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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이야기, 서사, 플롯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7화
서사 창작이란 이야기에 시간을 부여하고, 인과를 만들어 주는 일이죠.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연결, 편집, 변형, 재구성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2023.08.17)
격주 목요일, <채널예스>에서 소설가 문지혁의 에세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연재합니다. |
이야기와 서사는 무엇이 다를까요?
이렇게 설명해 보지요. 저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술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데, 더 싫은 것은 그 자리에서 제가 소설가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꼭 누군가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하기 마련이거든요.
― 이봐요 작가 양반, 내가 베스트셀러감 하나 알려줄까?
이런 대사 끝에 듣게 되는 이야기는 십중팔구 본인의 인생 역정입니다. 열정적인 발화자와는 달리 저에겐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듣고 있노라면 『유혹하는 글쓰기』 속 스티븐 킹의 말을 되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그러나 대개는 흥미롭지 않다.
술자리에서 호기롭게 "내가 살아온 인생이 대하소설이야"라고 말하는 분 중에 실제로 대하소설을 쓴 사람을 저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야기(story)와 소설이 필요로 하는 서사(narrative)가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사와 서사 담화(narrative discourse)에 관한 이론서라면 H. 포터 애벗의 『서사학 강의』를 비롯해 수많은 이론서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예시는 영국의 소설가 E.M.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에 등장하죠.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왕이 죽자 슬픔을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는 플롯(서사)이라는 설명입니다.
저는 수업에서 이야기와 서사의 차이를 속담에 빗대어 설명하곤 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정확하고 간결한 비유는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이야기란 구슬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어디에서나 발견되며, 아무리 많아도('서 말'은 대략 54리터 정도라지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기 어렵죠. 아직은 보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꿰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슬은 비로소 보배가 됩니다. 구슬과 구슬의 특정한 연결을 통해 일종의 비가역적인 변신(transformation)이 일어나는 셈입니다.
구슬을 꿰는 사람, 그가 바로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전기수이자 스토리텔러입니다.
아까 술자리에서 저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던 분은 구슬은 가지고 있으나 어떻게 꿰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평범해 보이는 구슬도, 누가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근사한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구슬들이 꿰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하겠지만요.
소설 공학적으로 이 꿰는 행위의 핵심 요소는 '시간'과 '인과'입니다.
서사 창작이란 이야기에 시간을 부여하고, 인과를 만들어 주는 일이죠.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 연결, 편집, 변형, 재구성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E.M. 포스터의 예를 조금 바꾸어 살펴볼까요?
1. 왕이 죽었다. 왕비가 죽었다.
→ 이것은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이므로 아직 이야기(구슬)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2. 왕이 죽었다. 그러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왕비가 죽었다.
→ 이제 이야기에 시간과 인과가 부여되었습니다. 왕이 죽은 '이후에' 왕비는 '슬픔 때문에' 죽었습니다. 기본적인 서사가 만들어졌죠. 다만, 아직도 우리는 왕이 왜 죽었는지, 왕비의 슬픔이 어떤 감정에 기인하는지(상실, 배신감, 자기연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3. 왕이 죽었다. 그러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왕비가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왕궁을 가득 채운 날, 왕비는 익사했다.
→ 조금 더 특정한 시간('눈물이 왕궁을 가득 채운 날')이 부여되고, 왕비의 죽음에 일종의 환상성이 깃들었습니다.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왕비의 사인도 밝혀졌고요. 문제는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볼 때 개연성과 내적 필연성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서사는 '판타지'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고 이 역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서사가 리얼리즘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4. 왕이 죽었다. 왕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왕의 배다른 동생이 왕을 독살한 것이다. 왕비는 왕의 저녁 식사에 왕의 동생이 건네준 독약을 넣었다. 왕비와 동생은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고 둘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열린 새로운 왕의 즉위식에서, 왕비는 선왕을 독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넣은 것과 똑같은 독약을 마시고 죽어야 했다.
→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서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이죠. 왕의 동생은 사랑을 미끼로 자기 형수이기도 한 왕비를 유혹하여 왕을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왕좌를 차지한 순간 왕비 역시 처단하고요. 왕비가 왕을 죽이는 데 사용한 독약과 자신을 죽게 만든 독약이 같다는 사실은 이 서사에 '아이러니'가 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흥미로운 사건이자, 상징이자, (아이러니가 들어 있으므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로 읽힐 수 있습니다. 현대 문학에서 아이러니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 서사는 무대와 배경을 현대로 바꾼다 해도 전혀 손색없는 미스터리, 서스펜스, 스릴러로 확장될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플롯은 무엇이 다를까요? 대개 우리는 이야기, 서사, 플롯이라는 개념을 혼용하거나 뒤바꾸어 사용합니다. 플롯 역시 누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데요. 저는 '플롯(plot)'이라는 단어가 지닌 본래의 뜻, 그러니까 '음모'를 중심으로 정의해 보고자 합니다.
플롯은 주인공을 향한 음모입니다. 이야기나 서사 속에서 주인공은 궁극적으로 어떤 변화의 지점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데, 플롯은 주인공이 '변할 때까지' 그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어 결국 작가가 의도한 도착 지점으로 몰고 가는 힘이자 전략입니다. 플롯은 종종 '마스터플롯(masterplot)'*처럼 고정된 이야기 유형이나 형식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주인공을 어떻게 괴롭힐까를 반복적으로 고민하다 정착된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 혹은 템플릿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플롯이 서사 장르에 따라 클리셰로 여겨지거나 비판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죠.
다만, 그렇다고 해서 플롯의 기능과 효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투성과 전형성을 극복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방식의 고통과 시련을 창조하는 것이 오늘날 작가에게 주어진 중요하고 어려운 숙제입니다.
*마스터플롯 :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야기 유형을 의미합니다. 마스터플롯은 다양한 맥락과 문화, 장르 속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며, 독자에게 이미 익숙한 원형이자 뼈대입니다. 예를 들어 '퀘스트(quest)' 마스터플롯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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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스티븐 킹> 저/<김진준> 역7,920원(10% + 5%)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딱 잘라 얘기하는 스티븐 킹이 속 시원하면서 무척 부럽다. 그리고 신체적 묘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손쉽게 드러내려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왜 지금까지의 그의 소설들이 스토리텔링을 위주로 하면서도 상습적인 진부함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