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 고명재 "왜 사람들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편지를 쓰는가. 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심장이 뛰었던 순간은 수업 중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 시를 처음 봤을 때. 한 사람이 시 속에서 정신없이 웃고 있었다.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심장이 뛰었던 순간은 수업 중 『혼자 가는 먼 집』이라는 시를 처음 봤을 때. 한 사람이 시 속에서 정신없이 웃고 있었다. 말은 조각나서 널빤지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문장은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당신…” 혹은 “킥킥거리”는 소리로 끝나고 있었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 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중략)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중에서
도대체 왜 이 사람은 말을 끝맺지 못할까. 왜 정신없이 웃고만 있을까. 질문을 하는 순간,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었다. 제정신일 수 없으니 말을 맺을 수 없고, 너무 처참하니 울지 못하고 웃는 거구나. 그래서 화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종결어미는 “당신”이다. 우리의 심장이 평생에 걸친 ‘반복-기관’이듯, 화자는 “당신……”이란 말을 되풀이하며 그를 만나러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가고 있다. 여기서 나는 조금 더 슬퍼졌는데, 그것은 시의 제목에서 가까운 미래가 비쳤기 때문. 그렇다. 이 시의 제목은 현재 화자 앞에 놓인 가장 하기 힘든 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람은 이 모든 걸 마치고 난 뒤 혼자서 집으로 가야만 한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점에 가서 시집을 샀다. 시집 코너 앞에서 허수경허수경 중얼거리다가 청록색의 부드러운 시집을 꺼냈다. 그걸 말아서 쥘 때 어떤 예감이 흘러들었다. 앞으로 정신없이 접게 될 모든 페이지, 총천연색의 밑줄, 리듬, 수많은 언어들, 흔들리는 인덱스, 사랑의 연갈이, 끝없이 아름다울 목소리. 그게 미래에 읽을 모든 시인 줄 알지 못한 채, 나는 선 자리에서 시집을 펼쳐들었다. 『공터의 사랑』, 『불우한 악기』, 『不醉不歸』. 시가 평생에 걸친 미지의 ‘반복-질문’이듯이. 눈앞에 미지가 일렁거렸다. 발바닥에 무궁화(無窮花)가 피는 것 같았다.
나는 시(詩)라는 말을 보면 등불이 떠오른다. 미약하게 꺼질 것처럼 휘청대지만 생각보다 꿋꿋하게 어둠을 견뎌내는 것. 그것은 (LED 등처럼) 폭력적으로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아니라, 부드럽게 어둠에 반쯤 섞인 채 발아래를 일렁일렁 비춘다. 허수경 시인의 시에는 그런 불빛이 있다. 불과 빛이 함께 있어 쬘 수 있는 것.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 치만큼은 제대로 살아내고 싶었다. 이후 그가 출간하는 시집을 따라 읽었다. 그의 과거부터 현재를 쫓아 읽으며 그가 비춰보는 곳을 나도 따라 짚었다. 작가는 빛과 마음, 노래로구나. 어둠 속에서 놓지 않는 쓰기가 있구나. 작가는 크는 거구나. 나아감이구나. 그의 새 시집을 볼 때마다 감동적이었던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슬픔의 규모도 무서우리만큼 커지고 있다는 거였다.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흰 꿈 한 꿈』)고 쓰던 사람이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간다(『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고 말했다. 다음 시집에선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물 좀 가져다주어요』)을 본다. 그다음 시집에선 “이렇게 죽인 소를 사”서, “세계를 국솥에 두고 끓이”(『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는 슬픔을 말한다. ‘자신의 슬픔’에서 ‘세계의 비참’으로 건너가는 것. 넘어가는 것. 넘어서는 것. 갱신하는 것.
그러니까 시라는 개념이 자꾸 커지고, 마음이 커지고, 커지는 만큼 슬픔도 커지고. 그걸 따라 읽는 우리의 영혼도 커지고, 노래는 커지고, 리듬은 터지고, 사랑이 열리고,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의문이 자라고. 난민, 국경, 전쟁, 과학, 문명과 멸망, 동물, 자연, 약속, 오염, 사랑과 미래. 왜소한 체구로 그는 무궁히 거대해졌다. 이윽고 이런 시를 시집에서 보게 됐을 때, 나는 한량없는 마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그러나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마치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울고
도서관에서는 물에 잠긴 책들 침묵하고 전신주에서는 이런 삶이 끝날 것처럼 전기를 송신하던 철마도 이쑤시개처럼 젖어 울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 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 허수경, 『나의 도시』,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중에서
그러니까 마음은, 오직 마음은, 온 세상이 잠기게 펑펑 울 수가 있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국경을 무시한 채 품을 수 있고. “남경 동경 바빌론 아수르 알렉산드리아”처럼 지나간 문명도 삼킬 수 있고. 이 마음은 결코 인간적 규모가 아니라, 신처럼 거대하고 무한량 아파서, “물에 잠긴 내 도시”를 구해달라는 간청이 되고. 모든 걸 젖게 만드는 빗물이 되고. 마음은 그러니까 오직 마음은,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갈 수가 있고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안을 수 있고, 끝으로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 우리가 해내지 못한, 어떤, 마땅한 존대(尊待)를, 끝까지 놓지 않고 쥘 수 있는 것.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고. 제 심장을 두들기는 박동의 반복. 빙판을 쾅쾅 깨듯 가슴을 치기. 엎어지기. 허물어지기. 리듬들, 몸짓들. 이 끝에서 개인은 시가 된다. 개인은 평생에 걸친 심장이 된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 『눈』,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중에서
소멸할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쩌면 “지켜보”는 일. 마치 책무처럼 꿋꿋하게 해야 하는 일. 소멸할 것들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시인은 그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묻는다. “이 흰빛의 마라톤을” 얼마나 지속해야 끝이 오는가. “나는 없어지고” 시인이 “탄생하는” 것. ‘허수경’이 아니라, ‘시인’이 되는 것. 태어나는 것. 탄생하는 것. 나아가는 것. 당신 시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오늘도 그가 남긴 마음을 읽는다. “시라는 것은 어쩌면 마음의 혁명을 조용히, 온전하게 치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오늘의 착각』 중에서)
*고명재 시인. 198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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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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