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담의 추천사] 싱어송, 라이터
안담의 추천사 2화
싱어송, 라이터라고 읽는다면 이 단어는 청유형의 문장으로 변한다. Sing a song, writer. 노래해라, 작가여. (2024.02.07)
싱어송라이터를 싱어송, 라이터로 끊어 읽고야 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가수이면서 곡도 쓰는 재능 많은 이를 일컫는 말인 싱어송라이터는 Singer와 Songwriter를 합친 단어이므로 싱어, 송라이터로 끊어 읽어야 올바르다. 싱어송, 라이터라고 읽는다면 이 단어는 청유형의 문장으로 변한다. Sing a song, writer. 노래해라, 작가여. 이렇게 발음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카펜터스의 유명한 노래 <Sing>의 첫 소절을 흥얼거리게 된다. 싱- 싱 어 송- 싱 아웃 라우드- 모종의 이유로 자꾸 노래해야 하는 사정이 생기는 작가를 상상한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란들 거부할 도리가 있을까? 어느날 캐런 카펜터의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하라고 명령한다면….
그런 음성이 들려온 적은 없지만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노래를 배우러 간다. 돈이 없을 때는 격주에 한 번으로 수업 일정을 조정해 가면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취미다. 선생님은 소리샘으로서의 몸과 목을 새로이 감각할 수 있도록 풍부한 비유를 쓴다. 그의 말에 따라 나는 내 발성기관을 풍선으로도, 계단으로도, 밀가루 반죽으로도 여겨보는 연습을 한다. 목을 목이라고 생각하면 나오지 않는 소리가 있다. 서른두 살처럼 굴 때는 닿지 않고, 여섯 살처럼 굴어야지만 닿는 음이 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그 단어를 여러 소리로 발음해 보는 데는 방해가 된다. 지식과 경험이 소리를 그르친다. 그러므로 수업 시간 내내 나는 모르기 위해 힘을 쓴다. 나에 관해서든, 나의 몸에 관해서든, 안다는 생각을 부지런히 잊는다. 어릴 적에는 노래를 곧잘 했다는 사실도 잊어야 할 것의 목록에 든다. 한 번도 잘해본 적 없는 일을 배우는 마음보다 한 번쯤 잘해 본 적이 있는 일을 배우는 마음이 더 어지럽기 때문이다.
아이답게 성대가 튼튼했던 시절에는 하루의 반절을 노래하며 보냈다. 노래가 슴슴하다 싶으면 박자를 살짝 꼬집었다 놓는 담력이 있었고, 목소리를 크게 내고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남의 말씨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놀이는 부끄러움보다 즐거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아니라 그때-거기의 사람으로 사는 시간이 좋았다. 살아본 시간의 몇 곱절은 되는 세월을 노래 속에서 보내고 돌아와도 현실에서는 5분 남짓한 시간만이 흘렀을 뿐이다. 내 몫이 아닌 삶을 훔쳐 살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야, 여러 노래를 부르며 여러 사람으로 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떤 날에는 스무 살 학생의 마음으로 선생님께 이런 편지를 쓴다.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크레용을 쥐는 법부터 향수를 뿌리는 법까지 가르쳐준 이에게’. 어떤 날에는 엄마를 여의고 별님과 달님의 나라로 간다. 가는 길에 아기 염소와 친구가 되고, 치자꽃 두 송이를 꺾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 그가 끝내 나를 배신한다고 할지라도.
한동안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래를 부르며 쿠바에서도 살았다. 이브라힘 페레르의 목소리는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고단함’의 정수를 가르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많은 노래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있게 외우는 곡은 <Chan Chan>이었다. 도입부는 아직도 부를 수 있다. 댤토 쎄드로 보이 빠라 마까네, 레고 꾸에또 보이 빠라 마야리. 그리고 한 번 더. 댤토 쎄드로 보이 빠라 마까네, 레고 꾸에또 보이 빠라 마야리. 뜻은 알 수 없어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찾아오는 까닭 모를 피로감이 좋았다.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 가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알토 세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네, 쿠에토에 도착해서 마야리로 가네.
알토 세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네, 쿠에토에 도착해서 마야리로 가네.
시간이 흘러 내가 된 것은 나 한 명이다. 꽃 피고 뻐꾹새 우는 마을에서의 삶을 나는 모른다. 내 연인의 이름은 미셸도 찬찬도 아니다. 마르카네에도, 마야리에도 갈 일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 모든 것에 관해 쓴 노래를 부른다. 목 놓아 불러도 어떤 사람은 오지 않는다. 거듭 노래해도 어떤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른다고 다 온다면 버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가 맘처럼 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을 잊어버리고서 내 목소리를 매주 새로 배운다. 내게 ‘Sing a song.’이라고 속삭이는 유일한 목소리에 대해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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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