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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보존하는 사랑 - <패스트 라이브즈>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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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영화로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옷깃만 스쳐도 오백 겁의 인연이라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어둠에 잠겨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이는 몇 겁의 인연쯤 될까.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서로 사랑하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멜로드라마들이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는 신분이나 계급차, 전쟁,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결렬된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불가피하고 육중한 장애물로 인해 갈라지는 연인들의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 된다. 

요즘 왜 좋은 멜로드라마가 줄어들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장애물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소거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잠시 도달하게 된다. 겨우 불륜이 도시인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던 시절, 로맨스 드라마가 ‘유학 엔딩’으로 끝나던 시절도 지나갔다. SNS와 화상 통화의 시대에, 스와이프로 집 근처에 사는 낯선 이를 물색할 수 있는 시대에 사랑은 운명도 우연도 그 불가능성도 모두 잃어간다. 두 주인공의 끈질긴 관계에 인연의 개념을 틈입시킨 멜로드라마 <패스트 라이브즈>가 유독 궁금했던 건 그래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은 12살에 처음 만난다. 둘은 서로를 반쪽처럼 느끼고 가까워지지만 나영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다. 그리고 12년 뒤, 성인이 된 두 사람은 페이스북과 페이스타임을 통해 어렵지 않게 조우한다. 노라라는 새 이름을 가진 나영은 뉴욕의 극작가 지망생이, 해성은 ‘서울의 좋은 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어.

약간의 시차를 견디면 언제든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세례 앞에서 노라와 해성이 서로를 포기하게 만들 절대적 장애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제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마는 불행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로, 개인의 욕망으로 위협받는다. 중요해진 것은 저마다의 복잡미묘한 ‘사정’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그 사정은 이렇다. 나영의 부모는 한국을 등지고 더 나은 가능성을 찾아 캐나다로 떠났다(영화를 만든 셀린 송 감독의 아버지는 데뷔작 <넘버3>(1997)로 일약 주목받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1999년에 차기작 <세기말>을 발표한 뒤 돌연 이민을 택하고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어떤 이유로든 한국 사회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떠나는 사람이다. 해성의 부모는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후 나영의 서술대로라면 “너무나 한국적인(so so korean)” 가족이다. 그들은 남는 사람이다. 화상 통화 스크린 안의 남녀는 변함없이 애틋하지만 노트북 밖의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은 너무도 달라져 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달려와 노트북을 펼치던 남녀의 만남이 그 빈도수를 점차 줄여갈 때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늘해진다. 한 사람의 이른 아침과 또 한 사람의 늦은 새벽을 채우던 대화가 보이스오버 몽타주로 흘러가는 동안 유독 못처럼 콕콕 박히는 대사. “넌 뉴욕에 언제 올 거야?” “내가 왜 가?”, “한국엔 언제쯤 올 수 있어?”, “한국에 가려면 최소한 1년은 더 있어야 해.”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선을 실감하게 될 때는 더 다가가고 싶을 때이다.

그러니 <패스트 라이브즈>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보존하는 것의 버거움과 슬픔에 관한 영화도 될 것이다. 해성에게 앞으로 연락을 줄이자고 당부하는 노라가 말한다. “나는 두 번의 이민을 거쳐서 여기에 왔어.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게 아주 많아. 그런데 너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가 자꾸만 한국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잖아.” 12년 전의 소녀는 노벨상을 꿈꿨었고 뉴욕에 사는 지금은 퓰리처상을 동경한다. 현실적인 해성은 노라의 그 이상적인 면모에 반했었다. 어쩌면 연인이 될 수도 있는 지금, 그들은 언젠가 되고 싶고 되어야만 할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멀어지기로 한다. 특히 이민자인 노라에게 자기 보존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자 삶의 당위다.

현대의 멜로드라마에서 사랑을 막는 장애물은 철저히 개인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치적, 사회적 역동이 도사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사랑 영화가 더 치사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순정으로 남을 수 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로 멀어진 사랑은 오염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깎이고 굴절되어도 사랑이 여전히 사랑일 때, 환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오염된 사랑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사랑 영화는 잔인하게 아름답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또 다른 12년 후를 보여주는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드디어 두 사람이 뉴욕에서 재회했을 때 해성이 묻는다. 지금은 무슨 상을 받고 싶냐고. 어느새 30대 후반이 된 노라는 이제 더 이상 받고 싶은 상 따위는 곱씹지 않으면서 살게 됐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쓸쓸함은 이런 대목에서 나온다.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부추김에 노라가 겨우 대답한다. “음, 토니상?” 노벨과 퓰리처, 토니라는 이름을 한 노라의 라라랜드는 현재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만난 동료 유대인 작가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해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사는 일상에 정착한 모습이다. 꿈의 희미해진 자리에는 그녀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삶이 들어서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관계의 인연을 겁(劫)에 비유한다. 겁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4방1유순(대략 15km의 높이)의 바위를 뚫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거나, 그만한 크기의 바위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 100년에 한 번 겨자씨 하나를 강물에 빠트린다고 할 때 모든 겨자씨를 다 비워낼 시간이라고 한다. 그 비유에 의하면 1겁은 곧 무한한 시간, 인간의 감각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돌의 시간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이 초월적인 불교 철학은 부부의 인연을 8000겁의 인연이라고 명명한다. 8000겁을 스치고 부딪치고 만났다 헤어져서 드디어 이루어지는 관계이니 그만큼 현생의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뜻일 테다. 그런데 <패스트 라이브즈>는 여기서 희한한 길을 간다. 만남의 소중함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을 체념하는 레토릭으로 인연을 동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삶 중 하나라면, 그러니 이것 또한 언젠가의 전생이라면, 우리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결코 다시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헤어질 때 의례적으로 건네는 인사 - 다음에 만나자 - 에 기이한 감정을 얹는다. 나는 이 말이 ‘수천 겁의 윤회와 풍화를 견디고도 너를 다시 만나기를 소망할 만큼 사랑한다’로 들리지 않아서 감동했다. 그보다는 ‘그와 같은 작용으로 탄생한 네 삶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리 없음을 받아들인다’로 들렸다. 어떤 사랑은 상대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고 나와 체념의 사전적 정의를 검색해 보았다. 1.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 2. 도리를 깨닫는 마음.

감동받은 사람들은 침묵하고 그 표정은 조금 멍하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줄 서서 극장을 빠져나왔다. 노라와 해성은 그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으나 엔딩크레딧이 끝난 후 관객의 마음은 그보다 정처 없어서 나는 하늘연 극장을 가득 메운 이 많은 사람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졌다. 부산에서 우리는 잠시 모두 이방인일 테고 돌아가는 길에는 대체로 남겨두고 온 영화를 곱씹을 것이다. 각자의 전생과 인연, 이번 생의 도리를 안고 흩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모두 스산하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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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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