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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성실하게 모순적일 필요에 대하여 - 『존 포드론』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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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하필 지금 여기에 이렇게 나타난 걸까?’란 질문은, 물론 비판적 태도에 있어 항상 견지해야 할 본질적인 물음일 것이다. (2024.02.23)


‘이게 왜 하필 지금 여기에 이렇게 나타난 걸까?’란 질문은, 물론 비판적 태도에 있어 항상 견지해야 할 본질적인 물음일 것이다. 가령 “항상 역사화하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역사적 사건을 우위에 두라는 식으로 너무 자주 오독/오용되는) 정언명령. 하나 가끔씩은 비판적 태도를 넘어 순전한 놀라움 속에서 이 질문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이란 말을 비웃듯 뻔뻔하게 시대착오성을 몸에 두르고 현현하는 작품들. 개중엔 이시다 타츠야의 <Sinfest>처럼 기독교적 우파의 열정을 뜬금없이 되살리는 사례도 있고, 배리 윈저-스미스의 『괴물들(Monsters)』처럼 오랜 세월에 거쳐 제작되면서 자연스레 당대성을 비켜 간 사례도 있으며, 리차드 도슨의 <The Ruby Cord>처럼 선형적인 시대구분 자체에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사례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일본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이자 영화 평론가인 하스미 시게히코의 『존 포드론』이 바로 그런 ‘가끔씩’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솔직하게 물어보자, 이 시기에 대체 웬 존 포드란 말인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저 ‘신화’로서 지위를 잃어가는 때에, 그것도 아흔을 바라보는 대가의 만작(晩作)을, 『세계를 향한 의지 -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됐는가』『레오나르도 다빈치 - 그와 함께한 50년』처럼 셰익스피어나 다빈치에 대한 필수적인 책들마저 금방 절판되는 여기 한국에서? 커버와 내지 디자인마저 시대착오적이라 할 이 기획에 대해선 이런저런 의아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가능한 답안을 우리 독자들의 선에서 떠올려볼 수는 있을 텐데, 먼저 『존 포드론』은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오즈 야스지로와 함께) 하스미 자신의 평생의 문제 중 하나로서 존 포드에 대한 늦었으면서도 성급한 결산일 것이다. 비평가로서 궤적이 막 시작된 1970~1971년 즈음에 이미 그는 포드를 경유해 영화의 한계를 논하는 문장들을 숱하게 남겼었고, 한편으론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실례되는 표현을 무릅쓰자면) 마지막 불꽃을 피우듯 이 책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연달아 출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아가선, 영화와 관계 맺는 법을 좀 제대로 배우라는 긴급하고도 필사적인 요구가 여기 녹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영화 교육자로 여기며 오랫동안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사적인 무지(…)를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내는 (…) 사회 그 자체의 교육적 힘”(『영화의 맨살』)에 나름대로 맞서 온 하스미 시게히코는, 미국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름인 존 포드를 보지 않은 이들이나 존 포드에 대한 상투적인 오해를 (재)생산하는 이들이나 따로 또 같이 ‘아직까지도’, ‘감히’, ‘태연하게’ 영화를 논하고 있다는 현실에 분노를 참지 못해 이제라도 『존 포드론』을 완성하고야 만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얘기하면서 하스미의 예민한, 아니 괴이한 관찰력만을 찬양하는 이들은 모두 멍청하다는 말을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그의 또 다른 국내 신간이자 대표작을 의식하며 말하자면) ‘범용한’ 멍청이들일 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더듬어야 할 것은 하스미의 능력이나 화법이 아니라 존 포드를 (경유해 영화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며 또 그 속에서 드러나는 존 포드의 방법인 게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다. 왜냐하면 하스미는 독자가 추후에 활용할 만한 비평적 체계랄 게 비가시적이거나 아주 분산적인 데다, 특유의 오만하고 호사스러운 화법 때문에 오히려 ‘범용한’ 멍청이들에게 지나친 용기를 주곤 하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과거의 나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존 포드론』을 읽을 여러분을 위해 그의 과격한 표층적-주제론적 비평(작품의 세부적인 요소들에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아우르는 모종의 체계를 도출해 내는 글쓰기 전술)이 어떤 인식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지 논할 필요는 있을 성싶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스미론이 아닌 『존 포드론』 서평이기 때문에) 아주 거칠게 정리하자면, 하스미에게 있어서는 ‘영화가 세계를 어떻게 재현하느냐’가 아닌 ‘영화가 세계를 어떻게 허구화하느냐’가 문제다운 문제가 된다. 즉 현실적인 것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허구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양자의 기준으로서 보편성 자체를 내파(內破)하는 것이야 말로 그에게는 ‘정치’의 영역에 대한 진정으로 급진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정치’란 말을 꺼낸 것은, 1993년 타카하시 겐이치로와의 대담에서 하스미가 “정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것을 부상시키고 싶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의 부자유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자유에 가깝다고 단언할 때, 또 ‘국민국가’나 ‘현실’의 조건이 반영되는 장면을 몹시 부정적으로 묘사할 때, 또 선제적인 내면/생각에 호소하거나 기대지 않는 전적으로 시각화된 기호들을 고집스레 옹호할 때, 거기엔 각각의 미시적인 허구로써 결정되고 작동하는 보편성에 대한 (과도한 수준의) 인식이 깔려 있다. (실험영화나 ‘예술가적(Artistic)’ 영화에 대한 하스미의 오랜 폄하는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가능한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장치로서 허구에 대한 예찬이랄까? 인물이 아닌 인물의 옷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하거나, 병원을 무대 삼은 에로영화를 뱀파이어물로 읽어버리는 그 특유의 황당무계한 인상비평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입장의 실천적인 ‘우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의 한 장면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존 포드론』의 구조는 퍽 단순하고 (적어도 하스미의 오랜 독자들에게 있어선) 익숙하다. 존 포드를 둘러싼 반응의 흐름을 구체적이고도 속도감 있게 짚고 넘어간 다음, 그는 동물들의 가지각색의 역할과 취급, 세계 구석구석을 홀연히 자극하는 나무의 존재감, 인간들의 부자연스러운 몸짓 등의 (참으로 안티-휴머니즘적인) 주제를 포드에게서 추출해내 영화의 체계를 통째로 재구성한다. <나의 계속은 푸르렀다>에서 걷지 못하던 소년이 걸을 수 있게 되는 건 화면의 좌우를 장식하는 “굵은 나무줄기[가] (…) 회복을 보증하”(123쪽)고 있기 때문이고, 연인들의 로맨스는 심리적인 갈등이 아니라 우산에 대한 레인코트의 우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포드에서 법정이란 진실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리라기 보다 부당하게 ‘유폐’된 자들을 풀어주기 위한 의식에 걸맞은 특권적 공간”(214쪽)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상이 불가사의하게 변이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스미의 비평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혹은 평론가들에겐 두려운) 경험을 준다.

하지만 명심하자, 하스미의 비평이 이런 파격적인 재구성을 설득력 있게 전개할 수 있는 건 포드의 영화들에 그를 위한 재료(material)들이 이미 풍요롭고도 내밀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임을. (여기서 최원의 「[데리다의 엽서] 두 번째 엽서」나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 같은 텍스트들이 떠오르기는 하나 당장은 언급만 하는 것으로 넘어가자) 하스미가 종장의 제목을 (해당 장의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포드에 대한 논의를 끝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굳이 지은 건 아마 이 때문이리라. 하스미에게서 넘어와 내가 좋아하는 포드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중에는 <돌아가는 증기선>에서 톱으로 ‘Home Sweet Home’을 연주하는 장면이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삼각관계가 사실상 정리되는 장면처럼, 뜬금없는 숏을 삽입하거나 한 숏의 구도 혹은 길이를 애매하게 조정하는 단순한 방식으로써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을 강력하게 환기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렇듯 포드의 영화들은 세계를 허구화하는 단순하고도 탁월한 수법들이 다양하게 실험된 가멸찬 장(場)인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진진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앞뒤가 안 맞거나 서로 상충되는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물론 태그 갤러거의 저 유명한 존 포드 연구서의 제목을 “그 사람과 영화”라고 썼다가 “그 인간과 영화”라고 썼다가 “그 사람과 작품”이라고 썼다가 갈팡질팡하는 식으로 책 전체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초보적인 번역 및 교정 오류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한국어판 서문에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특별히 뛰어난 포드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14~15쪽)라고 썼지만 맨 뒤에 가서는 “그 절망적일 정도로 범용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매우 중요한 작품”(334쪽)라고 쓴다든가, 포드의 전기적인 사실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호방하게 선언한 것이 무색하게 뒤에서 포드의 성생활에 대해 한참 떠들다가 “모린 오하라나 캐서린 헵번과 그가 육체관계를 가졌는지 아닌지 같은 건,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니, 애초에 그것을 알 권리조차 우리에게는 없을 터이다.”(330쪽)라고 뻔뻔하게 결론을 내린다든가, <수색자>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데비의 추격씬을 거의 다르게 풀이한다든가… 아무리 이게 서로 다른 시점(視點/時點)에 속한 글들을 묶어 다듬은 책이라고 해도, 이런 난잡한 서술은 사실 정합성을 추구하는 책이라면 조소의 대상이 되어 마땅할 문제점일 게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개를 이 『존 포드론』에 붙잡아 두는 것은, 이 난잡한 서술의 주인공으로서 존 포드 역시도 모순으로 가득 찬 작가였단 사실이다. (‘인간’ 존 포드도 그랬지만) 나는 지금 ‘영화감독’ 존 포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청년 링컨>의 의도적인 불균형, 혹은 <과묵한 사나이>의 카니발적인 다성성. (이와 관련된 얘기는, 아마 읽기 싫을 수 있겠으나 허문영의 「존 포드 이야기」를 참고하시라) 영화적 이미지랄 것의 성립에 상관하는 모순적인 조건들을 과감히 미학화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타진한 인물로 우리는 포드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 포드론』은 결코 하스미의 새로운 걸작이라 할 수 없겠으나 ― 솔직히 그가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태그 갤러거의 『존 포드』가 아직까진 더 ‘에센셜’하다 ― 정교하면서도 모순적인 두 괴이한 정신이 고스란히 조우하고 교차한 결과로서 괴작이라고는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런 퍼포머티브한 괴작을 읽는 것 역시도 비평을 읽는 한 재미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담 한 가지. 『존 포드론』에 대한 얼마 안 되는 국내 평들이 꼭 책의 발행인이자 한국 최고의 영화평론가라 할 임재철을 직간접적으로 거론하고 있길래, 나도 한 번 그를 소환해 보고 싶다. 하스미는 여기서 포드의 수많은 영화를 한 번씩이라도 거론하나, 이상하게도 유독 다큐멘터리들만큼은 거의 없는 것 마냥 책 안에서 지워버리고 있다. 그것도 포드의 궤적에서 보통 중요한 게 아니고, 동물이나 무언가를 던지는 제스쳐처럼 하스미가 논한 주제도 확실히 활용되는 전쟁 다큐멘터리인 <미드웨이 해전>이나 <여기는 한국!>까지 말이다. 여기서 되돌아보니 <기병대>란 영화에 대해 “이것은 ‘남북전쟁’을 제재로 하고 있는 전쟁영화니까,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거의 동시대의 풍속이 그려져 있으므로, 우선 이것을 그 범주에 덧붙여 둔다.”(163쪽)라고 덧붙인 문장이 영 께름칙하게 느껴진다. ‘군사영화’ 감독으로서 포드를 되새길 필요를 역설하던 임재철은 과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을 편집하고 검토하면서 그도 내심 불만을 갖지는 않았을까? 그의 의견이 궁금하다.


존 포드론
존 포드론
하스미 시게히코 저 | 박창학 역
이모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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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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