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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눅눅해진 마음을 햇볕에 잘 말리고서
9화 : 처서엔 '포쇄'가 제철
한낮에 해를 보고 누웠기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뱃속의 책을 말리고 있소. (2023.08.22)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
입추와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묘하게 빈 공간이 생긴 듯하다. 앞으로 가을이 조금씩 들어차게 될 자리. 아침에 방문을 열고 나오면, 밤새 창을 열어두었던 거실에 시원한 아침 공기가 채워져 있는 게 느껴진다. 밤 산책도 기꺼이 나서게 됐다. 보름 전만 해도 달아오른 땅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밤에 겨우 현관문을 나서곤 했는데, 이젠 저녁 바람을 쐬러 이르게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리다 보면 올여름도 이렇게 가는구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사계절 중 여름만이 주는 서운함이다. 긴 방학이 끝나갈 때처럼, 여행지에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된 것처럼 뒤를 돌아보게 된다. 열대야가 한창 이어질 땐 에어컨을 켜고 잤지만, 이젠 창문을 열어두고 잘 수 있을 만큼 밤공기가 식었다. 에어컨 냉매가 순환하며 내는 소리 대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어 다행이다. 풀벌레 소리는 이맘때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자장가니까. 시골집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누웠던 어린 시절처럼 어둠의 품에 안긴 채 잠을 청하는 기분이 든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
처서는 24절기 중 가장 귀여운 소개말을 가지고 있다. 짧은 문장을 가만히 읊어보는 동안 눈앞에 그림책 한 권이 펼쳐지는 것 같다. 귀뚜라미 등에서 혹여 떨어질까 더듬이를 꼭 붙잡고 있는, 뭉게구름을 타고 어디에 내려앉을까 살피고 있는 처서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싱거운 상상을 하다보면 여름이 물러가고 풀벌레 소리가 시작되길 기다렸을 옛 농부들의 마음이 그려지기도 한다. 처서 무렵부터는 밤 기온이 선선해지고, 낮의 햇볕도 한결 누그러져서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단다. 이때 풀을 베면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도록 풀이 다시 나지 않았기에, 농부들은 부지런히 논두렁 밭두렁의 풀을 베고, 조상의 무덤을 찾아가 벌초를 하곤 했다.
'처서(處暑)'는 머물러 있다는 뜻의 처(處)에, 더위 서(暑)자가 합쳐진 말. 아직 더위가 머물러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처(處)에는 '처리하다'라는 뜻과 '멈추다'라는 뜻도 있으니 '더위를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든다. 그건 여름과 작별한다는 뜻일 테니까. 결별이 기약 없는 헤어짐이고, 이별이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이라면, 작별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일을 가리킨다. 미리 준비한 인사를 전하고 잘 보내주는 일, 그리하여 다음을 기약하는 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절기를 그날 '하루'로 여기는 것인데, 실은 다음 절기 전까지의 기간을 '한 절기'로 본다. 처서는 8월 23일 하루가 아니라, 백로가 오기까지의 열일곱 날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서란 이 여름과 시간을 들여 인사하고 천천히 작별하는 과정이겠다.
제철 숙제 연재를 시작한 후로, 절기 풍습을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 지낸다. 처서와 관련해서는 옆에 앉은 이의 어깨를 치며 얘기해주고픈 풍습을 두 가지나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호미씻이'. 여름내 매만지던 호미와 농기구들을 깨끗이 씻어놓고 잔치를 여는 날로, 대서에 소개한 '복달임'과 비슷한 농부들의 회식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뜨거운 태양 아래 김매기를 해야 했던 농부들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자, 바쁜 한해 농사를 얼추 마무리 짓고 수확만 남겨둔 상태에서 벌이는 즐거운 잔치이기도 했다고. 여름내 손에 붙인 듯 지녔던 생업의 도구. 옛 농부들에게 그게 '호미'였다면, 우리에겐 무엇일까. 밭에서 김을 매는 대신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내게는 펜이나 키보드일지도. 물에 씻을 순 없으니 먼지라도 구석구석 닦아주고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채 어디 시원한 곳을 찾아 집을 나서고 싶어지는 풍습이다.
호미씻이보다 마음을 빼앗긴 처서의 두 번째 풍습은 '포쇄'다. 볕에 쬘 포에, 볕에 말릴 쇄. 장마가 있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눅눅해진 책이나 옷을 모두 꺼내어 햇볕에 쬐고 바람에 말리던 일을 뜻한다. 고서를 만드는 데 사용된 한지는 습기에 약해 썩거나 벌레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책이나 옷을 보다 오래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풍습이라고. 주로 일 년 중 햇볕이 가장 좋은 시기에 정기적인 포쇄를 했다. 민가에서 옷, 책, 곡식 따위를 마당에 널어 습기를 말렸다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에서는 '포쇄별감'의 지휘 아래 실록을 말리는 것이 큰 행사였다. 여름내 눅눅해진 책과 옷을 가을볕과 바람에 말린다니. 필요에 의해 생긴 풍습이고 그것도 하나의 일이었을 테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낭만으로 읽히고 만다.
'포쇄'를 알게 된 후로는 무얼 하든 여름내 눅눅해진 나를 말린다는 심정으로 돌아다녔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강에게 나가자고 하면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 땐 품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미리 시무룩한 얼굴 준비)
"...나 제철 숙제 원고 써야 돼."
에피소드가 떨어졌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강이 별수 없이 몸을 일으킨다. 그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간다는 듯 주섬주섬 가방을 꺼내서 책도 담고, 카메라도 담고, 얼음 팩도 담고, 캔 맥주도 담는다.(?)
눕기 좋은 나무 그늘이야 몇 군데 알고 있다. 잔디밭이나 숲속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나를 말리고, 보냉백 안에 같이 넣어 왔다가 물기에 젖어 우글우글해진 시집도 말린다. 원고 써야 한다더니 대체 (누워서) 뭐하는 건데, 눈으로 묻는 강에게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풍습을 실천 중이야" 답한다. 고려 시대엔 보냉백도 맥주도 없었을 테지만 이쯤 되면 원고는 핑계였단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도 안다.
그렇다고 눅눅한 마음마저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의 우리에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속을 다 꺼내놓고 말할 수 없을 때 말릴 수라도 있다면. 한지로 만들어진 듯 습기에 약한 마음은 햇빛과 바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옷과 책뿐만 아니라 마음도 햇볕 좋은 시기에 정기적으로 말릴 일이다. 포쇄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 중 하나는 송나라 유의경이 편집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한낮에 해를 보고 누웠기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뱃속의 책을 말리고 있소
出日中仰臥 人問其故 答曰 我曝書
뱃속의 책을 말려야 했던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눅눅했을까. 젖은 문장이 다 마를 때까지, 번진 자국이 옅어질 때까지 바깥에 오래 누워 있자고 말하고픈 계절이다. 초가을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 여름과 천천히 작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계절.
처서 무렵의 제철 숙제 나만의 '포쇄일'을 정해보세요. 여름내 눅눅해진 나를 데리고 나가 말린다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장소에 돗자리나 의자를 펴보시길. 하루 종일 바람에 잘 말린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 집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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