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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절대로 개인적인 2023년의 추념 (下)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7편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미완의 독서들’의 목록을 그저 미완으로 여기며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수준의 ‘병렬독서’ 습관을 지녔다 보니 결국 올해 안에 완독하지 못한 책들의 목록이 수두룩 빽빽하다. (2023.12.15)
박명수가 2015년 <무한도전>에서 “십주년”으로 했던 삼행시가 문득 생각난다.
십 년이 지났다 / 주나야 / 년 뭐 했냐?
이 삼행시가 생각난 건, 물론 이 글이 미완의 연말결산을 하여튼 완결하려는 글이기 때문일 터이다. 여기서 ‘넌 뭐했냐?’라는 질문은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게 궁금하다면 상편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십 년이 지났다’고 맨 처음에 강조되면서, 이는 그 시간 동안에 일어났을(혹은 일어났어야 할) 변화에 대한 추궁이 된다. 요컨대, ‘지난 1년 동안 나는 뭐가 달라졌나?’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연말뿐만 아니라 항상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는데, 물론 많은 게 바뀌었을 것이고, 동시에 많은 게 여전할 터이다. 그렇지만 그 양자는 모두 당장의 내가 온전히 알 수는 없을 무언가 일 터이고 말이다. 나는 그저 언젠가 깨닫거나 나도 모르게 일어날 스스로의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계속하고 또 한다. 그것은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나를 더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조건이지만, 동시에 그런 내가 하여튼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미완의 문학들’의 목록에는 고개를 돌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업에 있어선 ‘문학의 미완’이란 테제에 열중했던 역설적인 관심사의 소유자였다. 한편 장 뤽 고다르는 ‘미완의 영화들’의 목록을 끈질기게 만지작거리며 이를 ‘영화의 미완(들)’이라는 테제와 아무렇지 않게 겹쳐버리는 뻔뻔한 태도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둔하고 우유부단하며 범상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미완의 독서들’의 목록을 그저 미완으로 여기며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수준의 ‘병렬독서’ 습관을 지녔다 보니 결국 올해 안에 완독하지 못한 책들의 목록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중 올해 출간되어 흥미진진하게 하지만 여전히 파편적으로 읽고 있는 책들로는 『몸 테크닉』, 『행성 시대 역사의 기후』, 『관리자본주의』, 『오송역』, 『총, 선, 펜』,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본 인 블랙니스』, 『난간 없이 사유하기』, 『6년』, 『세계 끝의 버섯』, 『오프모던의 건축』,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등이 있는데, 과연 이 책들은 언제쯤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책들의 목록은 더더욱 길다.
이 책들을 읽는 데 쓰였을 수도 있는 하반기의 대부분의 시간은 사실 갑자기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에 대신 쓰였다. 아주 뜬금없고 이상한 계기로 덩샤오핑에 대해 찾아보다 흥미를 순식간에 그쪽에 빼앗긴 것인데, 타이밍 좋게도 지난 3월에 번역 출간된 클라우스 뮐한의 두꺼운 개론서 『현대 중국의 탄생』은 그 흥미에 바로 불을 붙여줬다. 무엇보다도 ‘중국’에 대한 적절한 거리감과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에 특정한 모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중국의 경험과 관점을 강조하면서도 ‘중국’이나 ‘중국적인 것’에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려 한 것이” 이 책의 ‘새 교과서’ 수준을 넘어선 탁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찬웅의 『야청빛 저녁이면』 역시 흥미진진한 개론서여서, ‘이미지’에 대한 사유로서 현대 프랑스 미학의 궤적을 그저 단순화해 설명해 주는 데서 그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의지가 여기에 근사하게 육화되어 있었다. 아마 각 분야에 대한 입문을 누군가 바란다면 나는 앞으로 이 책들을 먼저 거론할 것 같다.
여러모로 탈 많은 2023년을 그나마 덜 외롭게 보낼 수 있었던 건 (물론 수많은 친구들의 수많은 도움 덕이 크긴 했지만 하여튼!) 을유문화사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름다운 두 권의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영역본을 중역한 판본이란 것이 못내 아쉽긴 하나, 민승남의 매끄러운 번역은 그런 아쉬움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아구아 비바』와 『별의 시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리스펙토르의 절정이 아닐까. ‘멘헤라’들의 멋들어진 잠언집 작가로서 리스펙토르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게 위로가 아닌 (박명수 식으로 말하자면 ‘중꺾그마’의) 의지라는 걸 줄기차게 외쳐온 선동가로서 리스펙토르 말이다. 가령 다음의 (베케트와 고다르를 연상시키는) 구절, “글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오직 침묵만이 나의 벗이 되어준다. 내가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말을 탐색하는 일. 내 작은 성공은 나를 침범하고, 길 위에서 힐끗거리는 시선들 속에 나를 노출시킨다. 내가 원하는 건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별의 시간』, 120쪽)
역사적으로든 지정학적으로든 서로 거의 다른 지평에 있으나, 이런 선동가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마크 피셔는 리스펙토르와 약간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의 머리통에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 피셔의 선집 『K-펑크 1』에 대해선 이미 친애하는 동료인 대중음악평론가 나원영이 근사한 서평을 쓴 바 있으니, 내가 그 이상으로 말을 덧붙이는 건 당장은 무리일 것이다. 특히 그가 이 책을 “피셔가 겪었던 온갖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의 백과사전처럼 읽어”보자고 제안하는 데에선, 마치 <퀀덤>에서의 현승희처럼 “저거지!”라고 크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외친 건 아니고 그냥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용히 중얼거린 건 아니고 그냥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속으로 그런 생각도 안 했다. 그냥 마크 피셔도 나원영도 다 짱이시다 라고 생각했다…
『K-펑크 1』이 독자의 머리를 찌릿찌릿하게 자극한다면 이은용의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독자의 가슴을 쥐락펴락한다. 그리고 이는 이 희곡집이 이은용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라서 생기는 기분(만)이 아니다. (올해 작고한) 밀란 쿤데라가 농담으로서 소설을 옹호해 왔다는 사실은 나름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그저 농담이기만 하는 소설을 적잖이 경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신의 고통 어린 언어나 경험이 타인에게 한낱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때의 으스스함에도 쿤데라는 (그의 말마따나 카프카를 경유하여) 예민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은용은 트랜스젠더(그리고 ‘퀴어’)로서의 삶을 수식하기 위한 언어/기호들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성을 돌파하려 애쓴다. 내 삶이 농담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즉 세계를 더 핍진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농담인” 내 삶의 언어/기호들을 밀어붙임으로써 오히려 세계가 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압박하는 것. 책의 기이한 제목을 우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은용이 ‘카프카적인 것’을 연극에서 퀴어링했다고 (참으로 진부하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미 농담인” ‘우리’의 삶을 이렇게 직시하는 서사적 픽션을 남한에서 (지난 해 말의 『지영』에 이어) 연달아 읽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슬픈 만큼 기쁜 일이란 생각은 든다.
다른 사람들이 ‘올해의 책’을 꼽은 것을 쓱 둘러보면서 개인적으로 꽤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건, 그중 어느 누구도 앤 카슨의 『플로트』를 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해 번역 출간됐던 『녹스』에 대한 적잖은 긍정적인 반응을 떠올려 비교해보면, 역시 이 작품은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았던 게 아닐까 싶어진다. ‘애도’라는 키워드로 매듭짓는 독해의 가능성을 가졌던 『녹스』와 달리 『플로트』는 고전학자이자 ‘텍스트의 불확정성’의 시인으로서 카슨의 성격이 가장 과격하게 발현된 작품(집)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한의 지성적 장에 있어서는 아직도 이 책이 너무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카슨의 중핵 중 하나인 미디어(고고)학이 이제사 문제다운 문제로 조금식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니…) 확실히 『플로트』는 ‘통독’의 모델에 집어넣고 읽기에는 참으로 까다로운 파편적인 텍스트(모음)이고, 그만큼 ‘전문적인’ 독자들에게도 적잖은 곤란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언하고 싶다, 적어도 지금껏 내가 읽은 앤 카슨의 작품 중 이것이 제일 으뜸이라고 말이다.
『플로트』를 위한 가장 적절한 말은 아마도 이미 100년 전에 나온 것 같다.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서로 다소간에 떨어져 있는 두 리얼리티들 간의 비교가 아니라 접근을 통해서 생성된다. 이러한 두 개의 리얼리티의 관계가 멀고 진실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지며 보다 감성적인 힘과 시적인 현실을 지니게 될 것이다.”(피에르 르베르디, 「이미지」) 즉 카슨의 아름다움은 개개의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들이 서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며, 그때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이라는 거짓된 이항대립)이 아니라 표면으로서 주어지는 말 자체의 위상이다. (이쯤에서 카슨과 리스펙토르 사이에 지도를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들긴 하지만 작작 하도록 하겠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적당히 쉬어가듯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정해진 분량의 2배가량을 써버려서 머리 속이 하얘진다. 뭐라 마무리하면 좋지… 아, 다 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모든 결산은 어느 정도 부족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경험을 영원히 생생하게 기억하며 평생을 일관적으로 사는 사람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으니 말이다. 과거를 돌아보려 할 때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건 사실 지금의 자신이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칸트적 의미에서) 한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가령 올해 초에 어떤 영화를 아주 인상 깊게 봤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그것을 반드시 가슴에 품고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근데 그럼 도대체 그런 연말결산 따위에 왜 이리 목을 맨 건데 쓰니야 제발! 물론 답은 아주 간단하게 나와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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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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