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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묘사, 시제, 디테일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8화
묘사는 시간을 멈추는 일입니다. 서술과는 반대되는 개념이죠. 되도록 시간이 흐르지 않게 하는 거예요. (2023.08.31)
“돈 텔, 벗 쇼(Don’t tell, but show)!”
말해 주지 말고 보여줘라. 작법서를 읽거나 소설 창작 수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물론 이건 죽은 비유이자 클리셰이자 상상만 해도 끔찍한 장면이지만요) 들었던 말일 겁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보여준다는 건 뭘까요?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장면을 만들어야 합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는 흔히 ‘장면화’라고 하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죠: 서술, 묘사, 대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서사를 기술하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에 시간을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을 뒤로 밀어내어 인물을 움직이게 하고 사건을 앞으로 진행시키는 거죠. 그렇다면 시간의 측면에서 묘사는 서술과 무엇이 다를까요?
묘사는 시간을 멈추는 일입니다. 서술과는 반대되는 개념이죠. 되도록 시간이 흐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자, 어떤 인물이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들어갔다’는 것은 서술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인물의 위치가 바뀌었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간 인물은 그곳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천장에는 18세기 스타일의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벽에는 누렇게 변색된 인물화가 여러 점 걸려 있습니다. 바닥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축축한 진홍색 카펫이 깔려 있는데, 밟을 때마다 물기가 올라옵니다. 어두운 창밖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얼굴 위로 어디선가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묘사입니다.
옛날 소설들에서는 대체로 묘사가 길었습니다. 주인공이 어떤 장소에 들어가면 작가는 몇 페이지씩 그곳에 대한 길고 장황한 묘사를 늘어놓기도 했죠.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최소한의 묘사와 서술로 최대한의 사건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속도에 집착하는 현대의 기술 문명 때문일까요? 우리의 인내심이 부족해진 탓일까요? 영상 매체의 영향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가 독자들의 독서 패턴과 취향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서술과 묘사의 서로 다른 시간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시제입니다. 서술에서 주로 사용하는 시제가 ‘~했다’는 과거 시제라면, 묘사에서는 ‘~한다’는 현재 시제가 쓰이죠. 왜일까요? 그렇다면 하나의 이야기에서 서술할 때는 과거 시제, 묘사할 때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 한 편의 글에서 시제는 하나로 통일, 유지되어야 합니다. 시점과 시제는 마치 기차의 레일과 같아서, 가장 좋은 상태는 독자가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때입니다. 기차가 덜컹하기 시작하면 레일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기차 아래 뭔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저 밑바닥 레일의 존재는 여행 내내 계속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게 될 겁니다. 이 진동과 소음이 반복되면 어떨까요? 우리에겐 더 이상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보다는 이 열차가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지, 멈추거나 충돌하거나 심지어 탈선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되겠죠.
따라서 작가는 이야기를 서술 중심으로 써나갈지, 묘사 중심으로 써나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제 선택과 곧바로 연결되고요. 과거 시제-서술을 선택하면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 같은 긴 시간과 서사가 담긴 역동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고, 현재 시제-묘사를 선택하면 단편소설에 어울리는 생생한 장면과 디테일, 정적이고 현재적인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소설이 길어질수록 묘사 중심의 현재 시제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장편소설 전체가 현재 시제로만 쓰이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묘사에서 중요한 것은 디테일입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는 구체적인 대상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말해 주는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위의 예들은 모두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들입니다. 얼마만큼의 돈이면 충분할까요? 어떤 사람에겐 백만 원이면 되겠지요. 하지만 다른 이에겐 십억이라도 부족한 돈일 수 있습니다. 디테일이 없는 주관적 표현들은 우리에게 텅 빈 의미를 남깁니다. 오직 작가의 주관과 편견만 담겨 있을 뿐이죠. 인물이나 대상을 묘사할 때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세부 사항들을 만들어 넣어주셔야 합니다. 이렇게요.
많은 이들이 하는 오해 중 하나는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쓰면 분량이 늘어나거나 군더더기가 생긴다는 것인데요, 위의 예를 보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천만 원’과 ‘시궁창 냄새’는 이전의 표현과 글자 수까지 같고, ‘지독한 이기주의자’와 ‘터널 안 8중 추돌사고’ ‘192cm’는 음절이 조금 늘어나긴 했지만(‘교통사고’라고 하면 더 줄일 수 있겠죠) ‘3년 후’는 오히려 훨씬 짧아졌죠. 다행인 것은 퇴고 과정에서 우리가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묘사에서 실종된 구체성을 찾아 디테일로 바꿔주는 작업을 통해서요.
이러한 디테일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감각적 디테일이나 장소/배경, 객관적 상관물 같은 개념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디테일은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직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이 우리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본질은 감각한다는 뜻입니다. 감각만이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묘사는 감각을 감정으로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말해 주면 우리는 느낄 수 없지만, 보여주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묘사는 주인공의 내면과 감각, 혹은 다른 인물들이나 장소와 배경 같은 외부 세계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의도한 어떤 감정에 가닿게 만듭니다.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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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