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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사랑은 전쟁 아니 정치 - 『망설이는 사랑』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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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산업의 네트워크 속에서 팬들의 사랑은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과 노고 역시 수반한 채 지속된다.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통해 동시대 문화를 탐구했던 윤아랑 평론가가

대중문화, 시각예술 등 다양한 작품을 자유롭게 리뷰합니다.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나는 케이팝 남자 아이돌 중에서 NCT의 정우를 가장 좋아한다. 일단 내가 환장하는 또렷한 미소년이라는 게 입덕 계기였다. 귀여움과 날카로움을 자연스레 오가는 그의 독특한 인상이 점점 맘에 들어왔다. 아이돌로서 노래와 춤 실력이 전반적으로 고른 것도 퍽 맘에 들었다. 한편으론 항상 활발하고 긍정적인 '햇살캐'같지만, 다른 한편으론 여리고 소극적이며 항상 많은 걱정을 안고 있다는 양면의 성격은 '돌봐주고 싶다'는 맘을 자극하기도 했다. 나는 점점 그의 사진이나 영상을 모으기 시작했고, 종종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거나 그의 인스타 라이브를 시청하기도 했으며, 갈수록 그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됐다. 세상에! 누가 그랬었지, 상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사랑에 빠진 거라고.

하지만 이 사랑은 약간의 덜컹거림을 수반했다. 아이돌 개인의 과도한 상품화나 자원 낭비처럼 케이팝 산업이 지닌 부정적 측면을 극렬히 혐오하던 내가 아이돌 멤버를 (‘얼빠질’ 이상으로) 좋아한다는 건 적잖이 모순적이었다. 거기다 NCT란 그룹 자체의 지지부진한 성과는 안타까웠고, 정우가 남을 웃기려고 하다 실패할 땐 괜히 스스로가 민망해지기도 했으며, 최근 그가 출연했다고 해서 굳이 찾아본 유튜브 파일럿 예능 〈웰컴 고스트 클럽〉은 다른 지지부진한 아이돌 자체 콘텐츠들과 다를 바 없어서 슬펐다. 이렇게 나를 종종 난감하게 만드는 사랑을 굳이 이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몇 번 들었지만, 악재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볼 때 느끼는 치유의 기분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음악으로서 케이팝에 이젠 아무 관심도 없고, 솔직히 말해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케이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호들갑에 꼴값이라고도 생각해서, 내가 쓰는 글에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이전에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안희제의 근사한 연구서 『망설이는 사랑』을 이 자리에 소개하고 싶단 맘을 먹고 나니, 아무래도 나의 사정을 먼저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뒤엉킨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바로 이 책이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안희제는 "이것은 팬덤에 대한 책이 아니다"라고 책의 초장에 못을 박는다. 그를 따라 앞서서 못을 박자면, 『망설이는 사랑』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요즘 인문학자들의 말을 쓰자면 정동이고, (지나친 단순화를 무릅쓰고) 좀 더 평범한 말을 쓰자면 삶을 추동하는 힘이다. 하지만 힘이라고 해서 긍정적인 원동력만을 얘기하는 건 아닌데, 사랑에 대해 같잖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대목은 여기에 전혀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 방금 이 책을 펼쳐서 나온 적절한 구절을 한 번 끌어와 본다.

"논란 속 팬들의 망설임은 아이돌 아티스트 개인을 상품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려 노력함으로써 그를 인격체로 구성해 내려는 윤리적 실천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윤리적 실천이 또 다른 윤리적 실천, 즉 자신의 덕질이 돌판 안팎의 불평들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하는 실천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투의 장면이기도 했다."(215쪽)



케이팝 산업의 네트워크 속에서 팬들의 사랑은 행복뿐만 아니라 고통과 노고 역시 수반한 채 지속된다. 이들은 자신의 ‘최애’가 학교폭력이나 성폭력 사건 같은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논란이 일어났을 때 ‘최애’를 비도덕적이라 ‘선고’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들 때문에 속을 썩이며, 멤버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덮어놓고 옹호하거나 아예 탈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내할 줄 아는 부모 마냥 그가 반성한 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길 기대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페미니스트이면서 성추행 혐의를 받는 ‘최애’를 믿는 자신을 의심하기도 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덕질’이란 게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그것을 자꾸 신경 써서 “가장 모순은 돌덕”이라 자조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팬들은 자신의 사랑에 의해 죄책감과 걱정을 껴안은 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안희제는 (그루피와 빠순이의 시대를 지난) 오늘날의 아이돌 팬덤을 맹목적이고,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히스테릭한 “시녀”들로 바라보는 대신 케이팝 산업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중적인 심리와 행동을 영유하는 주체들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혹여라도 그러한 다중성을 그저 모순이나 불행이나 무용한 짓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그는 힘주어 주장한다. 아이돌 논란에 대한 다양한 사례연구 속에서 그가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사랑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질이다. 가령 어떤 팬들은 자신이 속한 케이팝 산업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추접스럽고 폭력적인지 ‘머글’들보다 훨씬 잘 알고 있으며, 그 네트워크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방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로 그 네트워크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요구한다.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는” 대신 “쫓겨나는 모습”이 마냥 무책임하게 반복되는 ‘캔슬 컬쳐’에 문제제기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서 안희제가 요구하는 대로, 이런 양상을 ‘집단감응’의 공론장으로 바라보자. ‘이성’에 따라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양한 정동적 부대낌”으로 새로이 인식되고 구성되어야 할 광범위한 공론장. 그렇다면 팬들의 사랑은 그런 공론장에서 누군가가 ‘바깥’으로 추방당하는 것을 의문시하고 문제 삼으며 방지하게끔 만드는 역동적인 태도이자 힘으로 재발견될 것이다. 사실 어떤 논란이 생기자마자 ‘바깥’을 가리키는 부정은 몹시 손쉬운 것이지 않던가? 그 반대편에서, 네트워크 안에 기어이 머무르며 그 모든 고통과 노고를 감내하고 고민하며 행동을 이어가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윤리적이며 또한 정치적이라 해야 한다. 

요컨대, 스스로의 다중성을 경험케 하는 고통을 주는 동시에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거듭 돌아보게 만들고 나아가 각성하게끔 할 의지를 주는 힘이 바로 안희제가 팬들에게서 발견한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성질의)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팬덤이 현대 정치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이기에 따라 요구되고 형성된 발명품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고 활동하는 '자연물'이기도 하단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체제의 지지체이자 변수로서의 팬덤. 이로써 『망설이는 사랑』은 팬들의 심리와 활동에 잠재된 정치를 가능한 것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아름다운 시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덧붙이건대, 『망설이는 사랑』은 아이돌 팬덤의 사랑을 그 자체로 긍정적인 역량으로 재정의하려는 환원적인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팬덤에게 그리고 그들과 같은 미디어 생태계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던져진 요청의 시도라고 봐야 할 터이다. 잠재된 정치를 함께 끌어올려 달라는 요청. 그리고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걸 넘어 필요한 요청이지 않을까. 파블로 피카소의 말년의 연인 중 하나였던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에게 결별을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의 노예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야." 역시 이 말엔 변치 않는 진리가 담겨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트위터에다 “정우”를 검색하러 간다…



망설이는 사랑
망설이는 사랑
안희제 저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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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망설이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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