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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칼 가는 밤

안담의 추천사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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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그러하듯이 대장장이도 무너진 칼을 보고 칼 잡는 이의 습관을 꿰뚫어 본다고 하던데. 한 번쯤 그를 만나 내 칼에 서린 기억을 보여주고 싶다. (2024.06.19)


칼을 갈아야 한다. 칼을 갈아야 해. 숫돌을 사서 칼을 갈아야 해. 새벽에 하는 생각은 여러 가지인데, 칼을 갈겠다는 결심도 자주 떠오르는 화제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 삶이 이 꼴인 이유를 집안 기물의 관리 상태에서 찾아보려는 주간이 돌아왔다. 1년 넘게 갈지 않은 전구, 이전 세입자의 무심한 페인트칠로 얼룩진 문고리, 화장실 습기를 버티지 못하고 썩어가는 나무문, 가스레인지 후드에 모인 기름때, 순결과는 거리가 먼 흰옷들. 그걸 다 그대로 둔 탓에 잘 못 지내고 있는 게로구나. 과연 새벽다운 비약에 사로잡히면 이글이글 타는 마음으로 번쩍 일어나 지쳐 잠들 때까지 청소를 한다. 집안일이 늘 그렇듯이 해야 할 일의 목록은 끝도 없이 길어질 수 있고, 반면 체력과 시간에는 한계가 명확하므로 반드시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생긴다. 우선순위가 낮은 일들, 이를테면 ‘초파리처럼 자연발생 하는 세탁소 옷걸이를 싹 내다 버리고 패션 셀럽이 추천한 좋은 옷걸이 200개 사두기’ 같은 일은 그 대기 리스트에서 지워지기까지 몇 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칼 관리도 그런 일이다. 무딘 칼이라도 쓰자고 마음먹으면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 몇 년 전 지하철을 돌아다니는 잡화 상인에게 홀려 구매한 간이 칼갈이가 있다는 점 때문에 숫돌 사기는 항상 나중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껍질의 밀도와 속살의 밀도가 완전히 다른 토마토 같은 식재료가 이 빠진 칼 아래 뭉개질 때, 또는 제대로 끊기지 않아 아코디언처럼 늘어진 대파 채를 손님의 국에 뿌려야 할 때면 조만간 기필코 숫돌을 사겠다고 이를 갈았다. 칼 갈아주는 트럭을 제때 만나길 소원한 적도 있지만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이제는 안다. 야속하게도 “칼 갈아요-칼-” 하는 그 시원한 목소리는 꼭 내가 집에 없을 때만 들려온다. 의사가 그러하듯이 대장장이도 무너진 칼을 보고 칼 잡는 이의 습관을 꿰뚫어 본다고 하던데. 한 번쯤 그를 만나 내 칼에 서린 기억을 보여주고 싶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썰어서 주었는지, 그러느라 내 손목이 얼마나 아팠는지 낱낱이 들킨 후에 그가 바로 잡아준 칼을 들고 집에 온다면 잠이 잘 올 것 같은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남에 관한 상상은 유혹적이지만, 그래도 내 칼은 내가 갈 줄 알아야 한다. 직접 칼을 갈아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주제에 이런 뿌리 깊은 믿음이 있는 건 순전히 엄마의 영향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늘 칼을 직접 갈았다. 나무 도마에 행주를 한 겹 깔고 숫돌을 올린다. 그 위로 물을 아주 약하게 틀어 숫돌에 물을 먹이면 회색이었던 숫돌이 벼루처럼 검게 변한다. 칼의 안쪽, 그러니까 칼손잡이를 기준으로 할 때 엄지가 닿는 쪽의 날은 많이 눕혀서 갈고, 칼의 바깥쪽은 그보다는 세워서 간다. 칼날이 들썩이지 않도록 칼배에 손가락을 단단히 고정하고 아래위로 일정하게 밀고 당긴다. 숫돌에 비해 긴 칼을 한 번에 다 만질 순 없으니 보통 세 파트로 나누어 가는데, 칼끝부터 밑동까지 고르게 잘 갈기 위해서는 매번 밀고 당긴 횟수를 잘 세어야 한다. 그가 사용하던 숫돌은 거친 면과 고운 면을 모두 가진 양면 숫돌로서 거친 쪽에서 시작해 고운 쪽에서 마무리하는 게 정석이지만, 칼을 오래 방치하지 않는다면 고운 쪽만 써도 충분하다. 나는 그가 칼을 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건 칼을 잡은 그의 손가락과 손목과 팔꿈치의 각도가 흐트러지지 않는 게 하도 신기해서이기도 하고, 갈려 나가는 칼이 내는 오금 저리는 소리가 나를 꼼짝 못 하게 해서이기도 하고, 칼을 다 갈고 파 한 대를 가져와 썰어보면서 씨익 웃는 그 표정이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칼이 무딜수록 더 다친다는 말도 아마 그에게 배웠을 것이다.

얼마 전에 드디어 첫 숫돌을 샀다. 처음에는 대형마트에서 구매하려고 했지만, 괜찮은 칼 한 자루를 새로 사도 충분할 만한 가격에 놀라 도시 빈민의 신세계이자 더 현대이자 갤러리아인 다이소로 방향을 틀었다. 오천 원이라는 감동적인 값에 구매한 내 숫돌은 양면을 헷갈리지 않도록 색 구분이 되어 있고 미끄럼방지 받침대도 딸려 있다. 기억 속의 담백하고 과묵한 숫돌과 비교하면 내가 초보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친절한 모양새다.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어느 밤에 그 숫돌을 꺼내 칼을 네 자루 갈았다. 내 가장 깊은 두려움과 사랑을 전부 일깨우는 악랄한 꿈들이었다. 꿈속에서 나의 아프고 병든 개가 내 동생을 물어버린다. 정부에서는 사람을 무는 이 맹견에게 영원히 잠드는 주사를 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내 동생은 붕대를 친친 감은 팔을 뒤로 숨기며 그런 사고는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필사적으로 잡아뗀다. 그러나 칼을 갈면서 꿈을 곱씹으면 필시 다친다. 사랑도 상처도 잠시 잊고 다만 내가 방금 칼을 스무 번 밀었음을, 서른 번 밀었음을, 서른세 번 밀었음을 똑바로 세어야 한다. 칼날이 바로 서는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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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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