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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살라는 당부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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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기 십상인 이 세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죽지 않고 살 것인가.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소년은 포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마을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11살 마히토에게 2층 다락으로 향하는 계단은 탑처럼 높지만, 미야카지 하야오의 소년·소녀들이 자주 그래왔듯 마히토 역시 씩씩한 개구리 자세로 한달음에 뛰어오른다. 멀리, 어머니의 병원이 불타고 있다. 그길로 거리로 뛰쳐나간 마히토를 따라가는 화면은 불길을 헤치고 달려 나가는 소년의 시점을 따라 넘실거리다 이내 눈물로 어지럽혀진다. 1944년, 제2차세계대전의 한가운데. 이 영화에서 전범국의 소년이 먼저 배우는 것은 군국주의로 피 흘리는 이들의 신음이 아닌 가족의 상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관객이었던 나는 여기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또다시 거북해서가 아니라, 수긍할 수 있어서다. 어머니의 죽음을 뛰어넘어야만 소년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무엇이 죽어가고 있을까. 나는 왜 살아야 할까. 살아있는 한, 소년은 바깥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무렵 마히토 앞에는 대답 대신 새엄마 나츠코가 나타난다. 그녀는 곧 새 생명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요시노 겐자부로의 문답식 소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원안 삼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10년 만에 발표한 신작 애니메이션은 소설의 배경으로 말미암아 감독의 자전적 경험으로 굴을 파고 들어간다. 요시노 겐자부로가 당대를 반영하여 쓴 소설 속에서 15살의 주인공은 군국주의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아버지의 죽음과 학교폭력을 겪는데,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의 것으로 바뀌었을 뿐 마히토가 처한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다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을 픽션적 대응물로 겹쳐두지 않는다. 공습을 피해 교외의 외딴집으로 온 마히토가 1937년에 생전의 어머니가 남긴 겐자부로의 소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발견하는 장면을 놓아둠으로써 그의 영화는 소설의 각색이 아니라 응답이 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메아리가 82세의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돌아온 것이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마히토 가족은 전투기 공장장인 아버지가 구해온 콘비프 통조림이나 담배 한 갑을 전쟁통에도 은밀히 누릴 수 있는 처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부 회고록과도 같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순순히 고백한다. 11살 소년에게 이윽고 찾아온 것이 엄중한 죄의식이나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말을 잃은 소년은 쏟아지는 잠 속으로 도망친다. 겨우, 왜가리 한 마리와 겨루거나 전학 온 도쿄 도련님을 못마땅해하는 동네 아이들과 몸싸움을 벌일 뿐이다. 대담하리만치 가라앉은 침묵의 앰비언트(배경음)를 구사하는 영화는, 풀숲을 가로지르는 왜가리의 발걸음처럼 조심스럽게 무기력의 꽁무니를 밟는다. 논두렁에서 동네 아이들과 뒹군 어느 날, 마히토는 길 위에 버려진 돌을 주워 기어이 자기 머리를 찧는다. 마히토의 온 얼굴이 - 나중에 등장하는 생선의 배를 가르는 장면에서 튀어나오는 내장처럼 - 팽팽하게 흘러넘치는 피로 범벅된다. 바람 한 점 들리지 않는 공기 속에서, 나는 피가 꿀렁이며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자해 이후 마히토에겐 왜가리가 사람과 같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덮쳐오던 죽은 어머니의 환영은 오히려 잠잠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즐기는 내러티브는 일종의 유럽식 메르헨이다. 먼 옛날, 혜성과 함께 떨어진 탑의 존재가 신비롭게 구전되듯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호한 것을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다. 초로의 거장이 내놓은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설교적이라는 평가는 영화 곳곳에 흩뿌려진 기호들에서 해석의 여지를 읽어내는 독자들의 강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외려 다 말하는 듯 도통 말하지 않는다. 반전주의에 대한 도덕적인 메시지나 참회를 담은 우화가 되기보단, 왜가리와 펠리컨, 거대한 사랑앵무를 히스테리컬한 주체들로 등장시켜 제국주의의 폭력을 암시한 뒤 이내 훨훨 날려 보낸다. 역사의 과오가 명백한 시대를 다루면서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장엄한 질문과는 다르게 매우 개인적인 서사가 된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불시에 화마로 엄마를 잃은 소년에게 이번엔 새엄마 나츠코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왜가리와 함께 탑을 거쳐 이세계(異世界)에 진입한 마히토는 오래전 마히토처럼 탑 속을 떠돌았던 죽은 엄마의 어린 시절인 불꽃의 소녀 히미를 만나게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변주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식 <쁘띠 마망>(셀린 시아마, 2021)이기도 한 이 대목에서 나는 문득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만나지 못한 상대의 시간까지 절실히 상상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긴다. 그리고 이즈음 영화 초입에 마히토가 엄마의 여동생인 새엄마를 보고 놀랍도록 닮았다고 중얼거리던 순간을 생각해 냈다. 이세계에서의 갖은 모험 끝에 당도한 나츠코의 산실은 마히토가 공교롭게도 이세계의 초입에서 목격한 고인돌 앞에 차려져 있다. 무덤과 산실이 하나이고, 죽은 언니와 산 동생에게 마히토가 나란히 엄마라고 부를 때 이세계는 서서히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말하자면, 곧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마히토가 이제 하나를 ‘배웠기’ 때문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조력자들의 애틋한 유대를 구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로를 끌어안은 마히토와 히미를 어느덧 이세계의 창조주 앞에 데려다 놓는다.

돌이 이세계의 주요한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 자기를 해할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염오가 깃든 돌은 이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되어있다. 마히토는 우선 ‘자신을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 거대한 고인돌을 마주했다. 이세계의 정수로 다가갈수록 그 돌들이 내뿜는 전류에 아파하기도 한다. 마침내 히미와 마히토 앞에 나타난 백발의 성자는 이미 한참 기울어져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돌탑을 움직여 미세한 새 균형점을 잡아낸다. “이걸로 세계는 하루 괜찮을 것이다.” 그가 마히토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태롭게 비뚜름하여 하루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탱되는 무엇이다. 악의를 악의로 남겨두지 않고 안간힘을 써 아름다움으로 바꿔낸 세계다. 지브리의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투영한 듯한 이 인물이 쌓아 올린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문학이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따위로 부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히토가 어머니의 어린 시절인 히미를 만나는 것과 같이 이 한 편의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유년과 노년을 조우시킨다.

식탐에 가득 찬 앵무새들을 등장시켜 이세계를 부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마히토가 더 이상 과거의 이상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과 다름없다. 말하자면 영화는 마히토에게 다시 시작하라고 말한다. 어디에서? 훨씬 더 불완전하며 비뚜름해 균형 같은 것은 없는 혼돈의 생 속에서, 전쟁이 반복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과 달리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제목은 도대체 ‘어떻게 살 것’이냐고 삶의 태도를 고쳐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세계의 돌이 깨어지고 또 하나의 역사가 무너져 내릴 때 마히토와 히미가 주저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제목의 어감을 고쳐 읽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기 십상인 이 세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죽지 않고 살 것인가. 

그러니까 질문이 아니라 당부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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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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