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 김중혁 “42의 비밀”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작가의 책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지금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펼치면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
아직도 끝까지 읽지 못한 소설이 있다. 재미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끝내주게 재미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날이 생각난다. “뭐야,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가능하다고?”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절반쯤 읽었을 때 깨달았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안 된다. 아껴야 한다. 이 책은 나의 연료가 될 것이다. 내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들끓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이런 목소리도 들렸다.
“뭐 해, 빨리 쓰지 않고.”
지금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펼치면 소설이 쓰고 싶어진다. 소설의 시작 부분.
“저 멀리 시대에 뒤처진 은하계 서쪽 소용돌이의 끝,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변두리 지역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노란색 항성이 하나 있다.”
스타워즈의 시작 같기도 하고 장대한 대서사시가 펼쳐질 것 같지만, 정작 소설은 온갖 헛소리와 농담과 풍자와 말장난으로 가득하다. 글쓰기를 촉발하는 장난으로 가득하고, 나도 이렇게 웃기는 글을 빨리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조금 읽다가 나는 책을 덮는다. 내 글을 쓰러 간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와 닮은 소설을 쓰고 싶은 게 아니다. 이 소설처럼 나만의 인장이 가득한, 나만 쓸 수 있는 소설이 쓰고 싶은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 줄거리를 말할 수 없지만, 다 읽은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약할 수 없고, 전달하기 힘들고, 전달하는 순간 맥이 빠지는 이야기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펼친다. 아무 데나 펼친다. 아무 데나 읽는다. 그 어느 곳을 펼쳐도 곧장 소설에 빠져들 수 있다. 어제 읽고 오늘 읽어도, 한 달 전에 읽고 오늘 읽어도 마찬가지다. 내 속에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우주가 만들어진 것 같다.
소설에 중요한 숫자 하나가 등장한다.
42
우주 안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컴퓨터인 ‘깊은 생각(Deep Thought)’이 750만 년 동안 프로그램을 돌린 결과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은 바로 42였다. 많은 사람들이 42를 두고 수많은 추측을 하였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에는 앨리스의 그림이 42개 등장하는데, 그걸 오마주한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유력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소설 속 작동 원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닮긴 했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생각난 숫자였다고 한다. 그럴 리 없다. 책 속의 수많은 장난을 생각해 보면 어떤 상징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뭘까? 작가가 계속 강조한 게 뭘까? 하나의 키워드만 뽑아낸다면? 나는 깊은 생각에 깊은 생각에 깊은 생각을 거듭했고, 나만의 답을 찾아냈다.
점심
더글러스 애덤스는 점심에 미친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가장 자주 했다는 말은 “시간은 환영이야. 점심시간은 두 배로 더 그렇지.”이다.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은하계의 모든 주요 문명은 다음과 같이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친다. 즉 생존, 의문, 그리고 세련의 단계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왜, 그리고 어디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계를 특징짓는 질문은 ‘어떻게 먹을까’이고, 두 번째 단계는 ‘우리는 왜 먹는가’이고, 마지막 단계는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이다.”
이 정도면 확실한 증거 아닐까? 세련되기 위해서는 매일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작가에게 점심시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두 배로 강력한 환영이라면, 우리는 점심시간을 꼭 붙들어야 한다.
나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전자책을 구입했고, 아래의 문장들을 찾아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역사는 이상주의와 투쟁과 절망과 열정과 성공과 실패와 무지무지하게 긴 점심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점심은 (a) 인간의 영적 삶의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b) 대단히 훌륭한 식당에서 먹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나라가 저지른 죄악들을 무조건 토요일 점심때 주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일로 보상하곤 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면 공짜로 선전이 되니까. 하지만 공짜 점심이란 없는 법이다. 아니, 그녀는 그 문장을 다시 삭제했다.”
더글러스 애덤스는 점심에 미친 사람답게 곳곳에서 ‘점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대단히 훌륭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점심은 길어야 한다. 영국인들의 맛없는 음식을 풍자하기 위해 점심의 샌드위치를 등장시키고, 점심이라는 문장을 썼다가 삭제하기도 한다. 더글러스 애덤스가 좋아하던 작가 커트 보니거트가 『챔피언들의 아침식사(Breakfast of Champions)』로 아침을 강조했다면, 이 사람은 ‘히치하이커들의 점심식사’를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혹시, 어쩌면, 점심이라는 단어를 42번 사용한 것은 아닐까? 나는 전자책의 검색 기능을 이용해서 숫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쉽게 총 44번이었다. 한 번 더 세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착각한 게 있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영어로 쓴 책이잖아. 다를 수도 있겠네? 나는 인터넷으로 영문 전자책을 구입했다.
맙소사. 충격, 공포. 이를 어쩌지?
LUNCH
나는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알아버렸다. 더글러스 애덤스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총 42번 ‘lunch’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Breakfast’는 10번, ‘dinner’는 고작 5번이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컴퓨터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특정 단어가 몇 번 쓰였는지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분명 그가 의도한 게 분명하다. 소름…….
뒤늦게 모든 조각을 결합시켰다. 소설의 주인공 포드는 아서에게 책을 건넨다. 그 책은 바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고 이렇게 말한다. “일종의 전자책이지.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이 전부 들어 있어. 그게 바로 이 책의 사명이야.” 종이책으로는 ‘lunch’가 몇 번 등장하는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전자책으로 읽어야만 메시지를 알아차리기 쉽다.
어쩌면 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어느새 다 읽은 건지도 모른다. 하도 여러 번 군데군데 읽어서 다 읽어놓고도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읽을 때마다 익숙하고, 그러면서도 또 새로워서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독서 방법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의자에 올곧은 자세로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읽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은 안내서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때, 지금 있는 곳에서 어떻게 버텨야 할지 난감할 때,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 이 책을 펼쳐야 한다. 아무 데나 펼쳐도 내가 원하는 우주가 펼쳐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소설을 읽고 쓰는 일은 다른 은하수로 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고, 이 책은 우리가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우주선이다.
그리고, 점심은 무척 중요하다.
*김중혁 소설가. 2000년 <문학과사회>에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소설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스마일』, 산문집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등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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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더글러스 애덤스> 저/<김선형>,<권진아> 공역8,100원(10% + 5%)
1978년 BBC 라디오 드라마로 시작하여, TV드라마, 책, 음반, 게임 등 온갖 버전으로 확장되며 사랑 받아온 '코믹SF' 장르의 고전. '지구는 어떤 범차원적인 종족이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설계한 슈퍼컴퓨터'라는 설정 등 기발한 착상과 유머감각으로 매니아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아온 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