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안전한 거리에서 내 세상을 비춰보는 SF” (G. 박소영 소설가)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 (373회) 『네가 있는 요일』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상한데, 디스토피아를 쓰면서 즐거워요. 그 세계는 너무 가혹하지만 그 세계를 그리는 저는 참 즐겁습니다. 제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조금 비현실적이고, 당연히 올 수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올 가능성이 낮은 쪽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가능성이 없는 쪽을 그리고 그런 데서 주인공이 난관을 겪으면 거리감이 있으니까, 그건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아요. (2023.12.28)
낙원에서는 사람의 목숨마저 영원할 수 있다. 모든 게 가능하고 쉽다. 스케이트를 신어본 적 없는 사람도 살짝 얼린 토성 고리를 달리다 트리플 악셀을 해낼 수 있다. 그 모습을 선명하게 상상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난 생일에 울림도 토성 고리 위에서 온갖 묘기를 부렸다. 하지만 서울시청 앞 광장 스케이트장에서 ‘이렇게 타면 되는구나’ 하는 감각을 처음 느낀 순간의 짜릿함에 비하면 시시했다. 낙원에서는 부단히 노력하고, 간절히 바라고, 결국 실패하는 일이 잘 없었다. 뭐든 쉬었고, 그래서 뭐 하나 굉장하지 않았다.
박소영 작가가 쓴 『네가 있는 요일』에서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오늘 모신 분은 소설 『스노볼』과 『네가 있는 요일』을 쓴 박소영 작가님입니다.
황정은: 오늘은 올해 출간된 『네가 있는 요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근미래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소영: 네, 그럼요.
황정은: (소설 속에) ‘인간 7부제’라는 제도가 있잖아요. 공유 신체로 지정된 하나의 몸을 7명의 혼이 요일별로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그런 제도가 있는 세계인데요. 아이디어가 대단히 독특하고 재미있어요. 어쩌다 생각을 하셨습니까?
박소영: 그 아이디어를 냈던 게 2020년 겨울이었어요. 『스노볼』 1권이 나오고 나서 차기작 아이디어를 내게 됐는데, 그때 아마 제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됐을 거예요. 그 책에서 나왔던 내용이 ‘기술의 고도화로 인해서 인간이 경제적 군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치적 예술적으로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 그러한 얘기가 나왔거든요.
황정은: ‘쓸모 없음’이 『호모 데우스』에 등장한 말이로군요.
박소영: 정확한 단어가 그 책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제가 그 책을 보고 그 단어를 생각했는지 그건 지금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인간의 쓸모 없음이라는 게 저는 좀 흥미로웠어요. ‘그러면 그런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생각을 했는데, 아무리 기술이 고도화돼도 몇몇 사람은 일을 할 거잖아요. ‘그럼 대부분의 사람은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러면 빈곤 문제와 사회 혼란 이런 걸 어떻게 대응해야 되지?’ 그런 게 궁금해진 거예요. 저는 SF라는 장르를 좋아하니까 ‘이걸 SF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싶었는데, SF 특히 디스토피아라는 게 좀 극단적인 면이 있잖아요. 그래서 ‘줄어든 일자리만큼 인간의 개체 수를 확 줄여버리면 일자리와 사람이 일대일로 매치가 되니까 문제가 해결이 되네. 그럼 사람의 개체수를 어떻게 확 줄여버리지?’라고 했을 때,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몰살하거나 이런 방식이 아니라 지금 말한 신체 공유라는 방식, 그러니까 건강을 기준으로 한다면 건강한 신체를 7분의 1만 남겨놓고 7명이 하나의 그룹이 되어서 하나의 신체를 요일 별로 하루씩 돌아가면서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한 거죠. ‘신체를 안 쓰는 6일 동안은 어디서 뭘 어떻게 해?’라고 했을 때는 ‘신체를 잃어버린 사람도 뇌는 남아 있어서 그 뇌로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거기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얘기가 좀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쓰게 된 이야기입니다.
황정은: 소설 안에 ‘365’라는 존재들도 있지 않습니까? 1년 365일 동안 자기 몸을 사용할 수 있어서 365인데, 대다수 인간이 인간 7부제에 종속이 되지만 예외적으로 한 몸에 머물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이들의 존재가 노골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설정이기도 한 것 같았거든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소영: 말 그대로 1년 365일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365라고 부르는데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왜 특정 사람들만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일단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미성년자들은 7부제를 시작하지 않아요. 만 17세가 되어야 7부제를 할 건지 말 건지 결정을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소설 안에서는 가상현실에 들어가서 세상을 감각할 때 별다른 센서 같은 게 없어요. 뇌에다 칩을 꽂아서 뇌 자체가 가상현실이라는 서버에 바로 연결되는 시스템이다 보니까, 결국 그 안에서 느끼는 감각이라는 게 내 뇌가 살면서 (실제로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감정을 끌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삶의 경험이 있어야 인생의 7분의 6을 살아갈 가상현실에서의 삶을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어린 친구들은 오프라인에서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살게 합니다. 그런 미성년자들도 365인데, 이것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이고요. 17세가 넘어가면 그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특정 사람들, 그러니까 사회의 필수 인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예를 들면) 아무리 기술이 고도화돼도 그러한 기술을 통제하는 몇몇 사람들은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중요한 요직이라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365로 살 수가 있고요. 또 하나, 지금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 사람들이 있어요. 임신이라는 경험을 일곱 사람이 나눠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임신부도 임시적으로 365의 지위를 얻게 되고요. 어떻게 보면 여기에서 가장 큰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환경부담금이라는 세금을 낼 수 있는 계층은 365로 살 수가 있다는 거예요.
황정은: 그렇죠. 부자들인 거죠.
박소영: 네. 내 몸을 쓰는 권리를 돈을 주고 사는 거죠. 그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365인데, 그게 이 소설에서 가장 사회 계층 간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부분이 될 것 같아요.
황정은: 『네가 있는 요일』의 주인공인 현울림은 수요일에 몸을 사용하는 ‘수인’입니다. 월요일에 사용하는 사람은 ‘월인’이 되겠죠. 그리고 같은 신체를 공유해서 사용하는 강진아라는 인물은 화요일의 ‘화인’이잖아요?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사건이 벌어지면서 소설이 전개가 되는데요. 작가의 말에 쓰셨다시피 ‘나를 이루는 연속성이 깨졌을 때 내가 여전히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신 것 같아요. 왜 그런 고민을 하셨어요?
박소영: 소설을 쓰기 전에 이 고민을 했었어야 되는데, 정작 소설을 쓰기 전에는 세계관을 만들고 인물에 대해서 고민하고 스토리적인 부분을 생각하다 보니까,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나의 경계선’ ‘나는 무엇인가’ 이런 내용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막상 소설을 다 쓰고 나서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 쓰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제 생각이 변화했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됐어요. 전에는 당연히 내 살갗 밖으로는 외부 세계인 거고 내가 기억하는 것까지가 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소설을 쓰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걸 본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라는 것은 내 주변 사람으로까지 확장되는 거고 거구나, 내 살갗 밖에도 내가 있구나, 내가 기억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내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상호 교류하는 사람이 많으면 혹은 그 사람들과 깊게 교류하면 그만큼 내가 확장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황정은: 나 역시 나를 아는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확장일 수도 있고요.
박소영: 맞아요.
황정은: 사람을 쓸모로 나누어서 평가하는 세계는 사실 근미래도 아니고 현재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인간 7부제라는 발상이 대단히 재미있고 매력적이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작가님은 어떠셨어요?
박소영: 사실 작가라는 게 참 웃기죠. 자기도 그런 세상을 살기 싫으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주인공한테는 그 세상 속에서도 더 혹독한 일을 겪게 하고. (웃음) 저도 마찬가지죠. 저도 당연히 저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저 세상을 생각했을 때는 너무 재밌는 거예요. (웃음)
황정은: 소설 바깥에서? (웃음)
박소영: 소설 바깥에서. (웃음)
황정은: 그 소설의 세계가 ‘아직 오지 않은 현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웃음)
박소영: SF가 좋은 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안전한 거리에서 지켜본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반드시 닮아 있거든요. 그러니까 안전한 거리에서 나의 세상을 비춰본다는 점이 되게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절대 살아보고 싶지 않은 삶을 안전한 방식으로 경험해 본다는 게 너무 큰 즐거움이 아닌가.
황정은: 디스토피아 소설로?
박소영: 네.
황정은: 재밌네요. (웃음) 『스노볼』이 출간되었던 2020년 겨울에 ‘사람이 쓸모 없어진 미래’를 상상을 해보셨다고 했잖아요. 그 세계에서 강제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신세가 되어버린 연인을 상상하셨는데 그렇게 시작된 상상이 애초의 구상하고는 다른 이야기가 되었고, 그게 바로 이번에 출간된 『네가 있는 요일』입니다. 왜 다른 이야기가 되었나요?
박소영: 처음에 2020년 겨울에 기획안을 냈을 때는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로맨스를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되게 당찬 포부를 가지고. (웃음)
황정은: 혹시 그 포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게 프롤로그 아닙니까?
박소영: 맞아요!
황정은: 정말 세기의 로맨스가 펼쳐질 것 같은 뉘앙스를 살짝 흘리거든요. 거기에 남아 있었군요. (웃음)
박소영: 사실 제일 마지막에 쓴 게 프롤로그였어요. 그리고 애초에 존재할 예정에 없었던 프롤로그였어요. 왜 그러냐면, 이 소설을 쓸 때 제가 붙인 가제가 그냥 ‘인간 7부제’였는데요. 실제 소설은 (‘인간 7부제’라는 가제와 달리) 딱딱한 느낌이 아니니까, 편집부에서 조금 말랑한 제목을 붙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어요. 표지나 제목에서 이 작품이 어떤 느낌인지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서정적인 표지와 말랑한 제목이 되었고요. 처음에 생각한 건 책을 펼치면 ‘인간 7부제 동의서’가 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였는데, 편집부에서 ‘앞에서는 되게 서정적인 척 해놓고 펴자마자 ‘본인의 신체 폐기 동의’ 이런 내용이 나오면 간극이 너무 크다, 중간에 연결해 줄 프롤로그를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고, 저도 너무 동의하는 바여서 프롤로그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때 쓰려고 했던 게 제가 2020년에 원래 쓰려고 했던 소설의 내용, 그러니까 서로 (신체를 사용하는) 요일이 다른 주인공이 미성년자일 때 우연히 만나서 첫사랑이 됐는데 7부제에 들어가면서 강제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고 그래서 주인공인 여자가 첫사랑이 있는 요일로 가기 위해서 자기 요일을 탈출하는 내용이에요.
황정은: 재밌겠네요! 그러면 (『네가 있는 요일』이) 2권, 3권 나오는 거 아닙니까? (웃음)
박소영: (웃음) 프롤로그에서 그 인물들을 다시 한 번 데려올까 했어요. 그러면 이 소설의 세계관도 보여주고 이 소설에서 되게 중요한 키워드가 사랑이라는 것도 보여줄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썼더니 그들이 너무 빛나는 존재인 거예요. ‘너희는 주인공이 아닌데 너무 이렇게까지 빛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어서 프롤로그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돼서 진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우연찮게 스탠드업 코미디를 전면에 배치해서 이 소설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좀 말랑말랑하게 보여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쓰다가 ‘그런데 이 코미디언이 주인공 현울림의 엄마이면 어떨까?’ 뒤늦게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 되게 괜찮은데? 싶더라고요. 왜냐하면, 현울림과 그의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는 강진아가 서로 알게 되는 이유가 엄마들끼리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잖아요. ‘현울림의 엄마가 사회적 통찰도 있고 유머까지 있는 친구였다면 강진아의 엄마가 그 친구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겠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황정은: 처음 구상하고는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사랑’이라는 키워드는 끝까지 남았다고 하셨어요. 이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왜 사랑을 계속 생각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박소영: 처음에 꼭 사랑이어야 된다는 건 아니었어요. 아까 말한 ‘첫사랑을 찾아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릴 때도 저는 ‘인간 7부제라는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했어요.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이 억울할까 했을 때 ‘요일이라는 게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강제로 이별해야 되는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을 한 거였고요. 그러다가 막상 소설을 쓸 때가 돼서는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다고? 내가 감히? 어디서 이런 용기가 있었던 거지?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웃음)
황정은: 왜요? 왜 ‘감히’라고 생각하셨어요?
박소영: 글쎄요. 제가 사랑 이야기에 그렇게까지 탁월한지, 아직까지 자신이 크게 있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억울한 사연도 또 있을 거야’ 하고 찾아봤던 게 바디메이트(같은 신체를 공유하는 사람들)한테 신체를 살해당하는 내용이었는데, 쓰면서 결국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미래에서는 억울할 일이 굉장히 많잖아요. 저를 대입해서 생각하자면, 똑같은 소재를 두고 챗GPT가 저보다 소설을 잘 써서 제가 좌절할 수도 있고 그래서 소설가라는 직업을 잃고 생계를 걱정해야 된다면 그것도 억울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 때문에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다’라는 것이 제일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역시, 나의 쓸모를 빼앗기는 것보다 사랑을 빼앗기는 게 더 억울한 일이겠다. 그러면서 그 키워드(사랑)가 살아남았고, 인물들한테 다 사랑과 관련된 사연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쓰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다 하나의 키워드로 귀결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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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