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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퇴고라는 선택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9화
운이 좋다면 초고는 한 번에도 쓸 수 있지만, 퇴고는 결코 한 번에 할 수 없습니다. 퇴고는 지루하고 지난한 작업이에요. 욕심을 내면 중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퇴고란 무엇일까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퇴고’라는 단어가 어떤 한자로 이뤄져 있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만 ‘고’는 ‘원고(原稿)’나 ‘초고(礎稿)’에 쓰이는 ‘볏짚 고(稿)’일 거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퇴고를 ‘완성된 원고를 고친다’는 의미로 여기고 자주 사용하다 보니 생기는 합리적인 추론이지요. 하지만 퇴고라는 단어는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두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 가도(賈島)라는 시인이 장안 거리를 걸으며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일종의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에 부딪힌 상태였습니다. 짓고 있던 시의 마지막 구절이 속을 썩이고 있었거든요.
僧( )月下門
풀숲 오솔길과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든 새가 등장하는 고요한 풍경을 그리던 시는, 마지막 행에서 달빛 아래 문 앞에 선 스님을 그립니다. 문제는 괄호 안에 들어갈 글자였는데요,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두 글자가 바로 ‘밀 퇴(推)’와 ‘두드릴 고(敲)’였던 것이죠.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민다’와 ‘문을 두드린다’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기가 길 한가운데서 높으신 분의 행차를 막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길을 비켜라!”
수행원들은 길을 가로막은 시인 가도를 붙잡아 경조윤,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높으신 분 앞에 세웠습니다. 가도는 높으신 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 한유(韓愈)였기 때문입니다. 가도의 사연을 들은 한유는 호통을 치거나 벌을 내리는 대신 시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두드릴 고가 더 좋겠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뜻밖에도 퇴고의 핵심이 바로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우리가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밀 퇴와 두드릴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퇴고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퇴고는 단순히 비문이나 오타를 잡아내는 일이 아니라, 근사한 해결책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며 막연히 원고를 읽고 또 읽는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듣거나 여럿이 모여 합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1번과 2번 중에서 무엇이 더 나은가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한유 앞에 선 가도처럼요.
하나의 소설에 대해 어떤 작가는 열 개의 발표되지 않은 결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저도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발표한 소설과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을 여럿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글쓰기란 본질적으로 선택하며 나아가는 일입니다. 오른쪽과 왼쪽, 동과 서와 남과 북, 위층과 아래층…… 순간의 선택이 모이고 모여 개연적이고 필연적인 하나의 결말에 가닿는 일입니다. 중간에 단 하나의 선택이라도 없었다면 결코 도착할 수 없는 곳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따라서 퇴고의 선택은 텍스트의 층위(문장 안에서의 가장 좋은 선택)에서 한 번 이뤄지고, 이후 콘텍스트의 층위(문맥 속에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다시 한번 이뤄져야 합니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이제 실전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실제적인 퇴고의 기술은 이런 것입니다
1. 냉각기 갖기
내가 쓴 글에 너무 골몰해 있으면 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너무 들이밀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완성된 초고와 물리적,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글과 나 사이에 이어져 있는 정신적 탯줄을 자를 시간이 필요해요. 최소한 며칠, 일반적으로는 1~2주, 많게는 6주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다른 글을 쓰는 것은 괜찮지만 이 원고에 대한 생각은 되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2. 내력벽 무너뜨리기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라(Kill your darlings).” 내력벽(bearing wall)이란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벽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작가가 보기에 가장 잘 쓰였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감의 원천인 부분을 지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소설의 최종 목표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말하지 않는 데 있으니까요. 애니 딜러드의 말을 들어보시죠. “당신이 반드시 삭제해야 하는 부분은 가장 잘 쓰인 부분일 뿐 아니라,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부분이다. 핵심 구절이자, 나머지 구절들이 모두 매달려야 하는 구절이자, 당신 자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된 구절.”
3. 한 번에 하나씩만 고치기
운이 좋다면 초고는 한 번에도 쓸 수 있지만, 퇴고는 결코 한 번에 할 수 없습니다. 퇴고는 지루하고 지난한 작업이에요. 욕심을 내면 중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고칠 때는 한 번에 하나의 목표/이슈만을 정하고 접근하는 편이 좋습니다. 서술, 묘사, 대화, 장면, 인과관계, 내면, 디테일, 비유, 개연성, 장소와 배경. 그래야 작품의 전체적인 톤과 흐름도 맞출 수 있습니다.
4. 처음부터 다시 쓰기
가장 안 좋은 퇴고 방식 중 하나는 피드백이나 합평 이후 지적을 들었던 부분들만 콕 집어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처럼 나중에는 보기 싫은 원고가 되기 쉽죠. 이런 식의 퇴고를 하고 나서 다시 모임에 원고를 가져가면, 반드시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원래 있던 장점도 사라졌는데요?” 결함이 있더라도 동일한 리듬, 특유의 분위기를 갖춘 글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 자신과 타인들이 그런 것처럼요.
제가 제안하는 방식은 음독과 다시 쓰기를 통해 고유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소리 내 읽으면서, 처음부터 다시 타이핑하는 것이죠. 눈으로만 보는 것과 손가락으로 다시 글자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결과물에 있어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퇴고는 눈으로 훑어보는 일이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더듬더듬 매만지며 나아가는 작업입니다.
5. 시간에 대한 감각
시간을 의식하고 감각하는 것 역시 초고를 쓸 때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퇴고할 때는 두 가지 층위의 시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는 작품 내적인 시간이 어떤 속도와 리듬으로 흐르는지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읽는 독자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소설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다루고 있고, 독자는 이 소설을 다 읽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를 측정하고 확인하는 일이죠. 작품 안팎의 진행 속도를 조절하는 일(pacing)은 작품에 관한 독자의 최종적인 인상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6. 삭제와 추가, 분량
1) 삭제: 모든 종류의 비유, 추상, 일반론, 관념, 아포리즘, 긴 것, 불명확한 것, 불필요한 것, 단어-문장-표현에 녹아 있는 내 습관.
2) 추가: 디테일, 디테일, 디테일.
3) 분량: 스티븐 킹은 ‘수정본=초고-10%’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량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고 그대로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삭제와 추가의 물리적 합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물론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줄이는 것이 대체로 맞습니다.
7. 결말
어떤 작가들은 가능한 결말들의 목록을 쭉 나열해 두고 위에서 두세 번째까지를 걸러낸다고 합니다. 그런 결말은 뻔한 결말이기 쉽기 때문이죠. 다르게 말하면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할수록 새롭고 신선한 결말이 나올 가능성이 커집니다. 금방 떠오르는 생각은 남들도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결말에서 여러 선택지를 갖는 것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최종적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결말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는 결국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에 따라 결정되거든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바꾸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선택, 어떤 장면이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중 제일 좋은 것을 고르라는 것이죠. 맨 처음 가도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 )”는 이미 결정된 결말입니다. 퇴고는 말 그대로 그 안에 들어갈 ‘민다’와 ‘두드린다’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무엇이든 초고는 다 쓰레기다(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헤밍웨이가 한 것으로 유명한 말이죠. 원문의 단어는 사실 쓰레기보다 더 나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요. 헤밍웨이 같은 거장도 초고를 ‘고치고 발전시켜야 하는 무언가’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묘한 위안을 줍니다. 아마추어는 초고에서 멈추지만, 프로페셔널은 초고에서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C. 노트의 말을 마음에 새기며, 저도 이제 이 원고의 퇴고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작가만이 고쳐 쓸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뭔가가 만들어지는 곳이고, 가장 중요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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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