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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의 혼자서 추는 춤] 우리 십 년 뒤에 만납시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7월호 - 마지막 화
번역 때문에 늘 사전을 가까이하게 된 것도 시인으로서 누리는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냥 예전처럼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이어 나갔더라면 사전을 볼 일은 분명 거의 없었겠지. 나는 그렇게 가끔 사전에서 만나는 재미난 단어나 속담을 모아두기도 한다. (2023.07.04)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 작가에게 번역은 곧 '혼자서 추는 춤'입니다. 번역을 통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먼바다를 항해합니다. 번역가의 충실한 가이드를 따라 다채로운 세계 문학 이야기에 빠져 보세요. |
가끔 번역하느라 시를 못 써서 어쩌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있다.(주로 문학 관련 직업을 가진 분들이 이렇게 묻는다) 거꾸로 번역하다 보면 시도 좀 쓰게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도 있다.(주로 비문학 관련 직업을 가진 분들이 이렇게 묻는다) 그럴 때마다 좀 난감해진다. 대답은 늘 '예스 앤드 노'이니까. 번역 때문에 시를 못 쓰는 것 같을 때도 있고, 오히려 번역 때문에 시를 쓰게 되는 것 같을 때도 있으니까. 시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는지 난들 어떻게 알겠나?
기본적으로 시 쓰기와 문학 번역은 언뜻 통하는 데가 있을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같은 회사에서 만드는 물냉면과 비빔냉면만큼이나 다르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요컨대 시인으로서의 나와 번역가로서의 나의 교집합은 '단어와 문장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게 전부다. 시 쓰기는 정말이지 철두철미하게 무의식적인 작업이고,(머릿속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글의 속도를 손이 간신히 따라간다) 번역은 정말이지 철두철미하게 의식적인 작업이니까.(생각하는 속도가 손의 속도보다 훨씬 더 느려서 늘 오타부터 난다)
그렇다, 그런 면에서 번역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정신적 중노동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85장 「분수」에는 '플라톤, 피론, 악마, 제우스, 단테 같은 모든 육중하고 심오한 존재들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머리 위로 언제나 거의 보일 듯 말 듯한 김이 솟아오르고 있다고 확신한다.'로 시작하는 재미난 대목이 나오는데, 가끔은 내가 작업하는 모습도 거울에 비추어보면 '머리 위의 공기가 기이하고 복잡하게 꿈틀대며 굽이치는' 광경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니까.
물론 번역은 심오하다기보다는 그저(?) 테크니컬한 작업에 가까운 일일 텐데, 그래도 하나의 테크닉에 숙달한다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때로 테크닉이 한참 모자라서 죽을 쑤고 있을 때는 어쩌면 이 일이 생각보다 심오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에도 빠지게 되고, 한심한 한숨을 심오한 사유에서 비롯된 뜨거운 '김'으로 착각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시도 쓰는 사람이어서 번역이 때로 더 수월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끔씩 번역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전해주시는 어느 대선배 번역가님(?)께서도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오랜만에 그 책을 찾아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내가 처음 번역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소설가가 번역하는 거니까 보통 번역자와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의식 내지 자부심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지만, 한동안 경험을 쌓고 여기저기 머리를 쿵쿵 부딪히고 나니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 훌륭한 오디오 장치가 최대한 자연음에 가까워지기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의 진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히 옮기는가, 그것 하나다. (...) 취미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파고들면 상당히 심오한 것이 번역의 세계다. _무라카미 하루키, 「취미로서의 번역」, 『장수 고양이의 비밀』
그렇군! '파고들면 상당히 심오한 세계'라니, 적잖이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무려 하루키가 저렇게 말했으니 말이다. 번역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저 단순한 문장 훈련이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사고 훈련이고, 그것이 나의 정신 세계, 더 나아가 시에 실질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설령 안 그렇더라도 그렇다고 믿는 편이 속 편하리라!)
번역 때문에 늘 사전을 가까이하게 된 것도 시인으로서 누리는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냥 예전처럼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이어 나갔더라면 사전을 볼 일은 분명 거의 없었겠지. 나는 그렇게 가끔 사전에서 만나는 재미난 단어나 속담을 모아두기도 한다. 'sea anemone(바다 아네모네)', 'traveler’s-joy(여행자의 기쁨)' 같은 단어들(각각 '말미잘',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인 클레마티스'를 뜻한다), '주염나무 도깨비 꼬이듯' 같은 북한어 속담('부정적인 대상들이 한데 모여 와글거리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등등. 번역가이기에 누릴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기쁨인 동시에, 오로지 시인이기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실용적 보석들이랄까.
그런데 사전을 보다 보면 느끼는 불만도 있으니, 바로 예문의 수준이다. 가끔 정말 멋진 예문을 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이 단어에 겨우 이런 예문밖에 생각하지 못했나' 하고 실망하고 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에 교과서보다는 노래로 영어 공부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어학서의 모든 예문이 문학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어학서도 한 권쯤 있으면 좋지 않을까? 문득 언젠가 멋진 예문으로 가득한 영문법 책 한 권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예문이 내가 번역한 문학 작품에서 엄선된 그런 책 말이다. 아직은 절대 무리고, 한 십 년 후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적어도 십 년은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 과거의 저처럼 멋진 예문으로 영어를 공부하길 바라는 미래의 독자 여러분, 우리 십 년 뒤에 만납시다. 부디 그때까지 다들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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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번역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옮긴 책으로 『모비 딕』, 『바닷가에서』, 『폭풍의 언덕』, 『밤의 해변에서 혼자』, 『짧은 이야기들』,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시인 X』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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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저/<록웰 켄트> 그림/<황유원> 역23,100원(0% + 5%)
미국을 대표하는 그래픽 아티스트 록웰 켄트가 어둠의 빛과 빛의 어둠으로 구현한 『모비 딕』 “사려 깊고 까다로우며 그 어디에도 속한 적 없이 별나고도 다정한 이 남자가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책의 예술성에 기여한 성취만은 불멸하리라.” _뉴욕 타임스(1971)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을 맞아, 193..