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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도파민 없는 세계로 : 웹 예능 ‘채씨표류기’
웹 예능 콘텐츠 '채씨표류기'
몬스타엑스 채형원을 호스트로 내세운 웹 예능 <채씨표류기>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반짝이는 단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도파민(dopamine)이라는 물질이 있다. 시상 하부에 의해 분비되는 신경호르몬으로, 뇌신경 세포의 흥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어쩐지 멀미가 나는 꽤 어려운 의학용어지만, 현대인 가운데 도파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알기만 알까. 21세기, 특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열이면 열 무언가의 도파민에 중독된 상태일 게 틀림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큰 사이즈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는 하루, ‘자야 하는데’만 반복하면서 멈추지 않는 엄지손가락. 그 가운데 케이팝은 가장 고단수의, 끝없는 도파민 분비를 적극 독려하는 문화 콘텐츠다. 격렬한 퍼포먼스에서 공과 사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라이브 방송까지, 도파민의 고향, 도파민의 성지, 도파민의 끝. 그게 바로 케이팝이다.
한 남자가 있다.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정면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다 적당한 그늘을 찾아 앉는다. 너른 벌판에 저 멀리 구불구불한 능선이 평화로이 보인다. 가방에서 손수건으로 싼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그는 백팩을 주섬주섬 연다. 케이스에서 휴대용 방석을 꺼내 엉덩이 아래에 깐다. 다시 가방을 연다. 삶은 달걀 두 개가 든 지퍼 백이다. 달걀 하나를 꺼내 깐다. 잘 깐다. 다 깐 달걀을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킨다. 아무래도 목이 마른 지 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조신하게 지퍼 백을 닫고 가방에 넣은 그가 이번에는 주둥이가 묶인 다른 비닐을 하나 더 꺼낸다. 묶은 부분이 잘 풀리지 않는지 고전한다. 안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사과 몇 조각이 들어 있다. 천천히 두어 조각 집어먹더니 다시 비닐을 묶는다. 가방에 넣는다. 방석도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는다.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한숨을 한 번 쉰다. 가방을 메고 일어서 카메라를 들어 주위를 한 번 비춘다. 180도 정도 돌아간 카메라가 영상을 찍던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프로그램 제목이 뜬다. <채씨표류기>. 그룹 몬스타엑스의 멤버 채형원을 호스트로 내세운 웹 예능 콘텐츠다.
본편 전 공개된 8분 30초의 예고 영상은 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사전 미팅에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무수한 선택지 가운데 고작 ‘불멍’을 택한 사람다운 슴슴하고 느긋한 성정이 프로그램 전반을 이끈다. <채씨표류기>의 첫 표류지는 채형원의 아버지 채종강 씨의 고향인 금호도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작은 섬 금호도는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 대부분이 그렇듯 옆집 밥상에 몇 개의 수저가 올라가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곳이다. 아이들이 없어 초등학교도 폐교된 지 오래인 금호도 주민들은 마지막으로 섬을 찾은 지 무려 20년이 지난 ‘종강이 아들’을 동물적으로 기억해 낸다. 한 사람 건너 삼촌이고, 한 사람 건너면 외숙모다.
산 넘고 물 건너 섬을 찾은 이후에도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 년에 두 번, 명절마다 만나는 우리네 고향의 특별한 것 없는 풍경과 이야기를 닮은 영상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서울 사는 조카는 약주 좋아하는 삼촌을 위해 양주 두 병을 선물로 들고 간다. 삼촌은 오랜만에 방문한 조카를 위해 아껴놨던 제철 민어를 꺼내 정성스럽게 회를 뜬다.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이모 마음은 가지나물 못 먹는다는 조카 말을 귓등으로 넘긴 채 반찬 접시 위에 자꾸만 가지나물을 새로 꺼내 놓게 한다. 삼촌은 조카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작은 섬 바닷가에서 자신이 담근 담금주를 기울이며 ‘앞으로 평생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웃는다. 키 180이 훌쩍 넘는 건장한 연예인 조카를 보며 이모는 ‘작은 체구’라 말한다. 금호도에서 일어나는 별다른 에피소드라고는 담금주와 양주, 소맥을 섞어 마신 형원이 다음 날 아침 겪는 격렬한 숙취 정도다. 그런데도, 한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온갖 자극이 난무하는 시대에, 도파민의 최전선 케이팝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이렇게까지 무구하게 도파민 없는 콘텐츠를 추구한 건 지난해 래퍼 이영지와 함께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이하 <차쥐뿔>)을 메가 히트시킨 바로 그 제작진이다. <차쥐뿔> 제작진의 자세는 그때도 지금도 같다. 출연자가 싫어하는 건 굳이 시키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반짝이는 단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아버지의 고향을 20년만에 찾아간 <채씨표류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채형원은 추억 어린 바닷가의 주인 모를 평상에 누워 중얼거린다. ‘한 번 더 깨달았어. 지금 내가 살고 있구나’. 그 한 마디에서, 20년 만에 찾은 조카가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팔이 떨어져라 흔들며 인사하는 이모의 모습에서 그만 마음이 출렁여 버렸다. 다량의 도파민을 분출시킬, 어제보다 더 큰 자극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조차 도파민 중독이 아니었나 싶다. 도파민 없는 세계 앞에 <채씨표류기>가 용감하게 섰다. 앞으로 이들이 떠나 수집해 올, 아무것도 없지만 그게 결국 모든 것인 이야기와 풍경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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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