인 동시에 소외적인 ‘대상’이라는 것뿐이다. 이 문장은 이후 초고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나는 종종 그 문장을 떠올려보곤 하는데, 대형 콘서트의 팬들 속에서 화자가 그 명명을 자신과 문 사이의 내밀한 통로로 인식함(즉, 그녀는 “그는 우리를 ...라고 불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뿐 아니라 문이 자신이 무엇인지 선언할 수 있는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그녀의 확신을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비딕』의 첫 문장인)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를 화자 식으로 변용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을 것이며, 문이 그렇게 해주기를 원한다. 아마 나는 이 문장의 정신을 소설 속 다른 인물의 한 대사로 소생한 듯하다. “더는 스스로 생각하고 싶지 않거든.” 그렇다, 가끔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생각은 조악하며 영원히 불완전하다. 나보다 훨씬 더 사려 깊은 존재가 나를 통해 대신 생각해준다면 좋겠다. 다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스스로 생각하지 않음’이다. 지루한 내적 성찰(‘자기 표현’)을 버리고 상상과 허무에 대한 숙고의 행위를 바깥을 향해 추진하는 것. 나는 이러한 공간에서 생겨나지 않는 사람과 예술 작품을 사랑할 수 없다.
화자에 대해 말해보자. 그녀는 29세 여성, 베를린에 거주하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며 추측컨대 헤테로섹슈얼이고 아티초크 통조림 카피라이터로 일한다. 그녀는 이러한 정체성의 표식들이 존재를 설명하는 데 언제나 미끄러짐을 안다. 또한 정체성의 뿌리 탐구에 거의 관심이 없으며 그보다는 어디서든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감각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한국에 사는 삼촌을 오랜만에 재회한 장면에서, 그들은 향수 어린 추억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낯선 사람과 극심한 더위 속에 배정된 이들처럼 함께 땀을 흘릴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삼중의 이방인’ 감각은 독특하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부적절한 현실에 구겨 넣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며 오직 자신의 사랑을 더 기이하고 용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안착할 집을 찾기보다 스스로를 “이르쿠츠크로 추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르쿠츠크로의 추방. 뜬금없이 시베리아의 유배지였던 땅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그녀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과 태도를 전부 함축하는, “진실을 발산하는 한 문장”처럼 읽힌다. (『Y/N』에 가상의 부제를 붙인다면 이 문장이 아닐까?)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왜 그녀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추방하는가? 소설 속 리제의 대사를 빌리면, 왜 “계속 자리를 옮겨” 다니는가?
나는 항상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저항해왔다. 정체성은 확립되자마자,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나 ‘구식의’ 것과 반대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제 발을 쏘는 격이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닳은 의견들과 환상들로 뭉쳐져 떠다니는 무(無)들, 토머스 리고티가 말했듯 ‘어둠 위에 그려진 그림들’일 뿐이다. 한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추측 가능’하다. 나는 맹목적 부정에 회의적이며, 그와 반대로 당신은 오늘 이것이 될 수 있으며 내일은 저것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무한히 자유로운 선택과 가능성의 전망에 역시 마찬가지로 회의적이다. 내 관심은 누군가가 어떻게 아무런 보장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공허에 맞서 진지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지에 향해 있다. 오류와 무지는 피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화자의 모호한 위치성 속에서 나는 가능한 하나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려고 했다. 화자는 팬이면서 팬이 아니고, 외국인이면서 외국인이 아니다. 그녀는 외부에서 내부자의 관점으로 보고, 내부에서 외부인의 관점으로 본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선택들은 그녀를 어떻게든 틈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녀가 팬덤의 일반성에 빠져들 때,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더 낯선 자가 되는 걸까?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별개의 범주로 분리하는 대신, 특수한 것―규칙에 예외가 될만큼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화자가 ‘팬’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녀가 모범적인 팬이 될 수 있는지, 팬으로 정체화하는 팬보다 더 팬이 될 수있는지 알고 싶었다.
소설 중반부에서 화자는 문을 찾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한강, 미세먼지, 맹렬한 더위, 성수동의 앉아서 마실 수 있는 카페와 앉아서 마실 수 없는 카페, 정신 없는 거리, 윙윙거리는 매미 소리와 함께 부조리한 풍경들이 밤의 미학으로 펼쳐진다. 연극적이며 삽화적인 인물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며 사라진다.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동행자 O와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문을찾지만, 사실상 두 사람의 여정은 문 찾기를 빙자한 서성거림에 가깝다. 이 풍경들이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서울에서 1년 동안 살았다. 거기서 서른 살을 맞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다. 할 일이 없어 긴 산책을 많이 했고 야구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나 자신을 순수한 인식의 매개로 축소시킨 채 걸었다. 처음엔 약간 패닉 상태였지만, 점차 익명성 속으로 느릿하게 빠져들었다. ‘알려지고 싶은’ 욕구는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 서울에서 『Y/N』의 초고를 완성했다.
『Y/N』의 인물들은 선형적 시간으로 구획된 삶에 대한 공포와 지긋지긋함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O의 일화처럼 ‘익숙한 길에서 눈 감고 마구 달리기’를 시전할 수도 있겠으나, 일상적으로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무턱대고 걷기가 아닐까. 그래서 이 문장이 인상 깊었다. “너무 많이 걷다가 지쳐 넘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 바람 부는 풀밭이 모질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풍경 같은 문장이다. 화자 또한 엄청나게 많이 걷는 인물이다. 걷다가 신발이 닳아 떨어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신발이 완전히 축날 때까지 평생 걷고 싶은 곳이 있는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걷기Gehen』 (1971)에서: “우리는 더 이상 결정을 내릴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걸을 때, 우리는 가망 없음에서 또 다른 가망 없음으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걷고 항상 더 가망 없는 가망 없음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도망치며 걷기, 도망치며 걷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도망치며 걷기’를 해왔던 것 같다. 비록 내가 거대한 원 안을 걸어왔으며 결국 처음 출발한 곳에서 끝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딘가를 ‘향해 걷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행한 걷기 방식을 보면 배울 점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베른하르트가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항상 고요하게,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걷고 그렇기에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모습을 상상한다. 또한 그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빠른 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쌩하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 나는 로베르트 발저가 산양의 체질을 가졌다고 믿는다. 바람이나 눈 속에서도 계속 걸어간 사람. 정말 너무 많이 걸어 고꾸라진 사람이 바로 그였다. 나의 걷기는 주로 도시에서 이루어지며 스트레스가 많은 경향이 있다. 한번은 내 친구가 자신의 아파트 창밖으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했는데, 내가 멍하니 한 손 주먹을 다른 손바닥에 치고 있었다고 했다.
읽을 때마다 클라이맥스로 여겨지는 순간이 달라진다는 점이 놀랍다. 문과 화자가 만나서 긴장감 어린 대화를 나누다 몸의 접촉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고, 문이 수영 선생님과의 일화를 쓴 편지를 읽는 부분이기도 했고, O가 만든 영상을 바라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모든 장면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가 뒤틀리는 지점들이기도 한데, 이는 “누가 더 현실성 있을까요? 저 아니면 이 사람?”이라는 문의 질문과도 연동되는 듯하다. 당신에게 현실감이란 무엇인지, 특히나 분열적이고도 부조리한 세계에서 온갖 자극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현실과 환상 사이의 얇은 막은 어떻게 뒤섞이거나 겹쳐지는지 궁금하다.
그건 우리가 ‘현실’을 어떤 의미로 보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나는 보통 이 단어를 미지의 적대적인 것과의 충돌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 접착된 사회질서를 의미할 때 사용한다. 이때 현실은 일관성, 확실성, 완성을 가장하기 위해 온 힘으로 모든 걸 한다. 우리는 계속하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 산다는 것은 환상 속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단어는 덜 논쟁적인 의미에서, ‘감각적 경험으로 이루어진 공간’ 또는 ‘결코 알 수 없는 거대한 것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작은 조각’ 같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현실 개념에 따른다면, 현실 자체가 환상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현실로 경험하는 극도의 편파성이야말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실은 그 (비)본성상 항상 암시하고, 불러일으키고, 겉으로 드러나기에 비현실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Y/N』을 화자의 ‘현실감각 상실’에 대한 경고성 이야기로 읽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아니, 그녀는 현실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 문이 함께 속해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지 않고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현실에 ‘불만족’하기 때문에 상상의 호화로운 숲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현실이 끊임없이 숲에 대한 힌트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그 숲의 존재를 인식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현실(‘실제 삶’)이 내 상상보다 덜 흥미롭다거나 덜 강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건 너무도 잘못된 구분이다. 딱 잘라서 ‘망상적인’ 캐릭터를 작업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명확하면서도 꿈꾸듯이 보는, 유쾌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 그들은 주변 환경에 동물적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읽어내고’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큼 과도한 의미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공간은 ‘생크추어리’다. 이곳에는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것들은 집요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과 화자가 왜 이 공간에서 조우하는지에 관해 해석이 다양할 듯한데, 결국 기억하기와 망각하기라는 두 가지 작용으로 수렴할 듯하다.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기고, 문 역시 잊힌 과거로 추정되는 기억을 지닌 듯하다. 생크추어리라는 공간을 어떻게 떠올렸는지 궁금하다.
생크추어리의 환자들은 문과 함께 생활하고 밥을 먹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문의 새로운 밴드 동료들이다. 그들은 문을 안다. 그러나 정신적 무력함(및 세대 차이) 등을 이유로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그가 무엇을 상징하거나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환자들은 문을 알고 문을 모른다―이러한 인식론적 이중성은 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팬들이 문을 알고 모르는 방식은, 생크추어리 환자들의 상황을 음화한 네거티브 사진이다. 팬들은 결코 문과 함께 밥을 먹으며 생활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그가 무엇을 상징하며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화자에게 이 두 가지 인식론적 맥락에서 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매미를 떠올려봐요.” O가 말했다. “음파의 물리적인 현상으로서 매미의 붕붕거림이 있죠. 그리고 그 소음의 신비, 맹렬한 형태 없음이 있고요. 둘 다 그림으로 표현할 순 없어요. 난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걸 그려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는 무언가에 대해 ‘네’라고 말하는 거예요.” O는 그림 그리기, 즉 창작이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을 향한 응답이라고 말한다. 소음의 파도와 완전한 침묵 사이를 흐르는 선. 그 영역에 접속되기 위해, 당신은 읽거나 쓸 때, 혹은 다른 무언가를 할 때 자신을 어떤 상태에 두는가? 무릎 뒤에서 서랍이 열리는 순간이 있는가?
글을 쓸 때 받는 느낌은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하다. 한 음악 작품의 반복적인 내적 구조, 특히 수백 번도 넘게 들은 노래들은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내 일부를 잠재우고 적합한 일부를 일깨우는 효과가 있다. 나는 작업할 때 노래 몇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 어느 아침이든 처음 듣는 음악의 충격은 항상 나를 조금 죽고 싶게 만든다. 너무 즐겁고 너무 슬프다. ‘돌아왔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내가 저편에 갔던 것이 ‘처음’인지조차 말할 수 없지만, 고향에 돌아온 감각만은 틀림없다. 오후 어느 시점이 되면 음악을 끄고 작업을 멈춘다. 그 순간 나는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이곳을 서서히 떠나며, 비겁한 안도감과 함께, 냉장고의 바보 같은 붕붕거림 속에서 온갖 명확한 의무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
* 에스더 이
198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