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재난이 다가와도 우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박진영 칼럼 - 3화
정치권의 관심은 미약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희망을 찾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힘을 모으는 기후정치를 향한 활동과 목소리는 점점 끓어오르고 있다. (2024.04.11)
재난의 시대, 사회적 연대를 고민하는 박진영 연구자의 에세이.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
이 글을 쓰는 지금, 막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났다. 67%라는 32년 만의 총선 최고 투표율 속보, 시시각각 올라오는 접전 지역의 결과를 예측하는 기사, 환호가 가득한 또는 무겁게 가라앉은 현장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진을 멍하니 보다 이내 브라우저 창을 닫는다. 정책 부재, 국정 안정, 정권 심판, 검찰 개혁… 이번 총선의 핵심 단어들을 떠올린다. 미래보다 과거. 그 어떤 선거보다 미래를 약속하는 구호보다는 지나온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를 심판하기 위한 공약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미래를 향한 희망이 되는 단어를 찾는다면 나는 ‘기후’를 꼽겠다. ‘기후 유권자’부터 ‘기후 투표’, ‘기후 선거’까지. 기후 위기라는 재난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다루어지며 “기후정치”를 부각한 선거였다. 기온 상승과 폭염, 폭설, 산불과 같은 전세계적인 이상 기후 현상을 겪으며 기후 위기 문제가 대두된 이후, 한국에서도 기후 위기 문제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한 요구가 커졌다. 이러한 기후 운동 진영에서는 2020년 21대 총선, 2022년 20대 대선에서 ‘기후 총선’, ‘기후 대선’을 내세웠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기후 운동 진영에서는 이전의 기후 선거 경험을 토대로, 기후 위기를 정치 의제로 만들기 위해 더 활발히 활동했다. 몇 가지 노력을 소개해 본다.
녹색전환연구소, 더가능연구소, 로컬에너지랩 등이 모인 ‘기후정치바람’에서는 작년 5월부터 기후 문제를 선거에서 중요한 의제로 만들기 위한 대규모 여론조사를 기획했다. 1월 22일 발표된 전국 1만 7,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기후 위기 인식 여론조사 결과, ‘기후 위기 대응 공약이 마음에 드는 후보가 있다면 평소 정치적 견해와 달라도 투표를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라는 응답은 62.5%였다. 조사 결과 포착된 기후 유권자 집단은 33.5%였다. 기후정치가 일부의 공허한 바람이 아니라, 유권자가 피부에 와닿게 느끼는 현안임을 보여준 것이다.
정치권의 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2월 14일 기후정치시민물결 일동은 〈기후정치 원년 시민 선언〉을 발표했다. “기후가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 1994년 우리는, 2024년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게 될지 예상할 수 있었다. 2024년 우리는, 2054년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게 될지 알지 못한다.” 이 선언에는 2024년을 기후정치 원년으로 선포하고 모든 정당이 22대 국회가 ‘기후 국회’가 될 수 있게 기후 위기 대응에 발맞춰 책임 있는 입법 활동을 할 후보를 공천해야 하고, 온실가스 감축과 재난 대응 체계 구축 등을 포함한 기후 위기 대응을 최우선의 공약으로 발표하라는 시민의 요구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기후정치에 관한 정치권의 반응은 아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4월 4일 기후정치바람, 기후정치시민물결, 기후변화청년모임 빅웨이브 등 16개 국내 기후환경단체가 지역구 후보 696명의 공약 중 기후공약이 있는지 전수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체 254개 지역구 696명 후보자 중 4분의 1이 안되는 168명(24.1%)만이 기후 공약을 제시했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은 기후 공약보다 훨씬 많은 개발 공약이었다. 공항 건설 추진, 철도/도로 지하화, 주차장 확대, 그린벨트/상수원/고밀도 개발 등의 공약은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개발 공약은 환경과 기후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공약들이다.
이 조사에 참여한 단체들은 당선자 확정 이후 당선자들의 기후 공약을 모아 다시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은 총선 이후 활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기후 유권자 운동을 평가하고 22대 국회가 기후 국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 한다. 조사 결과 발표 내용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었다. “시민들의 기후 행동이 활발한 곳에서 후보들이 기후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제22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쓰는 이 글은 투표를 독려할 수도, 선거 결과를 발빠르게 논평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의 삶과 정치, 재난에 맞서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고 계속되어야만 하므로, 나는 지금 다시 기후정치를 얘기한다. 정치권의 관심은 미약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희망을 찾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힘을 모으는 기후정치를 향한 활동과 목소리는 점점 끓어오르고 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요구하고 목소리를 낸다면 정치는 그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응답해야만 한다.
기후정치 바람은 이미 불기 시작했다. 우리의 더 많은 관심과 지지와 감시와 요구가 각자의 자리를 더 뜨겁게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기후정치 바람은 더 거세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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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학 연구자.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같은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지식 정치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환경과 보건의 교차점에서 과학기술, 사회운동, 정치를 주제로 연구한다. 저서로 『재난에 맞서는 과학』, 『대한민국 재난의 탄생』(공저), 『재난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와 실천』(공저)이 있고, 《한편 13호 집》에 글을 실었다. 현재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공해와 지역 환경재난을 사례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