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앤드루 포터에 관한 이론 - 임경선 작가
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
단편들의 일인칭 화자 주인공인, 다양한 직업과 상황에 놓인 사십대 남자들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물리학 교수 로버트(혹은 소싯적의 로버트)를 어딘가 조금씩 닮아 있었다. (2024.02.01)
내가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은 건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좋다고 한창 소문이 자자했던 후의 일이었다. 당시 작업하던 장편소설에 대해 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불쑥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어보라고 했던 것. 좋아하는 작가의 스펙트럼이 매우 좁은, 편향적인 독자였던 나는 반신반의하며 책을 펼쳤는데 속절없이 바로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특히 「코요테」 「외출」 그리고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좋았다. 그 작품들은 내가 소설에서 바라는(다른 말로는 남의 소설로 읽고, 나의 소설에 쓰고 싶은) 모든 주제―상실과 소외, 체념과 받아들임,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최선의 진심을 다한 사랑―를 아우르고 있었는데 특히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세 남녀 주인공들 각각의 사랑이 너무나 이해가 되어 마음 아팠던 게 기억난다. 단편소설 하나가 이토록 사람에게 먹먹하고 아득한 감정이 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 소설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들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독자라면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정.말.로. 해본 사람일 거라고 감히 생각하기도 했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들이 또 신기했던 것은 그 특유의 물 흐르듯 읽히는 가독성이다. 보통 영미권 단편소설을 읽다보면 어딘가 ‘번역된 책’, 혹은 더빙된 외화를 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의 소설에는 그런 거슬림이 없었다. 문체와 서사가 장식이나 힘 들어간 부분 없이 진솔하고 담백해서 그런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역시 아무래도 작가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앤드루 포터가 제1세계 백인 남성 작가의 어떤 전형성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등학생 때 어여쁜 치어리더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교내 미식축구 선수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눈에 띄고 인기 많은 ‘잘난’ 남학생도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남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어른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성정을 가진 사람이겠지’라는 막연한 상상을 혼자 하다가 작년 여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직접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조곤조곤 느릿느릿 여러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그중에서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정말 공들여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일, 주인공이 아닌 소외된 등장인물(“lonely voices”)에 대해 쓸 때의 큰 기쁨, 소설에서 서사보다 인물묘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단편소설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고백, 작가라는 인간들은 무척 취약하고 여리다(“very fragile”)는 확신에 찬 주장이 가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진짜는 그후에 일어났다. 북토크가 끝나고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독자들은 자리를 옮겨 길게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당시 오른발에 깁스를 했던 나는 그냥 앉아서 쉬다가 맨 마지막에 사인받자 싶어 대각선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사인회가 돌아가는 양상을 내내 관전했다. 사인회 첫 독자부터 시작해 한 사람 한 사람과 어찌나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오랜 시간 사인을 하는지…… 감탄과 동시에 반성도 했다. 이제 슬슬 줄이 끝나가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면 어디선가 독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줄에 합류하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도 대기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고, 사인회는 어느덧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나갈 참이었다.
처음엔 여유롭게 엄마 미소 지으며 사인회 풍경을 바라보던 나도 점차 안절부절못했다. 당연히 나보다 훨씬 고생하던 앤드루 포터는 점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미소 짓는 것조차 힘겨운 눈치였다. 중간중간 콜라를 들이켜며 당 보충을 하긴 했지만 나와 동갑내기인 이 작가는 명백히 위태로워 보였다. 행여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보통은 사인회 줄이 턱없이 길어진다 싶으면 작가는 눈치껏 중간부터 사인을 최대한 짧게 하고 스몰토크 따위는 생략한다. 한데 시차 적응도 채 못했을 이 작가는 첫 독자에게 쏟았던 정성을 마지막 독자(=나)한테까지도 똑같이 베풀고 있었다. 마침내 차례가 왔을 때 내 첫 마디는 “괜찮아요?”였다. 그는 누가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진짜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괜찮아요! 시차 때문인가 봐요”라고 그는 센 척을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작가는 머나먼 동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119 응급차에 실려 병원 신세를 지고 마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걱정은 찰나, 그 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이 순하고 요령 없는 작가가 더 좋아져버렸다.
어찌 되었든 그는 무사히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의 집으로 무사 귀환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반년 후, 신작 소설집 『사라진 것들』이 출간되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열광했던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목 빼고 기다렸을 그의 두번째 소설집. 나는 열다섯 편의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을 매일 밤 자기 전에 한두 편씩 아껴가며 읽었다. 단편들의 일인칭 화자 주인공인, 다양한 직업과 상황에 놓인 사십대 남자들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물리학 교수 로버트(혹은 소싯적의 로버트)를 어딘가 조금씩 닮아 있었다. 섬세하고 점잖고 낭만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소심하고, 관계에 주저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그렇다, 여자를 애간장 태우는 그런 남자. 그 남자들은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 젊음과 청춘, 꿈과 가능성 등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진장 ‘애쓴다’. 이미 초반에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으면서도 끝까지 무모하게 안간힘을 다했던 사인회장의 앤드루 포터처럼.
『사라진 것들』에서는 강인한 자아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들도 대거 등장한다(특히 「넝쿨식물」 「첼로」 「벌」 「사라진 것들」의 여성 캐릭터들이 생생하다). 주로 예술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그녀들은 당차고 이지적이며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런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성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덜 유능하고 불쌍한(?) 존재들처럼 비춰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그녀들을 진실되게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눈치를 보고, 다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기꺼이 휘둘림을 당하는 이 한심한 남자들을 나는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시키지도 않은 무리를 혼자 다 해놓고, 결국 응급실에 실려가서 여러 사람 걱정시킨 다음에 “나 그땐 진짜 무진장 아팠는데 그래도 다 나아서 집에 잘 왔고 서울에선 정말 끝내주는 시간 보냈어!”라고 해맑게 답신을 주던 앤드루 포터를 닮은 그들을.
*필자 | 임경선 소설가 12년간의 직장생활 후, 2005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가만히 부르는 이름』『곁에 남아 있는 사람』,『나의 남자』, 『기억해줘』,『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평범한 결혼생활』,『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교토에 다녀왔습니다』,『자유로울 것』, 『어디까지나 개인적인』,『나라는 여자』,『엄마와 연애할 때』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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