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정지혜 작가님께 - 성동혁 시인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서점 운영을 위해 지혜 님께서 다짐한 저 말이 이제는 병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책 속의 선생님께서 말했듯이 그다음, 그 너머의 일들은 '신의 영역'이 아닐까요. (2023.08.02)
여름엔 편지를 쓰겠다 했지요.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리네요.
지혜 님을 처음 뵌 건 『뉘앙스』의 북 토크 때였죠. 서점원으로서의 지혜 님을 알게 된 것이지요. 정갈하고 세심한 자리였죠. 모든 낭독회가 세세히 기억에 남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날의 자리는 그러했죠. 독자 분들과 지혜 님의 애정으로 『뉘앙스』의 면면을 새롭게 알아가는 듯했어요.
정말 좋은 낭독회는 작가와 독자, 서점원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하나의 마음으로 귀결되는 일이 아닐까요. 『뉘앙스』의 편집자님도 함께했던 날이었죠. 낭독회가 끝나고 모두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눈 수다가 책보다 더 오래 남은 날이었죠.
그런 응원을 받으면 결국 '더 좋은 글을 쓰자'라는 마음보다 '더 건강히, 삶을 잘 살자'는 마음이 들어요. 집으로 오는 길, 한 문장만큼 건강해진 기분이었죠.
그 후 쓰는 지혜 님을 발견했죠.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죠. 서점원을 하시며 두 권의 책을 내신 걸요. 용감한 서점원이며, "진심을 책에 꾹꾹 눌러 담"는 편집자셨으며, 근면한 작가가 된, 품이 커다란 독자라는 것을요.
수많은 책들 사이를 유영하며, 가끔은 스스로 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요. 지혜 님은 지금 어느 단락에 서 계시나요.
일 년 전 지혜 님의 투병 소식을 들었어요. 수술을 하시고 항암을 하시는 과정을 들었죠. 종종 올려 주시는 치료와 회복의 과정을 멀리서나마 전해 듣게 되었어요. 제가 아플 때, 어떤 친구들은 말했죠. 너무 무서워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저는 그럴 때마다 친구들에게 말했죠.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편히 연락해도 된다고. 여력이 있으면 답장을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지혜 님께 안부를 묻고 싶을 때, 전 제 친구들과 비슷한 마음이 들었어요. 메시지를 여러 번 썼다 지웠죠.
그날은 저도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었어요. 병원을 나오며 연락을 드렸죠. 지혜 님은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궁금한 날에, 어린이 병동 앞을 지나던 어느 날에 저를 종종 떠올렸다는 답장을 주셨죠.
고통의 경중은 있을 수 없고, 수치화할 수도 없겠죠. 그럼에도 지혜 님의 치료와 회복은 지켜만 보기에도 무겁게 느껴져,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도하게 되었어요.
지혜 님의 '사적인서점'이 그러하듯,
어떤 고통은 한 사람만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공공연하게 모두의 것이 되는 순간에 다다른다 생각해요. 고통의 영역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겠지만, 치료와 회복의 과정은 공적 영역이 되죠. 치료와 돌봄은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요.
'이제 내 삶이 나의 것만은 아니구나.'
어느 순간 느꼈죠. 어렵게 회복된 몸을 공공재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써야 했죠. 치료와 회복에 기여한 사람들을 종일 곁에서 보고 느낀 후죠.
몇 달 전 플리 마켓을 하던 날, 지혜 님께서 친구 분과 깜짝 방문을 하셨죠. 반갑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죠. 친구를 보면 그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요. 지혜 님과 친구 분은 토요일 점심에 어울리는 귀한 손님이었죠. 유독 지혜 님의 주변엔 친절하고 선한 분들이 가득한 것 같아요. 맑게 손을 건넨 지혜 님 덕분이겠죠. 이제 그 분들이 지혜 님께 손을 내밀고 때로는 보호자가 되고 있다고 믿어요.
두 번째 처방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을 위한 책을 처방하는 데는 최소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린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한 시간, 편지를 쓰는 한 시간. 그러나 당시에는 오백 자 분량의 편지를 쓰는 데만 서너 시간이 걸렸다. 손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지혜 씨, 백 퍼센트 만족은 신의 영역이에요. 왜 타인의 마음까지 지혜 씨가 통제하려고 해요?"
세 번째 처방은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정지혜,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 중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는 것'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서점 운영을 위해 지혜 님께서 다짐한 저 말이 이제는 병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책 속의 선생님께서 말했듯이 그다음, 그 너머의 일들은 '신의 영역'이 아닐까요.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종종 스스로의 원고를 보며 '이 책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해요.
책이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어떤 책은 꼭 필요하곤 하죠. 어떤 시기를 지나는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 존재하죠. 그래서 저는 지혜 님의 다음 책을 기다리기로 했어요. 성실히 치료와 회복을 통과하는 기록을 보고 싶어요. 그 책이 고통의 중심에 불쑥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다르길 바라요.
덕메들과 함께일 때 저는 '사적인서점을 운영하는 정지혜'를 내려놓고. '아내 정지혜'와 '맏딸 정지혜'도 내팽개친 채, 그냥 내가 되어서 순수하게 웃고 떠들고 기뻐하곤 해요.
―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중
하지만 기쁨도 슬픔도 체력이겠죠. 어쩔 수 없이 작게 웃고 무던해질 때가 생기곤 하죠. 그러나 '무엇을 하려는 마음'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마음'이 필요할 때가 있죠. 정말로 귀한 일에 쓸 체력, 맘껏 기뻐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길 바랄게요.
얼마 전 '사적인서점'이 성산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파주로 옮겼단 소식을 보았어요. 파주의 초록은 넓고 낮은 곳이라 다행이에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을이니, 지혜 님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기에 알맞은 곳이겠죠.
지혜 님의 눈썹이 다시 나고, 머리에도 솜털이 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미 어떤 단락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더 이상 '행복'이나 '풍요'를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삶의 모순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쓰여지는 이야기를 자주 찾게 되었지요. 방탄 소년단에게는 '충족된 인간이나 완벽한 세계에는 없는, 작은 조개껍데기의 안쪽을 보는듯한 복잡한 광택'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내면서도 결코 패배주의로 나아가지 않는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중
"자신들의 연약함을 기꺼이 드러내면서도 결코 패배주의로 나아가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 우리 모두 장마에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길, 발을 땅에 딛고 충분한 여름을 보내길, 여기에서 온맘으로 응원하며.
2023. 칠월.
동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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