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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가을엔 도토리 6형제를 찾아 숲으로

10화 : 백로엔 도토리 공부가 제철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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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무렵 시골집 마당에 떨어졌던 새끼 제비들이 무사히 자라서 둥지를 떠났다는 소식을 인숙 씨가 전해주었다.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입추 무렵 시골집 마당에 떨어졌던 새끼 제비들이 무사히 자라서 둥지를 떠났다는 소식을 인숙 씨가 전해주었다. 제비들 몸이 성하려나 싶어 내내 걱정됐던 인숙 씨는 오며 가며 둥지를 유심히 관찰했단다. 떨어졌던 새끼 제비 두 마리는 처음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잘 날지 못했다. 그러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온 동네 제비들이 한 번씩 찾아와 응원해 주더란다. 할 수 있어, 같이 가자,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 마리 제비들이 수시로 찾아왔고, 마침내 어느 아침 모두 함께 남쪽으로 날아갔다는 해피 엔딩. 그 얘기를 전해 듣는 내내 수화기 저편에서는 밤의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이구나. 

제비는 남쪽으로 떠나가고, 먼 곳에서 기러기가 찾아오는 계절. 백로(白露)다. 이 무렵이 되면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들판의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히기에 붙여진 이름. 어렸을 적 아침에 시골길을 걸어 등교할 때면 발목을 적시던 찬이슬이 생각난다. 저마다 바짓단이 젖은 채로 책상 앞에 앉던 기억도. 그러고 보면 도시에 산다는 건 이슬에 발목 젖을 일이 좀처럼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을은 산책 생활도 바꾸어 놓는다. 더위에 지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때를 지나 선선한 바람이 등을 밀어주면 조금 더 걸어볼까, 저기까지만 더 가볼까 싶어진다. 여름내 무성한 초록을 보며 한동안 변화에 둔감했던 마음에도 불이 켜진다. 달라진 것은 무엇이고, 여전한 것은 무엇인지 관찰하며 걷기 좋은 계절. 여름의 색이 서서히 빠져나간 자리에 어떤 색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는지 지켜본다. 한 그루 나무에서 가장 먼저 물들기 시작한 이파리를 찾아내는 건 이 무렵의 작은 기쁨 중 하나. 너는 꼭대기서부터 노란 단풍이 드는구나. 너는 물가로 힘껏 뻗은 가지에서부터 빨간 단풍이 시작되고.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이미 문밖에 나가 있는 성격 급한 친구처럼 잎이 반 이상 떨어져 버린 나무도 목격한다. 



가을이다 싶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물병 하나만 챙겨 뒷산을 찾는다. 무더운 여름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9월에 들어서면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뒷산의 나무들이 나오지 않고 뭐 하냐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운동화 끈을 고쳐 메고 뒷산에 오른다. 산길은 어수선하다. 태풍과 비바람이 떨어뜨리고 간 것들이 흩어져 있어서다. 마른 나뭇가지와 이파리들, 아직 덜 여문 도토리들이 가지째 떨어져 있다. 모자가 붙어 있고 모양이 비교적 성한 것들을 골라 서너 개 주머니에 넣는다. 여물지 않은 도토리니까 다람쥐도 이해해 주겠지 하면서. 

이 무렵엔 누구와 걷든 도토리 토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초여름엔 ‘입하얀꽃’의 이름을 알려주는 게 산책의 즐거움이었다면, 가을엔 도토리 구별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털모자 3형제 vs 베레모 3형제 구별법. 삐쭉삐쭉한 털모자를 쓴 건 상수리•굴참•떡갈나무 열매고, 야무지게 멋 부린 베레모를 쓴 건 신갈•갈참•졸참나무 열매다. 검색창에 ‘도토리 6형제’라고만 입력해도 다양한 그림 자료가 뜬다. 저마다 마음에 드는 이미지 한 장을 사진첩에 넣어 다니며 올가을엔 도토리를 만날 때마다 구별해 보시길.

도토리는 참나뭇과(科)에 속하는 나무들의 열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도토리가 열리는 딱 한 종류의 ‘도토리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열매를 모두 도토리라 부른다. 이들 참나무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재질이 다른 나무보다 좋아 옛날부터 곡괭이, 쟁기 같은 농기구나 배를 만들 때 주로 사용됐다. 태워서는 ‘참숯’이 되어 끝까지 쓰였다. 이처럼 유독 쓰임이 좋아 ‘진짜’ 나무라는 의미에서 ‘참나무’라고 불리게 됐다니, 이름에서부터 조상들의 편애가 느껴진다.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 역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대표적인 양식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고을에 사또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도토리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된 것은 그런 연유라고. 나라에서는 흉년에 대비해 도토리를 수집해 창고에 저장해놓기도 했다니, 몹시 다람쥐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참나무에 얽힌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먼저 상수리나무. 임진왜란 때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피난을 떠나 도토리묵을 먹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수라상 맨 위에 오른 도토리’라는 뜻의 ‘상수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피난길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이 먹던 음식을 임금께 올린 것인데 선조가 이를 아주 맛나게 먹었다고. 

신갈나무는 새로 난 잎의 색이 갈색을 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쪽은 ‘신발 밑창’ 설이다. 옛날 나무꾼들이 숲속에서 나무를 하다 짚신 바닥이 닳으면 신 안에 이 잎을 깔아서 신었다고 해서 ‘신갈나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 다른 잎들에 비해 맨발에 닿아도 부드럽고 잘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이라 애용되었다고 한다. 

떡갈나무는 그럼 ‘신’이 아니라 ‘떡’에 깐 것일까? 정답. 시루떡을 찔 때 시루 밑에 떡갈나무 잎을 깔고 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떡갈나무 잎으로 떡을 감싸서 찌기도 했는데, 뒷면의 털이 방부작용을 해서 이렇게 찐 떡은 쉽게 변질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많은 참나무 이파리 중에서 어떻게 떡갈나무의 효능을 가려낸 것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굴참나무는 나무껍질의 골이 유난히 깊다 해서 ‘골참’이라 불리다 ‘굴참나무’가 되었다. 산간지방에서 두꺼운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집(굴피집)을 지을 때 사용했는데, 굴참나무 껍질은 유난히 보온성이 좋고 비가 좀처럼 새지 않아 유용했다고 한다.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도 이 굴참나무 껍질이다. 

갈참나무는 가을이 끝날 때까지 제일 오래 단풍 든 잎을 달고 있어서 가을참나무라는 말을 줄여 ‘갈참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졸참나무. 참나무 종류 중 잎과 열매가 가장 작아 ‘졸卒’을 붙여 졸참나무라 불리게 됐다. 참나무계의 졸병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더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원래 작은 것이 진국인 법. 졸참나무 도토리는 다른 도토리에 비해 떫은맛이 덜해서 묵을 만들면 맛이 제일 좋기로 알려져 있다. 

가을의 숲을 걸으며 몰랐던 걸 하나씩 알아가는 건 근사한 일이다. 산길을 걷는 동안 나무와 열매를 유심히 살피는 일. 도토리 모자만 보고도 정확하게 나무의 이름을 호명할 수 있게 되는 일.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묻는 말에 좋아하면 알게 돼, 대답하는 일. 가을은 마른 낙엽 위로 툭툭 도토리가 떨어지는 계절. 내가 누구게! 외치는 듯한 그 소리에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면, 이토록 환한 가을이다. 햇볕에 여물어가는 것들의 고소한 냄새, 알맞게 식은 바람, 저만치 높아진 하늘, 종일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구름……. 제철 행복을 찾아 길을 나서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왔다.




백로 무렵의 제철 숙제 

가을 산에 찾아가 도토리를 6형제를 구별해 보세요. 이파리보다는 열매로 구별하는 쪽이 좀 더 쉬울 거예요. 가을 학기 도토리 수업을 이수했다면, 책거리 장소로는 산 아래 식당을 추천합니다. 도토리묵이나 도토리전을 먹으며 새로운 배움을 기념하기로.


*추신

그동안 <김신지의 제철 숙제>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재는 10회로 끝나지만 절기는 계속해서 이어지니 지금이 무엇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인지, 미루지 말고 누려야 할 제철 행복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늘 살피면서 지내시기를. 따로 애쓰지 않아도 매번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이 계절을 모쪼록 선물처럼 여기며 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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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신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게 취미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으로 순간을 모은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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