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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경험에서 시작하기

'문지혁의 소설 쓰고 앉아 있네'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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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남들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을 알고 이해하고 느껴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역학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섬세하게 파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023.07.20)


격주 목요일, <채널예스>에서
소설가 문지혁의 에세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를 연재합니다.


언스플래쉬

이제 당신은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만큼은 꼭 글을 써야지. 다짐도 했습니다. 급한 이메일도 다 써두었고, 저녁도 배불리 먹었으며, 아이들도 재웠고, 유튜브와 넷플릭스라면 질릴 만큼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눈앞에 놓인 하얀색 빈 화면을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손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일 분, 오 분, 십 분, 삼십 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잘 시간은 진작에 넘겼습니다. 슬슬 피로와 졸음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당신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입니다.

'대체 뭘 써야 하지?'

수업이나 강연이 끝나고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글을 써도 괜찮을까요?"

대개 무해하고 예의 바른 얼굴을 한 이분들의 고민은, 사실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들립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글을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잖아요? 정말 그렇다면 묻지도 않았겠지요. 번역기가 필요합니다. 질문의 진짜 뜻은 아마 이럴 거예요.

— 저는 글을 꼭 쓰고 싶은데요, 할 만한 이야기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요?

제가 수업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처음 시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내 경험, 내 기억, 내 역사를 쓰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의 상호 작용 속에 만들어졌던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쓰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쓰라'는 소설 쓰기에 관한 오래된 격언을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나 역시 나 자신을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우리는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과 깊이, 원리와 원인, 디테일을 아는 사람입니다.

— 하지만 제게는 특별한 경험이 없는데요?

네, 바로 이 지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소설을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거의 믿음이나 신앙에 가까워 보이는 이 생각은, 사실 문학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틀린 말입니다. 한때 그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맞지요.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잘 통하는 스토리텔링인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소설은 점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요.

과거에 이야기는 주인공으로서의 영웅(hero), 즉 왕과 귀족과 기사를 필요로 했습니다. 유별나게 뛰어나고 태생이 고귀한 이들이 벌이는 커다란 스케일의 전쟁과 모험, 정복이 곧 이야기였죠. 하지만 현대에 이를수록 문학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위에서 아래로, 밖에서 안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입니다. 특출났던 영웅 대신 중산층이, 서민층이, 극빈층이, 특별한 것 없는 보통 사람과 여성과 장애를 가진 이들과 이제까지 외면당했던 소수자들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공간입니다. 일상 바깥의 외부 세계에서 일상의 평범한 시공간 안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죠. 전쟁터에서 사회로, 일상으로, 개인의 내면으로(의식의 흐름!), 더 나아가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새로운 주인공들은 외부로의 물리적인 여정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의 정신적인 모험을 떠납니다.

자, 그렇다면 특별하지 않은 우리와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왕과 귀족과 기사들의 시대는 갔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가 글쓰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함을 드러내거나 찬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는 새로 쓰일 필요가 없겠지요. 여기서 핵심은 평범 그 자체가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우리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 다 유별나고 독특한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통찰(insight)'이라고 부르죠. 중세부터 사용된 이 영어 단어의 본래 뜻은 '안에서 보는 것(inner sight)'이자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sight with the eyes of the mind)'입니다. 소설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이라는 대전제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잘 들어맞는 말 아닐까요? 우리가 주인공의 안으로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우리에게는 '인사이트'가 찾아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위장된 비범함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는 눈송이처럼요.

이 작업에 필요한 경험이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감정'입니다. 특별한 경험 자체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고요? 조금 전에 말했듯 소설이란 주인공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란 바깥 세계와 나의 내면이 만나 빚어지는 상호작용의 물리적, 화학적, 정신적 결합물이니까요.

"원양 어선 타봤어요? 작가가 그 정도 경험도 안 하고 무슨 소설을 써."

언젠가 어떤 분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당황해서 웃고 말았지만, 이제는 되묻고 싶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작가가 되나요? 원양 어선에는 예비 소설가들만 타고 있나요?

흔히 소설은 천재가 드문 장르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왜?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경험은 전쟁, 스카이다이빙, 오지 탐험, 원양 어선 타기 같은 극단적인 체험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감정적인 경험들이 중요합니다. 왜?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장르이기 때문에. 언어로 재구성된, 인간의 상호 작용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가는 남들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을 알고 이해하고 느껴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역학을 누구보다 정확하고 섬세하게 파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주인공!)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대양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가만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세요. 태평양보다 넓은 그 내면의 바다에 어떤 물결이 치고 있는지, 수면 위에 무엇이 떠다니고, 바닥 깊은 곳에는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를요. 사라진 보물선은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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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지혁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체이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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