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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지의 제철숙제] 어느 여름, 새끼 제비를 도왔더니 생긴 일
8화 : 입추엔 제비의 비행이 제철
제비 동아리 어린이들에게 해마다 제비의 도착은 반갑고, 가을 무렵 다가오는 작별은 서운한 일이겠지. 벼는 익어가고 개는 왕왕 짖는데, 낮게 비행하는 제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2023.08.08)
제철에 진심인 사람이 보내는 숙제 알림장.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제철에 있습니다. 제철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중에 말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절기마다 소개합니다. |
"제비 왔네!"
시골집에 갔다가 처마 아래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몇 해 전 처음 제비가 찾아왔을 때 혼자 집 짓는 게 힘들어보였던지 아빠는 이듬해 처마 세 군데에 나무 막대기를 덧대는 기초 공사를 해주었다. 벽면에 위태롭게 흙을 붙여나가는 방식보다 아래에 받침대를 두고서 둥지를 만들어가는 게 제비 입장에서 조금 더 쉬울 테니까.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한 사람처럼 제일 왼쪽에는 제법 널따란 나무판자를 붙여두기도 했다. 다시 찾아온 제비는 중간 나무 막대를 골랐고, 다음 해에 온 제비는 왼쪽 나무판자를 골랐다. 그때 아빠가 완성된 제비집을 보고 한탄했던 것도 기억난다.
"집을 지을라믄 쫌 가운데 짓지, 저키 한쪽에 삐뚜룸하게 짓나."
그야 제비 마음이었을 텐데, 가운데 정렬이 안 된 둥지를 보는 게 영 신경 쓰였나 보다. 지난해엔 어쩐 일인지 제비가 찾아오지 않아 서운하던 차, 올해 다시 새끼들로 복작거리는 둥지를 보니 반가웠다.
입추 무렵 시골에 가면 제비들이 낮게 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전깃줄이나 빨랫줄에 앉아 있다가 논 위로 뒤집힌 포물선을 그리며 날곤 하는데, 벼 이삭에 아랫배가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제비는 평균 시속 47킬로미터 정도로 날다가 먹이를 포획하거나 천적을 피할 땐 시속 200킬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다. 괜히 날쌔게 보였던 게 아니다. 봄의 전령으로 불리기도 하는 제비는 삼사월에 찾아와 그해에 새끼를 두 번 치기 때문에 9월 중순까지도 볼 수 있다. 지금 시골집 처마에 자리 잡은 어미는 아마도 두 번째 육아 중일 것이다. 뙤약볕 아래 벼 이삭이 여물어가고 여름 제비가 논 위로 낮게 나는 계절, 입추다.
가을에 들어선다는 뜻의 입추(立秋)는 8월 초에 든다. 24절기가 중국 화북 지방 기후를 기준으로 시작된 탓에, 우리나라는 아직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를 지날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이렇게 더운데 무슨 입추냐!" 하는 푸념도 터져 나온다. 물론 한낮엔 여전히 불볕더위지만, 입추가 바꾸어 놓는 것은 낮이 아니라 밤이다. 후텁지근한 열대야가 이어지다가 입추를 기점으로 묘하게 저녁 바람이 시원해진다. 밤 산책을 나서 걷다보면 "신기하다. 바람이 시원해졌네" 하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만큼. 그 청량함은 뭐랄까, 계곡물에 한번 담갔다가 물기를 털어낸 상추 같은 바람이라 해야 할까.
그건 매해 반복되는 일이어서, 입추마다 속으로 혼자 되뇌곤 했다. '입추 매직이다!', '올해도 입추 사이언스다!' 그러다 조선 시대 문인이자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가 <농가월령가> 7월령에서 입추 무렵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걸 발견했다.
"늦더위가 있다 한들 계절의 차례를 속일 수 없어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바람 끝도 다르다."
계절의 차례를 속일 수 없다니. 입추의 미묘한 변화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나 싶어 기억해둔다.
주말에 시골집에 간 건 엄마 인숙 씨의 생일을 맞아서였다. 한낮엔 농사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웠기에 근처 계곡에 가서 '복달임'도 하고 저마다 판판한 바위를 찾아 누워 있다가 왔다. 시골길 곳곳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폭죽 터지듯 피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참깨 타작을 했다. 베어낸 참깨 줄기를 말려두었다가 나무 방망이로 탈탈 털면 깨가 쏟아져 나온다. 아래 깔아둔 비닐에 깨를 모은 다음 체에 걸러 불순물을 1차로 제거하고, 선풍기 바람에 부스러기를 날려가며 뽀얀 참깨만 남기는 과정을 거친다. 참기름 한 병이 만들어지려면 얼마나 많은 공수가 드는지. 이제 그만 농사일을 줄이라고 해도 나이 든 부모는 말을 듣지 않고, 땀에 젖은 서로의 얼굴에 참깨 알갱이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웃기나 할 뿐이다.
이제 막 벼 이삭이 패기 시작한 논 위로 거대한 뭉게구름이 만들어진 걸 올려다보다가 어디선가 개가 왕왕 짖어 웃음이 났다. 입추와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속담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입추에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늦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받은 벼가 어찌나 잘 자라는지 귀 밝은 개가 그 기척을 느끼고 짖을 정도라는 뜻이다. 실제로 입추 무렵은 벼 줄기에 '마디'가 생기며 성장이 대나무처럼 빨라지는 시기이자, 여태 길쭉이 자란 풀처럼 보이던 벼에 볼록볼록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때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벼가 자란다고 소리가 날까? 싶다가도, 무럭무럭 자라는 벼를 보며 흐뭇해했을 농부의 마음이 짐작되기도 한다.
"어마야, 큰일 났다!"
오후 늦도록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집안에 있는데 마당에서 빨래를 걷던 엄마가 소리쳤다. 온 가족이 놀라 뛰쳐나가 보니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제비 두 마리가 처마 아래 떨어져 있었다. 아빠가 서둘러 사다리를 가지고 왔다. 그사이 나는 새끼들을 조심스레 손으로 감싸 들었다. 두 마리 모두 무사히 둥지에 넣어주자 전깃줄에 앉아 노심초사 하고 있던 어미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살피는 몸짓이었다. 오후 내내 쉬지 않고 먹이를 구해 와서는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보았던 터였다. 바닥에 떨어진 새끼들을 제 힘으로 옮길 수도 없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다행히 아직 온몸이 말랑한 새끼들은 다친 데가 없어 보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우리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둥지 안에 두 마리가 더 있으니 도합 네 마리인데 폭염에 서로의 체온이 덥게 느껴져 밀쳐내다 보니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하는 의견 1.
어미가 주는 먹이를 서로 받아먹으려고 경쟁하다 생긴 일일 거라는 의견 2.
다른 새가 둥지를 공격한 걸 수도 있으니 CCTV를 돌려보자는(?) 의견 3.
인숙 씨는 그사이 새끼가 또 떨어질 것을 염려해 푹신한 방석을 가져와 깔아두고 있었다. 추락 방지 에어 매트를 설치하는 것처럼.
"내년에 제비가 진짜 박씨 물어오는 거 아냐?"
"내 이카다 부자 되겠네."
그런 농담도 나누면서. 날도 덥고 농사일도 아직 남았는데, 이제 제비가 은혜 갚을 일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좀 나는 것도 같았다.
"자들은 꼭 사람 있는 데만 집을 짓는데이."
아빠의 말에 검색해보니 제비는 원래 동굴 안에 살다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인간에 적응한 동물로, 둥지 가운데 99퍼센트 이상을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짓는다고 한다. 인간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믿는 동물이라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 둥지를 짓기 전 집주인의 성품도 관찰한다는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 경남에서는 초중고 70개 동아리가 참여해, 지역에 찾아오는 제비를 모니터링하며 보호하는 '제비생태탐구 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라는 기사도 보았다. 제비 동아리 어린이들에게 해마다 제비의 도착은 반갑고, 가을 무렵 다가오는 작별은 서운한 일이겠지. 벼는 익어가고 개는 왕왕 짖는데, 낮게 비행하는 제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튼 내년을 기다려볼 일이다. "어느 여름, 바닥에 떨어진 새끼 제비를 도와주었더니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
입추 무렵의 제철 숙제 작별이 머지않았으니 낮게 비행하는 여름 제비를 찾아보세요. 논밭이 있는 교외가 아니더라도, 요즘엔 도심 공원이나 하천, 골목길에서도 종종 마주칠 수 있습니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군청색 턱시도를 빼입은 듯한 모양새를 하고서 낮고 빠르게 나는 새가 있다면 제비일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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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최선을 덜 하는 삶을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면 됐지, 그럴 수 있어. 나에게도 남에게도 그런 말을 해 주려 노력한다. 너무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게 취미다. 오늘을 잘 기억하면,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으로 순간을 모은다. 언젠가 바닷가 근처 작은 숙소의 주인이 되는 게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