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가자, 도파민 없는 세계로 : 웹 예능 ‘채씨표류기’

웹 예능 콘텐츠 '채씨표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몬스타엑스 채형원을 호스트로 내세운 웹 예능 <채씨표류기>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반짝이는 단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도파민(dopamine)이라는 물질이 있다. 시상 하부에 의해 분비되는 신경호르몬으로, 뇌신경 세포의 흥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어쩐지 멀미가 나는 꽤 어려운 의학용어지만, 현대인 가운데 도파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기만 알까. 21세기, 특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열이면 열 무언가의 도파민에 중독된 상태일 게 틀림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는 하루, ‘자야 하는데’만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는 엄지손가락. 그 가운데 케이팝은 가장 고단수의, 끝없는 도파민 분비를 적극 독려하는 문화 콘텐츠다. 격렬한 퍼포먼스에서 공과 사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라이브 방송까지, 도파민의 고향, 도파민의 성지, 도파민의 끝. 그게 바로 케이팝이다.

한 남자가 있다.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정면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다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앉는다. 너른 벌판에 저 멀리 구불구불한 능선이 평화로이 보인다. 가방에서 손수건으로 싼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그는 백팩을 주섬주섬 연다. 케이스에서 휴대용 방석을 꺼내 엉덩이 아래에 깐다. 다시 가방을 연다. 삶은 달걀 두 개가 든 지퍼 백이다. 달걀 하나를 꺼내 깐다. 잘 깐다. 다 깐 달걀을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아무래도 목이 마른 지 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조신하게 지퍼 백을 닫고 가방에 넣은 그가 이번에는 주둥이가 묶인 다른 비닐을 하나 더 꺼낸다. 묶은 부분이 잘 풀리지 않는지 고전한다. 안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사과 몇 조각이 들어 있다. 천천히 두어 조각 집어먹더니 다시 비닐을 묶는다. 가방에 넣는다. 방석도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는다.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한숨을 한 번 쉰다. 가방을 메고 일어서 카메라를 들어 주위를 한 번 비춘다. 180도 정도 돌아간 카메라가 영상을 찍던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프로그램 제목이 뜬다. <채씨표류기>. 그룹 몬스타엑스의 멤버 채형원을 호스트로 내세운 웹 예능 콘텐츠다. 

본편 전 공개된 8분 30초의 예고 영상은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사전 미팅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무수한 선택지 가운데 고작 ‘불멍’을 택한 사람다운 슴슴하고 느긋한 성정이 프로그램 전반을 이끈다. <채씨표류기>의 첫 표류지는 채형원의 아버지 채종강 씨의 고향인 금호도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작은 섬 금호도는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 대부분이 그렇듯 옆집 밥상에 몇 개의 수저가 올라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다. 아이들이 없어 초등학교도 폐교된 지 오래인 금호도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섬을 찾은 지 무려 20년이 지난 ‘종강이 아들’을 동물적으로 기억해 낸다. 한 사람 건너 삼촌이고, 한 사람 건너면 외숙모다.

산 넘고 물 건너 섬을 찾은 이후에도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 년에 두 번, 명절마다 만나는 우리네 고향의 특별한 것 없는 풍경과 이야기를 닮은 영상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서울 사는 조카는 약주 좋아하는 삼촌을 위해 양주 두 병을 선물로 들고 간다. 삼촌은 오랜만에 방문한 조카를 위해 아껴놨던 제철 민어를 꺼내 정성스럽게 회를 뜬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이모 마음은 가지나물 못 먹는다는 조카 말을 귓등으로 넘긴 채 반찬 접시 위에 자꾸만 가지나물을 새로 꺼내 놓게 한다. 삼촌은 조카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작은 섬 바닷가에서 자신이 담근 담금주를 기울이며 ‘앞으로 평생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웃는다. 키 180이 훌쩍 넘는 건장한 연예인 조카를 보며 이모는 ‘작은 체구’라 말한다. 금호도에서 일어나는 별다른 에피소드라고는 담금주와 양주, 소맥을 섞어 마신 형원이 다음 날 아침 겪는 격렬한 숙취 정도다. 그런데도, 한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웹 예능 <채씨표류기>의 한 장면

온갖 자극이 난무하는 시대에, 도파민의 최전선 케이팝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이렇게까지 무구하게 도파민 없는 콘텐츠를 추구한 건 지난해 래퍼 이영지와 함께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이하 <차쥐뿔>)을 메가 히트시킨 바로 그 제작진이다. <차쥐뿔> 제작진의 자세는 그때도 지금도 같다. 출연자가 싫어하는 건 굳이 시키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반짝이는 단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아버지의 고향을 20년만에 찾아간 <채씨표류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채형원은 추억 어린 바닷가의 주인 모를 평상에 누워 중얼거린다. ‘한 번 더 깨달았어. 지금 내가 살고 있구나’. 그 한 마디에서, 20년 만에 찾은 조카가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팔이 떨어져라 흔들며 인사하는 이모의 모습에서 그만 마음이 출렁여 버렸다. 다량의 도파민을 분출시킬, 어제보다 더 큰 자극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조차 도파민 중독이 아니었나 싶다. 도파민 없는 세계 앞에 <채씨표류기>가 용감하게 섰다. 앞으로 이들이 떠나 수집해 올, 아무것도 없지만 그게 결국 모든 것인 이야기와 풍경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추천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등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KBS, TBS, EBS, 네이버 NOW 등의 미디어에서 음악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EBS 스페이스공감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TBS FM 포크음악 전문방송 <함춘호의 포크송> 메인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한마디로 음악 좋아하고요, 시키는 일 다 합니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