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책상 위에는 (얼마 전에 원고 마감과 청소를 한 덕분에)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올해 한국어로 쓰이고 출간된 영화 관련 서적 중 가장 중요한 책일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이며, 다른 하나는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번역-)출간된 여러 서적들 중 단연 눈에 띄는 베냐민 발린트의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이다. 보통 책은 한 권만 읽을 때보다 두 권을 같이 읽을 때 세부적인 주제를 (조화로든 충돌로든) 더 명징하게 더듬을 수 있는 법인데, 가령 린다 콜리의 『총, 선, 펜』과 앨리슨 케이퍼의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를 함께 읽으면 여성과 법 사이의 불균형적인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과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를 함께 읽으면 ‘자연’과 ‘경제’의 역학에 대한 동시대의 논증들을 보다 꼼꼼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도둑일기』와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저작권이 그저 ‘작품의 주인이 누구인가’ 수준을 넘어선 심각한 딜레마를 내포한 문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예컨대 다음의 구절들. “한국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서비스되고 있는 상당수의 고전 영화들과 몇몇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경우에, 정품과 불법 복제판(리핑판)의 경계가 기실 희미하다”(『영화도둑일기』, 18쪽), “카프카를 (독일어를 지키는 유대인 청지기로서, 그리고 나치에 희생당했을 시점이 오기 전에 사망한 유대인으로서) 다시 독일의 울타리 안으로 데려온다는 것은 과거의 도덕적 오점을 제거하는 방법이자 추락한 위신을 회복하는 방법이며, 히틀러와 괴벨스의 허무주의적 악다구니로 오염되기 전의 독일어를 되찾아올 방법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하다.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에 양념이 되어줄 또 하나의 아이러니―자기 비난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를 자기변명의 수단으로 이용한다는―가 여기 감추어져 있다.”(『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240쪽)
이렇듯 저작권은 그것을 수호하겠다며 나서는 이들에게조차 제멋대로 뒤죽박죽 활용되곤 하며, 그 근간에는 가성비의 논리도 있지만 정치적 정당성의 논리도 있으며 또한 (그럼으로써) 미학의 성질을 건드리는 논리도 있는 것이다. 하나 아직까지 우리에겐 크게 두 가지 길만이 길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저 저작권을 준수하거나, 그저 저작권을 우습게 여기거나. (허구한 날 '자본주의의 폐해'를 입에 올리면서 정작 본격적인 온라인 해적질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식'의 입장에 선 자라면 실정법 내지 '상식'으로서 저작권을 응당 실천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이에 대해 이 자리에서 자세한 얘기를 풀고 논박하는 것은 분명 큰 무리이리라. 그러니 오늘은 '논쟁을 위한 서설' 격으로, 근현대 예술사에서 저작권을 둘러싼 담론에 관해 흥미로운 두 가지 사례를 한 번 소개해 볼까 한다.
첫 번째는 옐로우 키드(Yellow Kid)의 사례다. 1896~1897년 미국 뉴욕의 주요 언론들 사이에선 아주 치졸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중심에는 한 캐릭터가 있었다. 그 이름은 옐로우 키드로, 훗날 근대 만화의 시초로 흔히 여겨지는 금자탑격의 작품 <옐로우 키드>의 주인공이다. 신문의 교육성에 대한 믿음과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믿음을 (다소 모순적으로) 함께 가졌던 <뉴욕 월드>의 사주 조지프 퓰리처와, 미국-스페인 전쟁을 야기한 원흉으로 꼽히는 <뉴욕 저널>의 사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신문의 유명세에 있어 치열히 경쟁을 벌이며 정보, 표현, 편집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저널리즘을 더더욱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바꾸어 갔다. 그러던 와중에 <뉴욕 월드>에서 1895년부터 연재된 리처드 F. 아웃코트의 일러스트 겸 초기 코믹 스트립 시리즈 <호건 골목(Down in Hogan's Alley)>이 소년 캐릭터 옐로우 키드와 함께 (순전히 옐로우 키드를 보기 위해 <뉴욕 월드>를 구매하는 독자들이 다수였을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끌자, 허스트는 직접 지시를 내려 아웃코트를 갑자기 <뉴욕 저널>로 스카우트했으며 또한 옐로우 키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계속 그리게 만들었다. 물론 상도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하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서, 이를 안 퓰리처는 조지 럭스라는 화가에게 <호건 골목>을 더 그리게끔 시켰을 뿐만 아니라 <뉴욕 월드>가 미리 따낸 옐로우 키드의 특허권을 내세우며 다시금 옐로우 키드를 <호건 골목>에 출연시키도록 했다. 즉 한 인기 캐릭터가 같은 시기에 두 개의 신문에서 서로 다른 작가에 의해 등장한 것이다. 직접적인 소송으로 비화되진 않았으나 이미 개싸움이 된 경쟁은 (바로 이 때문에 옐로우 키드의 인기가 사그라든) 1897년까지 약 1년 동안 이어졌으며, 당시의 다른 신문 <뉴욕 프레스>의 어빈 워드맨은 이 우스운 스캔들을 두고 '황색 언론(yellow press)'이라 부르며 비꼬았다. 그래, 바로 여기서 오늘날의 용어 ‘옐로우 저널리즘’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의 중심에 있던 옐로우 키드는, 100여 년 후 한국에서 홍은영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런 것처럼 저작권이 작가로부터 유리될 때 일어나는 파국의 대표 사례로도 기억되게 되었다. 당연한 결과다. 한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작권이 작가 개인으로부터 유리되는 게 반드시 나쁜 일일까? 나는 지금 슈퍼맨과 배트맨에 있어 DC가 지닌, 혹은 <닥터 후>에 있어 BBC가 지닌 지적재산권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경우 저작권의 유리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용자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지고 지지를 얻던, 개성과 설득력을 지닌 파생작품에 있어 '원본'의 지위를 법적·상징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럼으로써 캐릭터의 가능성을 일찍 소진시킨 옐로우 키드의 사례와 달리 캐릭터의 가능성을 갱신할 여지도 있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중요한 건 저작권이 작가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리되었느냐일 테지만 말이다. 하여튼,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어야한다'는 명제가 그 자체로 윤리적 당위성을 지녔는지 한 번쯤 의심해 볼 필요는 분명 있으리라.
두 번째는 오슨 웰스의 사례다. 흔히 ‘그’ <시민 케인>의 창작자로 유명한 웰스는 한편으론 미국 영화사에서 저작권에 관해 가장 격렬한 수난을 평생, 아니 심지어 죽고 나서도 겪은 기구한 인물이기도 한데, <위대한 앰버슨가>, <상하이에서 온 여인>, <악의 손길> 등 그가 할리우드 자본을 통해 만든 장편 영화들이 그의 의도와 무관한 편집본으로 개봉해 그의 절망을 부추겼다는 것은 이젠 거의 상식이며, 사후에는 그의 저작권이 딸 비어트리스 웰스와, 생애 후반의 연인이자 예술적 동지 오야 코다르에게 나누어져 두 사람이 다투면서 ―하지만 정확히는 비어트리스가 거의 훼방을 놓으면서― 작품의 복원과 공개가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한, 그러나 끝없이 실패한 웰스. 이런 면에서 그는 확실히 세간에서 말하듯 ‘저주받은 작가’에 속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오슨 웰스 발견하기(Discovering Orson Welles)』에서 이런 견해가 후대의 이중적 신화화에 따른 것이라며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넓게 보면 그가 활동했던 40~50년대 할리우드에선 감독이 최종편집권을 쥐는 게 더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애초에 웰스는 투자 자본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자기 영화에 있어 다양한 판본을 만들었다는 게다. 달리 말해 웰스는 환경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작품의 완전한 통제와는 거리가 먼 예술가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웰스 자신의 영화에 줄곧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즉 주인공이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사건. 당장 <시민 케인>을 떠올려 보라. 이야기에 있어선 세상 모든 것을 자기 통제 하에 두려 한 광폭한 남성이 정신적 추락을 향해 질주하고, 플롯에 있어선 직접 말할 수 없는 주인공에게서 발언권을 빼앗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주인공의 삶을 재구성하며, 미장센에 있어선 주인공의 의지를 무시하는 몸짓과 사물이 도처에 우글거리는 이 영화부터 이미 웰스는 주인공의 주인됨을 모든 층위에서 박탈하는 잔혹한 세계관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의 영화가 뒤로 갈수록 그로테스크한 외양을 띈 것은 아마도 이런 세계관 때문이리라. 하여 마지막 장편 영화인 <바람의 저편>에 이르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해) 영화의 모든 이미지가 캐릭터들에 의해 ‘채집’된 것이라는 설정을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수준까지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웰스는 한편으론 자기 영화의 통제를 가능한 한 추구한 동시에 한편으론 그러한 통제의 불가능성을 줄곧 외쳐왔다고 말이다. 요컨대 저작권을 경멸하는 동시에 희구하기. 이는 언뜻 모순적인 태도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요즈음에 이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적극적으로 체화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걸 떠올리면 아주 그렇지도 않을 터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태도는 자신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다룬다는 걸 인지하는 이들의 전유물은 아닐까? “완성된 영화는 아주 많은 영상과 그 영상들을 몽타주한 것 중에서 편집자가 취사선택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 영화의 이러한 수정 가능성은 영화가 영원성이라는 가치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과 관련한다.”(발터 벤야민, 신우승 옮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물론 벤야민은 후대의 인간들이 그런 포기의 방식으로 가치를 추구할 줄은 예상치 못했겠지만 말이다.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