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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칼럼] 나의 캐비넷을 열면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 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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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 것은 말이나 활자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맨얼굴로 맞이한 마음들이다. (2023.12.12)


예술과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그래서 미술관과 갤러리의 차이가 뭐야?” 마주 앉은 그는 질문을 너무 좋아한다. 그날은 갤러리였다. “미술관은 일종의 기관이야. 일정량의 소장품과 그걸 연구하고 관리하는 학예 인력이 꼭 있어야 해. 갤러리는 누구나 열 수 있고. 옛날에 이탈리아 귀족들이 집에 오는 손님에게 자랑하려고 ‘갈레리아(Galleria)’라는 긴 회랑에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했거든. 그게 갤러리(gallery)의 어원이야. 당시에는 미술품도 그렇고, 먼 곳을 여행하며 가져온 신기한 물건들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어. 독일의 ‘분더카머(Wunderkummer)’, 프랑스의 ‘까비네 드 큐리오지테(Cabinet of curiosities)’가 다 비슷한 거야. ‘호기심의 방’이라는 뜻. 그리고 ‘까비네’는 우리가 자주 쓰는 ‘캐비넷’이랑 같은 단어고.”

갤러리에서 시작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날 대화는 결국 목적을 잃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미술사 시간에 배운 캐비넷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누군가가 물건을 선별하고 캐비넷에 모아 둔 것을 보면 취향과 기준이 뚜렷하게 보인다. 수집하기 위한 과정과 들인 시간 또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소한 물건도 캐비넷 안에서는 특별한 보물이 된다. 그 안에는 의미와 맥락이 흐른다. 그래서 누군가의 캐비넷은 그대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되기도, 역사적 자료로 보존되기도 한다.


전시 《DEAR CABINET》, SEOJUNG ART, 2023

얼마 전에 본 전시의 주제가 마침 ‘캐비넷’이었다. 작품의 옆에 놓인 작은 캐비닛에는 작가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들어 있었다. 자신의 뿌리를 이루는 가족의 사진, 시리즈 조각을 시작할 때 가장 처음 만들어본 프로토타입, 무려 7년을 사용해서 다 닳아 버린 붓 한 자루처럼 아주 사소한 물건이지만 특별한 의미와 맥락을 가진 저마다의 보물이었다. 캐비넷의 문을 열 때마다 한 사람의 작은 우주를 은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전시장 한쪽의 좀 더 커다란 캐비넷에는, 작업에 쓰인 컬러칩이나 도구, 영감이 된 빈티지 소품, 매일의 작업 과정을 기록한 사진 등 작가들이 오늘에 다다르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며 지나온 시간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작가들에게는 캐비넷 밖에 걸린 작품도 소중하지만, 그 작품들을 만들어낸 자신의 세계가 무엇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세계로 만들어낸 이 작품들 또한 언젠가 타인의 캐비넷에 수집되어 누군가의 소중한 조각이 되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뭉클했다. 소중함이 다시 소중함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는 별자리가 이어지듯 빛났다. 

전시를 보며 내게 소중한 것을 생각하다가,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날이 떠올랐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와서 전시를 8개째 보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진하고 단 커피를 마시며, 곧장 지하철역에 가는 거리와 전시장을 하나 더 들르면 걷게 되는 거리를 비교했다. 그래봤자 200미터인데 머리와 마음에 여력이 없었다. 꼭 가야만 하는 전시는 아니지만 하필이면 또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전시 《DEAR CABINET》, SEOJUNG ART, 2023

일주일에 수십 개의 전시를 보는 일은 흔하다. 전시의 의미와 개념, 연출 방법, 처음 발견한 작가의 특징, 원래 알던 작가의 바뀐 점 등을 빠르게 훑고 다음 전시장으로 넘어간다. 전시는 끝없이 열리고 서로 다른 일정과 전시장 오픈 시간을 챙기려면 효율적인 동선과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 촉촉한 감상에 젖어 들 시간이 없다. 그러다 과부하가 걸리는 날은 작품이 아름다움이 아닌 정보로 느껴져 버거워진다. 내가 하는 일이 싫어지고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순간이다. 좋아하는 걸 일로 삼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때때로 비효율이 필요하다. 한 번은 파주까지 전시를 보러 갔는데 휴관일을 잘못 알아 허탕을 쳤고, 전시 마지막 날 기어이 다시 찾아갔다. 두 번 다 비오는 날이었고, 사람의 몸과 식물을 그린 두터운 그림들은 축축한 날에 잘 어울렸다. 또 어떤 전시는 한낮과 저녁의 빛이 다르다 하여 저녁에 다시 찾아간 적이 있다. 해 질 무렵 보는 그림은 달랐고. 작가의 내부로 조금 더 다가간 것 같았다. 일하다 맞는 일이 아닌 순간들, 무용하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고민하던 초가을날, 결국 어느 원로 작가의 그림 앞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민중미술을 그리던 작가가 나이 들어 정착한 제주에서 그려낸 풍경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왈칵 눈물이 났다. 오래 지속해야만 가질 수 있는 단순한 내공은 아무런 여력이 없는 날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바라본 풍경이 첫눈처럼 내려와 마음에 소복히 쌓였다. 아아, 그랬지, 이런 마음이었지. 나는 바다 앞에서 우는 마음이 되어 그림의 안도 밖도 아닌 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전시 《DEAR CABINET》, SEOJUNG ART, 2023

그때도 그랬다. 사랑의 날이었다. 애써 뛰진 않았지만 사실 마음은 이미 달리고 있었고, 발이 바닥을 번갈아 디딜 때마다 내 주머니에서 단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너에게 주고 싶어 매일 모아 두었던 수많은 단어들이. 그리하여 네 앞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엔 아무 단어도 남지 않았고, 나는 숨을 몰아쉬고 얼굴을 붉히며 네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여전히 아무 단어도 만들어내질 못했고, 머릿속은 새하얬다. 목구멍에선 단어 대신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머리 위로 첫눈이 내렸다.

사랑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남는 것은 말이나 활자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맨얼굴로 맞이한 마음들이다. 달리며 얼굴에 맞은 바람, 두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 말 대신 올라오던 뜨거운 무엇,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서로를 아는 눈빛 같은 것들. 지금 당장 눈 앞의 시간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사이를 넘나들지만, 겨우 그런 말로는 어떤 시간도 규정지을 수 없다.

일도 사랑과 비슷한 데가 있어서 좋다, 싫다로 구분 짓기 어렵다. 첫사랑같은 마음으로 시작한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으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싫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좋아하던 걸 싫어해야 하는 마음은 원래 싫은 걸 계속 싫어하는 것보다 배로 슬프다. 하지만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일하는 과정 중에도 온전히 그림과 만나며 겪는 무용하지만 충만한 순간이 있다. 맨얼굴로 맞이한 사랑의 마음 같은 것. 만약 내게도 캐비넷이 있다면, 완성된 글이나 책보다는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있겠지. 지난번 전시에서 본 작은 캐비넷에, 작가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을 담아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끼는 것들을 모으면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얼굴이 드러난다. 우리는 그런 얼굴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나는 아무래도 너무 많은 질문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아한다와 싫어한다는 뒤섞여 있다. 시간이 흐르고 과정을 겪어야 의미가 드러난다. 나는 싫었던 질문의 꼬리를 기억하게 될까, 아니면 내가 화를 냈을 때 당황하며 웃었던 표정 위로 비친 햇살을 기억하게 될까. 캐비넷에 무엇이 담길지는 모르지만, 다시 열어보았을 때 또렷한 맥락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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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연(미술비평가)

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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