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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가 읽은 그림책] 『우리는 공원에 간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원시적 풍경 곳곳에 방치된 관람차와 정글짐과 그네가 있다. 불타는 듯한 노란 나무와 짙은 비를 내리는 청회색 구름, 핏빛 얼룩을 지닌 검은 숲과 따뜻한 적갈색의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들판은 마치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그려놓은 듯 단절되어 흩어져 있다. (2023.08.03)
여전히 외출할 때 마스크를 챙긴다. 버스나 택시를 탈 때, 물건을 사러 상점에 들어갈 때,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할 때 나는 여전히 마스크를 쓴다. 그럴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머리로 납득한 뒤에도 몸은 지난 3년의 제재가 남긴 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이유가 이대로 감염병을 끝내 비켜 가고 싶다는 강박 때문인지, 집 밖에서는 무엇이든 손 닿는 것을 꺼릴 정도로 본래 높게 타고난 불안 탓인지 이제는 따지는 것도 무의해져 버렸다. 확실한 것은 이 각인과도 같은 경험이 내가 가진 결벽의 성향을 강화시켰다는 것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저마다의 삶에서 나빠진 것이 한두 가지쯤 없으랴마는 억울하기로 맨 앞줄에 설 이들은 아무래도 아이들일 것 같다. 외출의 자유를 차단당한 채 아동기의 한 시절을 뚝 떼어 고립되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당장 바이러스의 발현과 내 지난 과오들 사이의 인과가 선명한 형태로 결속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무수한 잘못들로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자각에 소스라친다.
이런 마음이 극점을 찍은 것은 언젠가 큰조카가 찍은 스티커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찍었다며 자랑하는 아이의 스티커 사진 속에는 얼굴을 맞댄 열세 살 여자아이들이 오직 눈으로만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 아래는 모두 하얀 마스크로 가린 채. 사진을 보고 불현듯 알았다. 아직 세상에 어떤 채무도 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너무 이르게 도착한 계산서가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것을. 어떤 융통성도 끼어들 틈 없는 단절과 고립을 아이들이 내내 감내하고 있었다는 것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에게는 텅 빈 놀이터를 보는 일이 바로 그런 자각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버려진 놀이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봉쇄령이 막 끝났을 때였다. 알레마냐의 놀이터 그림들 속에는 추상으로 그려낸 공허가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원시적 풍경 곳곳에 방치된 관람차와 정글짐과 그네가 있다. 불타는 듯한 노란 나무와 짙은 비를 내리는 청회색 구름, 핏빛 얼룩을 지닌 검은 숲과 따뜻한 적갈색의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들판은 마치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그려놓은 듯 단절되어 흩어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저마다의 놀이를 하는 중이다.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때로 놀이터는 비어 있다.
구아슈와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들은 알레마냐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어둡고 야성적이다. 묵직하면서도 천진하고, 신비로우면서도 친밀하다. 그런 그림들을 사라 스트리스베리의 다성(多聲)적인 목소리가 하나로 꿰어나간다.
사람들은 우리가 별에서 왔다고 한다. 우주의 먼지에서 생겨나, 아주 먼 옛날 어디에선가 이 세상으로 날아왔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공원에 간다. 공원은 도시 속의 숲, 저 멀리 낯선 세상이다. 공원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어떤 날은 세상이 뒤집어질 만큼 많은 일이 일어나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상관없다. 우리는 그냥 공원에 가고 싶을 뿐이다. 여기 나무들은 주름진 가지들을 하늘로 뻗고 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 자리를 지키겠지. 우리도 이 나무들처럼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다.
존재의 기원을 탐구하며 문밖의 세계로 무한히 접속되기를 꿈꾸는 책, 『우리는 공원에 간다』 속의 목소리는 마치 흐미(몽골의 전통 배음 창법.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듯한 기법)로 부르는 노래 같다. 때로는 밖에 나가 놀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 같고, 때로는 생의 모든 비밀을 풀어낸 어른 같다. "다시는 집에 가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 속에는 고백과 선언과 폭로와 암시가 배어 있다.
아이들에게 매일 새롭게 떠날 모험의 장소가 있다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훗날 물리 교과서에서나 배우게 될 온갖 물리 법칙들을 이름 모른 채로 온몸으로 생생히 체득해 나갔던 그 시절, 자라는 일은 스스로 놀이를 발명하고, 친구를 만들고,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성분을 오감을 동원해 구석구석 탐험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속에는 작지만 온전한 자유가 있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약속도 없이 매일 나와 놀던 그때, 우리를 가장 두렵고도 기쁘게 했던 건 그곳에 어른이 없다는 것이었으니까.
알레마냐는 『우리는 공원에 간다』를 통해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공원과 박탈당한 아이들의 자유, 그리고 완전히 버려진 놀이터로 하나둘 돌아오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는 굴곡진 들판 위로 검은 골격을 가진 커다란 구조물 하나가 등장한다. 온갖 형태의 그네가 달린 거대한 정글짐이다. 그곳에 아이들이 신나게 매달려 논다. 옆에는 까만 코끼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마치 모든 것이 머잖아 제자리를 찾으리라는 희망의 암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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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자. 비혼이고 고양이 '탄'의 집사이며, 채식을 지향하고 식물을 돌보며 산다. 그림책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번역해 소개했다.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글/<사라 스트리스베리> 그림/<안미란> 역19,8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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